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만나고 싶은 심정 애써 감춰

초의차 ‘다삼매’로 극찬

‘초의차’ 완성시기 짐작케 해

 

 

대정은 척박한 땅, 모슬포에 위치한 이곳은 원주민들조차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 여겼던 곳이다. 모슬포에 위치한 화진포는 추사의 무사안녕을 기원해 초의의 상상으로 그린 〈제주화북진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항구이다. 모슬포를 거쳐 대정에 도착한 추사. 그는 제주 적거지에서 초의가 오기를 기다렸던 듯하다. 대정에서 2년을 지낸 후,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초의차를 극찬한 대목이 눈에 띤다. 〈〈완당전집〉〉〈여초의〉17신에 수록된 이 편지는 〈〈벽해타운첩〉〉에 친필본 편지가 수록되었기에 1842년 10월6일에 쓴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초의의 편지를 얻는 것만도 다행인데 어찌 아득히 먼 바다를 건너 멀리까지 오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대는)스스로 대승법문으로써 세속에 걸림이 없다고 장담하지만 이것을 범부의 안목으로 본다면 어찌하여 대승이 장벽이나 와력에 얽혀 이리저리 분주하여 그 상황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까. 다시 그대는 나 같은 범부에게 와서 금강저(金剛杵)를 맞아야 일과(一果)를 얻을 것입니다. 나의 상황은 목석같을 뿐입니다. 그대가 보내준 차는 과연 가품입니다. 능히 다삼매(茶三昧)를 꿰뚫으셨군요. 글씨는 본래 세월을 다해도 (글씨를)완성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떻게 쉽게 맨 손으로 용 잡는 듯이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때이든 그대가 (제주도로)와서 가져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임진(1842)년 10월 6일

得見草衣一書亦幸 安望其越層溟遠來也 自?以大乘法門而以此凡眼觀之 寧有大乘之爲墻壁瓦礫所纏 東奔西?無以擺際也 且須函 就我凡夫一下 金剛始可進 得一果耳 此狀石木而已 茶包果是佳製 有能透到茶三昧也 書本是窮日月而難了者也 何以易就如赤手捕龍 無論幾時 師須入來 自取去可耳 不宣

이 편지는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답신 편지이다. 제주도를 방문하려는 초의의 계획이 여러 차례 추사에게 전해진 듯. 바다를 건너 제주에 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를 리 없는 추사였기에 “편지를 얻는 것만도 다행인데 어찌 아득히 먼 바다를 건너 멀리까지 오기를 바라느냐”고 말한 것이다.

그의 속내야 얼마나 초의를 만나고 싶었을까 마는 초의를 아끼는 추사의 살가운 정이 오롯이 드러난다. 굳은 약속에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초의이지만 “세속에 걸림이 없다고 장담”했던 터였다. 연이어 무산된 초의의 제주행을 무엇이 분주해 오지 못하느냐는 추사의 질책은 “어찌하여 대승이 장벽이나 와력에 얽혀 이리저리 분주하여 그 상황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까”라고 한 대목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나 같은 범부에게 와서 금강저(金剛杵)를 맞아야 일과를 얻는다”고 한 추사의 쾌변(快辯)은 탈속한 사람에게나 통하는 말이다.

세상에 대한 관심조차 사라진 그가 자신의 처지를 “목석같을 뿐이”라고 한 것은 해탈한 경지인가.

아니면 세상에 무관심을 그리 표현한 것인가. 제주시절 차와 불교에 심취했던 추사였으니 이는 분명 탈속한 그의 삶을 드러낸 말이라 여겨진다.

또한 초의가 보낸 차가 있으니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처럼 그의 마음에 갈증을 해소했을 것이고, 맑고 청량한 초의차는 울적한 그의 마음을 평안하게 했으리라. 그가 “그대가 보내준 차는 과연 가품입니다. 능히 다삼매를 꿰뚫었다”고 한 초의차의 평가는 최고의 찬사로, 초의차의 완성을 함께 축하한 말이기도 하다. 필자가 이 대목을 주목하는 연유는 초의차의 완성 시기를 밝힐 수 있는 단서이기 때문이다. 한편 초의가 추사에게 글씨를 부탁한 듯, 완성도 높은 글씨는 간단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추사의 변은 그의 예술적 준칙을 또렷하게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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