지안 스님 (조계종 고시위원장)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

보리심 일으키면 곧 발심

도 못 닦는 것은 애욕 때문

수행으로 탐진치 소멸시켜야

 

▲ 지안 스님은 … 1970년 통도사에서 벽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4년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통도사 승가대학 강주, 정법사 주지, 조계종 교육원 역경위원장, 조계종 승가대학원 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조계종 고시위원장이자 반야불교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저서와 역서로는 〈왕오천축국전〉 〈조계종 표준 금강경 바로 읽기〉 〈처음처럼〉 〈마음속 부처 찾기〉 〈대승기신론강해〉 〈금강경 이야기〉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다〉 〈연꽃잎 달빛 향해 가슴을 열고〉 〈바루 하나로 천가의 밥을 빌며〉 등이 있다.
 

발심을 한다는 것은 세상의 오욕을 버리고 부처님의 법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안 스님은 발심은 세상의 모든 것을 보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승한 공덕이라 말한다. 지난 3월 9일·16일 동국대 정각원에서는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을 교제로 지안 스님의 법문이 진행됐다. 이 법회에서는 발심의 의미와 수행자의 자세 더 나아가서는 불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번 법회는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으로 공부해보겠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습니다만은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교는 중생들이 깨닫도록, 부처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종교입니다. 그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해요. 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을 발심이라고 합니다. 발심하라는 말은 보리심을 일으키라는 뜻이죠.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며 내 사랑하는 생이 어떤 것인지 바로 알도록 노력해보라는 거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발심을 권장합니다. 발심해야 불교 공부하고 수행할 수 있습니다. 원효 스님 글 역시 발심해서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당신도 깨달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부처의 길을 가라는 뜻이죠. 자 그럼 발심수행장을 읽어볼까요?

 

부제불제불(夫諸佛諸佛)이 장엄적멸궁(莊嚴寂滅宮)은 어다겁해(於多劫海)에 사욕고행(捨欲苦行)이요 중생중생(衆生衆生)이 윤회화택문(輪廻火宅門)은 어무량세(於無量世)에 탐욕부사(貪慾不捨)니라 무방천당(無防天堂)하되 소왕지자(少往至者)는 삼독번뇌(三毒煩惱)로 위자가재(爲自家財)요 무유악도(無誘惡道)하되 다왕입자(多往入者)는 사사오욕(四蛇五欲)으로 위망심보(爲妄心寶)니라

 

여기서 깨달음 자체가 부처님을 의미하죠. 적멸궁은 실제의 궁전 보다는 진리의 집을 의미하는 겁니다. 여기서 화택(火宅)은 윤회를 의미하는데요, 화(火)는 곧 번뇌의 불길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불이 꺼져버려야 윤회도 사라지겠죠.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열반도 불이 꺼져 버린다는 것을 의미해요.

수행이라는 것이 우리 삶의 탐진치 비중을 약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아함경>에서는 탐진치 삼독이 사라진 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천당에 못가는 것은 삼독 때문입니다. 중생들은 삼독을 자기 자신의 재산으로 삼는 것이죠. 악도에 유혹함이 없는데 거기에 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중생들이 오욕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인생의 전부인양 사니 부처의 길을 못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생을 마치고 나서 악도로만 갑니다. 옛날 스님들은 발심을 권장하면서 사람 몸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 생 업이 좋지 못할 때 인간의 몸을 받지 못하고 축생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담 한마디 해볼까요. 숭산 스님이 한 얘기인데요. 숭산 스님이 미국에 있을 때 선센터에 자주 오는 젊은 여자가 있었대요. 스님이 선수련 법회에 나오라고 하니 개 때문에 오지 못한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개 데리고 와서 원주실 같은 곳에 두라고 했어요. 그러니 정말 개를 데리고 이 여자가 왔어요. 그런데 수련 이틀째 오빠한테 전화가 왔대요. 어머니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으로 실려갔다고 말이죠. 그런데 이 여인이 하는 말이 개를 돌봐야 되니 오빠가 알아서 하라고 했대요. 개를 너무 좋아하니 그 여인은 죽어 개가 될 거라고 스님이 말했어요. 이 말의 원뜻은 너무 쓸데없는 취미에 빠지면 안된다는 의미가 있어요.

이 모두가 인간의 허망한 생각일 뿐입니다.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도 망상이죠. 사람이 도를 닦고자 생각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애욕에 매여있기 때문이죠. 제가 아는 청년 중에서는 이런 사람도 있었어요. 몸이 안 좋아 저희 절에 수양을 하러 온 사람이었어요. 스님 되라고 권장하니 사랑을 해보고 싶대요. 죽도록 사랑을 하고 싶다나요? 사실 몸이 아파서 여자친구도 사귀지 못하는 형편이었는데도 사랑에 집착을 하는 거에요.

 

인수부욕귀산수도(人誰不欲歸山修道)리요마는 이위불진(而爲不進)은 애욕소전(愛欲所纏)이니라 연이부귀 산수수심(然而不歸 山藪修心)이나 수자신력(隨自身力)하야 부사선행( 不捨善行)이어다. 자락(自樂)을 능사(能捨)하면 신경여성(信敬如聖)이요 난행(難行)을 능행(能行)하면 존중여불(尊重如佛)이니라

 

자신의 능력 따라서 선행을 닦아야 합니다. 불교의 삶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결과를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닌 공동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얘기하는 보시관이 여기 다 들어 있습니다. 내 존재가 내 개인을 위한 존재가 아니죠. 업보에 의해 과보로 태어나는 생이 있는가 하면 과거 원력에 따라 생을 받는 것을 원력생이라고 해요. 일대사 인연을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죠. 어차피 이 세상에 오게 될 큰 인연이 있었던 거죠. 중생들에게 여래의 지견을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죠. 자기가 즐겨야 하는 개인적인 즐거움 세속의 욕망 오욕락을 버릴 줄 알면 성인처럼 존경 받습니다. 어려운 행을 능히 행한다면 부처님과 같이 존중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죠. 이렇게 탐욕에 집착하는 삶을 이야기해주는 설화가 있죠.

한 행인이 벌판을 지나가는데 난데없이 미친 코끼리가 이 사람을 추격하고 있어요. 코끼리를 피하려다 우물 속으로 들어가니 덩쿨 가지가 있으니 여기에 매달렸어요. 아래로는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고 사문벽에 독사가 네 마리 있어요. 어떻게 해도 속절없는 상황인 거죠. 여기에 또 덩쿨을 보니 흰쥐 검은쥐가 줄기를 갉아 먹고 있네요. 여기에 벌이 집을 짓고 있는데 이 급박한 상황에서 꿀방울이 입술로 떨어지니 너무 달아요. 꿀맛에 도취되어 자기 처해 있는 상황을 잊어버린다는 것이죠. 여기서 코끼리는 무상을, 용은 죽음을, 독사는 우리몸을 뜻하는 지사화풍 사대를, 흰쥐 검은쥐는 밤낮을, 꿀은 오욕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부귀영화는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죠.

결국 이런 것이 다 부질없음을 알고 발심해 수행자가 되는 것이죠. ‘아뇩다라샴막샴보리심’은 가장 깨끗해진 상태의 마음입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선악도 뛰어넘는 고차원적으로 설해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발심할 때 그 마음이 가장 순수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청정하고 순수해지면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니 순수해지고 청정해집니다.

 

유지인(有智人)의 소행(所行)은 증미작반(蒸米作飯)이요 무지인(無智人)의 소행(所行)은 증사작반(蒸沙作飯)이니라.공지끽식(共知喫食)하야 이위기장(而慰飢腸)하되 불지학법(不知學法)하야 이개치심(而改癡心)하나니 행지구비(行智具備)는 여거이륜(如車二輪)이요 자리이타(自利利他)는 여조양익(如鳥兩翼)이니라

 

지혜로운 이는 쌀로 밥을 짓고 어리석은 이는 모래를 삶아 밥을 만드는 것입니다. 재주가 많고 머리가 좋아도 진짜 천재는 도덕적 하자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는 부패 지수가 매우 높습니다. 지능이 높다고 해서 자기 인생 다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 가서 많이 배워 불행한 사람도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수행은 차일피일 미룰 일이 아닙니다.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남한테 보시하는 것을 가장 큰 공덕이라고 말하지만 세상에 있는 걸 다 보시를 해도 발심공덕에 못 미친다고 합니다. 무엇이 인생에서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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