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 부처의 몸

타종교에 없는 불교만의 조형물
숭배 아닌 청정한 마음의 원력
한국의 석탑 안정감·조화 이뤄
‘부처의 몸’이라 믿는 우매함 달래
“영겁을 지킨 탑의 침묵을 듣자”

▲ 국보 112호 감은사지 석탑. 유구한 역사 속에서 석탑은 유유히 시간을 관조하며 서 있다.
“절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고, 탑들은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 듯하다.”

〈삼국유사〉에 묘사된 신라 서라벌의 풍경은 그야말로 부처님의 나라, 불국(佛國)이다. 오늘날 경주에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서도 당시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유독 외침이 잦았던 이 땅에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석탑이다. 그래서 중국을 전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하고,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한다. 전란의 풍화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목탑이 얼마 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산 많고 돌 많은 이 땅에서는 거친 돌 깎아 석탑을 짓기가 더 쉬웠던 까닭이다.

석탑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한국미술사학의 태두인 우현 고유섭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그는 금수강산 구석구석 보석처럼 숨겨져 있는 석탑을 찾아 잊혀져가는 유물들을 기록하고 그 가치를 알리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교통이 발달된 오늘날에도 전국에 흩어진 탑을 조사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그가 생존했던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보통 열정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는 왜 탑에 매료되었을까?

미술사 연구자들을 만나면 한국의 불교조형물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곤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감은사지 석탑을 꼽는다. 나 역시 감은사지 석탑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텅 빈 폐사지에 우뚝 솟아있는 두 개의 탑은 그 어떤 거대한 축조물보다 더 웅변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장중하면서도 단순한 그 탑의 기상과 위엄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힘과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 문무왕의 호국의 의지와 탑을 만들고 지켜온 민초들의 염원을 생각하며 오래 그곳에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석탑은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석탑 앞에 서면,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탑돌이를 하다가 눈 맞은 젊은 남녀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지아비를 그리워하다 죽어간 아사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얽힌 무영탑 이야기와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바다 푸른 물에 잠겨 있는 왕릉을 지키고 있는 감은사지 석탑 이야기까지 끝없는 옛날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탑은 원래 중생들의 이야기를 담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조형물이며 부처님의 열반 이후 부처님의 사리를 여덟 나라에 나누어 탑을 세워 봉안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탑 또는 탑파의 산스크리트어 원어인 스투파(st?pa)는 墳陵, 塔墓, 歸宗, 大聚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로 미루어 탑은 고대 인도의 분묘 형식을 채용하고 거기에 기념비적 성격을 부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종교에서 발견할 수 없는 불교만의 조형물이며 부처님이 허락한 유일한 상징물이다. 그러므로 불탑이라는 종교적 상징물이 갖는 의미와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부처님의 열반과 그 종교적 의미, 그리고 그 사건을 추모하는 승단의 태도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 입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아난다여! 지금 이렇게 이 한 쌍의 사라 나무는 아직 제철도 아닌데 꽃이 피어 그 꽃잎이 여래의 온몸에 한들한들 흩날리며 내려와 여래를 공양하고 있다. 또 허공에서는 천상에서만 피는 만다라바 꽃이 여래의 온몸에 한들한들 흩날리며 내려와 여래를 공양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천상의 전단분향도 여래의 온몸에 한들한들 흩날리며 내려와 여래를 공양하고 있다. 게다가 또 천상의 악기가 허공에서 울려 퍼지면서 여래를 공양하고, 천상의 음악도 들려 여래를 공양하고 있다. 그러나 아난다여! 절대 이런 일만 여래를 경애, 존경, 숭배하며 공양하는 일이 아니다.
아난다여! 비구와 비구니, 재가신자, 여성재가신자가 진리와 그것에 따라 일어나는 것을 향해 올바르게 행동하며 진리에 수순하여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더 깊이 여래를 경애, 존경, 숭배하며 공양하는 것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아난다여! ‘우리들은 진리와 그것에 따라 일어나는 것을 향해 올바르게 행동하고 진리에 수순하며 행동하자’라고, 아난다여! 이렇게 배워야 한다.”

부처님은 자신이 승단을 지도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으며 열반에 임해서도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다. 출가자 각자는 자신의 수행을 위해 노력하였을 뿐, 당시 바라문 사제처럼 신에 대한 의식을 집전한다든가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런 행위는 계율에 의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불교는 교주를 신성시하여 숭배하거나 절대화한 종교가 아니라 교단의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하고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공동체였다.

교단의 권위는 신성에 의해 주어지거나 특수한 지위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수행의 결과로서 주어졌다. 따라서 설법을 부처님만 아니라 일정한 수행 과위에 오른 수행자도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을 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열반을 당하여 제자들은 부처님을 대신하는 어떤 권위적 체계를 만들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부처님의 장례는 여래를 깊이 숭앙하는 왕족이나 바라문, 자산가 등 재가신도에게 맡겨졌으며, 제자들은 출가 본래의 목적에 따라 바른 마음으로 노력하고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정진하도록 유촉 받았다.

그러므로 탑은 어떤 대상을 신성시하고 숭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주인공이 가졌던 정신적 고매함을 기억하고 그와 같은 청정한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건립된 조형물이다. 청정한 마음의 공덕으로 사후에 좋은 곳에서 태어날 수 있지만, 탑의 공덕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봄으로써 얻어진 청정한 마음에 있었다.

훗날 사리 분실의 위험 때문에 탑이 사원 안으로 옮겨지게 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기리고 그 분의 가르침을 새길 수 있도록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번화한 사거리에 세워졌다. 불교는 이처럼 열린 종교였다.

그러므로 귀의자들에게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탑은 단순한 분묘가 아니라 부처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부처님의 육신을 다비한 후 남는 사리는 부처님의 수행의 힘과 정신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부처님의 사리를 간직하고 있는 탑은 당연히 부처님을 대신한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생각은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 붓다고사의 시대에 이미 보편화된 것이었다.

아쇼카왕의 통치 아래서 인도 전역에 팔만사천 개의 탑이 세워졌다고 전설은 말하고 있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시대에 불탑이 사거리가 아닌 승원 안에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와 함께 재가자들 사이에 퍼져있던 불탑 신앙에 출가 비구도 동참하게 된다. 열반경은 출가비구가 탑을 숭배하는 것을 만류했지만, 불탑 신앙은 출가 비구의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는 탑과 금당의 배치 방식은 불탑 신앙이 확립된 이후에 나타난 형식인 것이다.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고대 인도의 복발 형태가 지금과 같은 탑 형태로 바뀌었는데, 그 때문에 복발 형태가 갖는 분묘 같은 느낌이 엷어지고 ‘부처님의 몸’이라는 상징성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또한 높아진 기단 부분과 상륜부에 남겨진 복발 형식 때문에 동아시아의 목탑은 스투파의 우주적 원이나 만다라라는 수평적인 조형성보다 누적적이고 상승적인 조형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그래서 더 신앙의 대상으로 적합한 것 같다.

우리나라 석탑은 다시 복잡하고 누적적인 다층 구조의 중국 목탑 형식을 단순화시켜 상승감과 안정감이 조화를 이루는 형태를 발견한다.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형식을 구현한 삼층석탑 양식은 그 조형미와 안정감 때문에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이 되었다.

한국 석탑은 장중하고 단순한 구조와 그 조형적 아름다움을 통하여 불신의 현존과 적멸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지혜로운 수행자의 구도의 열정만 아니라 부처의 몸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중생의 애환과 비원까지 다 담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문무대왕의 호국의 염원도, 아사달의 예술혼도 부처의 이름으로 그 속에 모두 녹아들어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절망을 미술사 연구로 극복하려 했던 한 미술사가에게는 탑은 또한 민족적 긍지의 결집체이자 자기 존재의 근거가 되었다. 1944년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짧은 생애를 마감한 고유섭의 비원은 탑과 더불어 다시 천년을 전해질 것이다.

영화를 자랑하던 황룡사 구층탑도 불타 없어지고 화려한 전각들도 사라졌지만, 석탑은 홀로 남아 영화로운 세월의 부산함도, 하염없이 오고간 사람들의 발길도 모두 거두어들인 채 오롯이 영겁의 시간을 지키고 서 있다. 탑은 그 많은 중생의 기원을 어디에 담고 있는 것일까? 텅 빈 폐사지를 쓸쓸히 지키고 있는 탑의 침묵으로부터 들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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