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7〉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현해 스님

현해 스님 / 동국학원 이사장 역임, 월정사 회주, 조계종 원로의원, 탄허 스님 손상좌
매일 자정부터 6시간씩 좌선
한암 스님 편애는 유명
요령 잡고 직접 의식 집전도
당신 책 절대 공짜로 안 줘

 

-탄허 스님이 영은사 수도원에서 3년간 계시다가 1962년 가을에 월정사로 돌아오셨는데, 탄허 스님은 그때에도 큰스님으로 대접을 받고 대강백으로 이름이 나지 않았습니까. 현해 스님은 그 시절에 탄허 스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가요?
저는 처음에는 탄허 스님에 대한 인식을 좋게 갖질 못했어요. 특히 난 입산 이전 시절인 속가 때에도 불만세력이었어요. 그래서 비판적인 눈으로 탄허 스님을 보니까 탄허 스님의 주위에 별의별 사람들이 붙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노스님(탄허) 주위에는 항상 협잡꾼, 사기꾼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우리 스님(희찬)을 모함하고 노스님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 같아서 노스님에게는 영 마음이 가질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탄허 스님을 가까이하지 않았어요.

-입산 초기 시절에는 좋은 인상을 갖지 않았군요?
그래요. 그런데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까 우리 스님(회찬 스님)이 서울로 날 찾아오셨어요. 그때 탄허 스님은 동국대 대학선원장을 하실 때인데, 우리 스님이 나에게 노스님 시봉을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에 시봉을 시작해서 딱 8일을 했는데, 그때에 나는 탄허 스님을 다시 보기 시작했어요.
탄허 스님은 밤 여덟아홉 시가 되면 바로 잠자리에 듭니다. 그렇게 노스님이 일찍 주무시는데 나도 같이 누울 수밖에. 그렇지만 탄허 스님은 밤 열두 시가 되면 딱 일어나셔서 좌정을 하시고 참선을 하십니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연탄불을 때고 있었는데 얼마나 추운지 몰라요. 탄허 스님은 이불을 뒤집어쓰시고는 그때부터 여섯 시까지 꼼짝을 않고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노장님이 그렇게 앉아 계시니까 나도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아 있었지요. 그런 생활이 8일 동안 계속이라, 변함이 없이.
대부분 노스님에 대해서 사람들은 강사다, 학자라고 말을 하지만 선사라고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생활하시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아, 세상 사람들이 노스님을 잘못 보고 있구나, 겉으로만 보고 실제 내면은 보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가졌어요. 요즈음 선방의 스님들도 두 시간 이상을 앉아 있지 못합니다. 두 시간 정도 앉았다가 포행을 하고 그러지요. 그런데 탄허 스님은 열두 시에 일어나서 여섯 시까지 좌정을 해요. 꼼짝 않고, 여섯 시간을 앉아 계시는 거예요.

-탄허 스님은 한암 스님의 법을 이은 법상좌입니다. 한암 스님은 탄허 스님을 어떻게 보았다고 볼 수 있나요?
탄허 스님은 한암 스님의 경학 전통, 강사의 맥을 이어받았지만, 본래는 탄허 스님이 입산하기 전에 한암 스님의 경을 이어받은 스님은 유점사 출신인 박동산 스님이라고 있었답니다. 그 스님이 한암 스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는데 유점사에서 강사로 데리고 가버렸어요. 그때에 한암 스님이 보시던 경 관련 책을 다 주어 버렸다고 해요. 당신이 사랑하던 제자인 동산 스님이 가버리니 얼마나 마음이 허전하겠습니까? 그러던 차에 탄허 스님이 한암 스님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무렵에 편지가 3년간이나 오고 가고 그래서 결국에는 상원사로 입산을 하니, 한암 스님께서는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해요. 입산 당시에도 탄허 스님의 한문 실력이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상원사에서는 선방에 들어오면 무조건 처음에는 3개월은 공양주를 시켰다고 그래요. 탄허 스님도 처음에는 공양주를 시켰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탄허 스님이 밥을 한 1주일을 하는데 밥에 돌이 나오는 거라, 돌밥이 된 것이지요. 그랬더니 한암 스님께서 “택성이 너는 글이나 읽어” 그랬대요. 다른 수좌보다 공양주 기간을 깎아준 것이지요. 이것은 탄허 스님이 범룡 스님에게 말하신 것이에요, 나는 범룡 스님에게 들었어요. 심지어는 탄허 스님 당신이 일부러 돌을 빼지 않고 집어넣었다고 그래요. 한암 스님도 탄허 스님은 유학자가 돼서 밥할 줄도 모른다고 하였다고 그래요. 울력을 할 때에도 탄허 스님은 안 나와도 한암 스님이 잔소리를 안 하고 묵인하시는데, 다른 수좌들은 꼭 나와서 울력을 하였답니다. 이런 것은 동화사에 계시던 범룡 스님이 나에게 말해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어이 나오라고 하시지만, 탄허 스님은 그러지를 않으셨다고 하시면서 한암 스님의 편애가 심해서, 그런 것을 보니까 범룡 스님도 섭섭하더라는 회고를 했어요. 평등성보살이라고 한암 스님을 모시던 보살도 나에게 한암 스님이 탄허 스님을 애지중지하셨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렇지 않겠어요? 탄허 스님은 스님이 될 때부터 한문은 좍 하고 나오니, 얼마나 시원하시겠습니까? 한암 스님이 유교, 불교의 경전을 많이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을 철저히 꿰고 있었어요. 또 탄허 스님은 어지간한 문장은 다 줄줄 외우고 있으니, 한암 스님이 반한 것이겠지요.

1972년 탄허 스님 환갑 기념 법회 후 찍은 기념사진 우에서 세번째가 현해 스님
-탄허 스님의 은사는 한암 스님이십니다. 탄허 스님은 한암 스님의 법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것을 어떤 측면에서 볼 수 있나요?
내가 탄허 스님에게서 놀라운 것을 본 일이 있어요. 우리들은 노스님을 유명한 학자, 강백, 선사라고 부르지만 탄허 스님이 의식을 하지 못하고 어두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노스님이 개운사 대원암에 들어가서 화엄경을 만들기 이전에, 이문동에 보문난야라는 곳에서 잠시 머물면서 작업을 하셨지요. 그래 개원식을 한다고 해서 나도 갔어요. 갔더니 개원법회를 하는데, 절에서는 그럴 때에 영가천도 제사를 지내기도 해요. 그날의 법회에는 우리 스님, 보경 스님도 오셨는데 이 스님들은 의식을 잘 하십니다. 그런데도 그날은 노스님(탄허) 당신이 직접 요령을 잡고 의식을 하셨어요. 당신 상좌들이 있었지만 직접 하신 것이지요. 난 지금도 의식을 하게 되면 책을 보고 해요. 왜냐하면 의식집에 있는 것을 다 외우지 못하니깐. 그러나 노스님은 책을 보지 않고서 그 자리에서 의식을 하시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어요. 그 음성이며, 요령을 흔드는 것이 그렇게 잘 하실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깜짝 놀랐지요. 역시 큰스님으로서 다 갖추고 있었구나 하는 점을 새삼 알게 되었지요. 한암 스님에게 법을 받을 만한 분은 다르구나 하는 점을 생각하였어요. 우리들이 노스님에 대해서 강사, 학자로만 생각하였기에 그렇지, 의식을 그렇게 잘 할 줄은 몰랐거든요. 한암 스님은 상원사에서 모든 스님들에게 의식을 가르치셨지요. 그것이 오대산 스님의 특징입니다. 한암 스님은 스님들에게 참선, 경, 의식, 염불, 가람수호 등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라고, 할 줄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셨거든요. 옛날 만공 스님의 계열에서는 경과 의식을 부정하였어요. 그러나 한암 스님은 선방을 열면서도 경과 율, 염불, 의식을 가르치셨는데 이런 것이 오대산의 특징이고, 바로 그것을 이어받은 분이 노스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현해 스님은 동국대를 마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학승이십니다. 혹시 탄허 스님으로부터 공부 잘하라는 칭찬을 듣거나 도움을 받지는 않았나요?
저는 노스님으로부터 공부하는 것에 대한 도움을 받은 것이 없어요. 탄허 스님은 화엄경을 주로 공부하셨고 난 법화경을 공부해서 그런지, 격려나 지원은 없었어요. 한 번은 노스님이 화엄경을 번역해서 책을 내셨는데, 마침 그때 내가 방학이라 귀국하여 있을 때라 대원암에 찾아가서 일본으로 간다고 인사를 하러 갔어요. 그런데 그날 탄허 스님이 여비를 하라고 5만 원을 주셨어요. 탄허 스님으로부터 한 번도 돈을 받은 일이 없었는데 그날은 여비를 주시길래 “고맙습니다” 하고 받았지요. 그리고 나서는 발간된 화엄경의 책값이 얼마냐고 하니깐 10만 원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갖고 있는 돈에서 5만 원을 꺼내고, 방금 전에 받은 5만 원을 합쳐서 봉투에 10만 원을 넣어서, “제가 사는 책값입니다” 하고는 “제 책은 우리 스님에게 맡겨 주세요” 하였어요. 탄허 스님, 그 분은 어찌 보면 냉정한 것이지요. 그 책은 10만 원이나 가지만 공부하는 손상좌에게는 그냥 줄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러나 탄허 스님은 화엄경 책을 절대로 한 권이라도 그냥 안 줍니다. 보통 스님들은 책을 내면 주위 사람들에게 그냥 나누어 주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탄허 스님은 책을 그냥 주면 책을 안 본다고 하시면서, 책의 가치를 알고 돈을 주고 사야 읽게 된다고 하셨어요. 이것은 내가 의문이 나서 그 후에 노스님에게 물어 보아서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나로서는 섭섭하기는 하였지요. 그리고 내가 일본에 가서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도 일체의 격려의 말씀이 없었어요. 일본에 가거나, 나오거나 할 때에 가서 인사를 드리면 그저 “잘 왔어, 언제 가” 정도의 말씀 이외에는 일체 말이 없었어요. 다만 일본에 계시는 난암 스님에게 화엄경 한 질을 갖다 주라고 하신 일이 있었지요.

-탄허 스님이 하신 수도원 교육에는 엘리트 교육의 성격이 나온다고 보입니다.
탄허 스님의 교육은 보통 교육이 아닙니다. 요새 전교조에서 쓰는 교육 용어로 말하면 평등교육이 아녜요. 엘리트 교육이지요. 노스님은 평소에도 그런 말씀을 했어요. 부처님 한 분이 태어나셔서 만 백성, 중생을 제도하지 않았냐고. 그래 노스님은 몇 사람만 제대로 가르쳐 놓으면 세상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봤어요. 이게 바로 엘리트 교육이지요. 그리고 그때에 스님 주위에는 머리 좋은 사람, 수재들이 많았어요. 스님은 둔한 사람을 싫어하셨어요. 내가 보기에는 노스님은 월정사와 영은사에서 수도원을 하시고, 그리고 다시 오대산으로 들어오셔서 강원을 열 때까지는 승가 중심적인 것이 있었어요. 그런데 1965년 이후에 동국대 대학선원장을 맡으시고 역경을 위해서 도회지로 나간 이후에는 대중 속으로 나오려는 것이 있었다고 봐요. 아마 그것은 도회지에 지식인, 엘리트가 많았고 그 무렵부터 엘리트 출신들이 노스님을 많이 따른 것과 연결되는 것이지요. 수도원을 하실 때 그때까지는 중심이 출가자 중심이었지만, 서울에 오시면서는 재가자 중심으로 옮기신 것으로 봅니다.

-10. 27 법난 당시 겪은 것을 회고하여 주십시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제가 알던 어떤 큰스님에게서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스님은 저에게 지금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그러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 지금이 불교정화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하면서 불교정화를 위한 일을 하고 있는데, 탄허 스님을 동국대 총장으로 모시고 자네가 비서실장으로 일을 하면서 올바른 인재양성을 해서 불교 재건의 길로 나가자고 그랬습니다. 그때 저는 그 스님에게 “지금 이 전화는 스님의 뜻이 아니지요, 스님 지금 감금되어 있지요” 하니깐 그것을 어떻게 아냐고 하면서 말이 우물우물 해요. 그래서 저는 그 스님에게 저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고려말의 불교가 부패해서 무학대사가 이성계와 결합하여, 권력을 이용해서 불교혁신을 하였지만 그 결과가 어땠냐고 물었습니다. 결국은 훼불로 가지 않았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리 불교가 부패해도 종교 내부에서 스스로 혁신을 해야지, 권력을 업고 하게 되면 바람직하지 않게 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가담할 수 없으니, 스님도 거기에서 손을 떼세요” 하였습니다. 그러니깐 그 스님은 “자네 말이 맞아, 알았어” 그랬어요. 그 후에 들어 보니 그 스님이 앰버서더 호텔 10층에 감금되었다고 하고, 그 스님은 제 말을 듣고는 얼마 후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그랬습니다. 저는 불교정화는 종단, 불교 내부에서 자생적, 자율적으로 해야 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하는 정화는 결국 실패합니다. 권력은 불교가 이용 가치가 없으면 바로 차버리거든요. 역사적으로 권력을 이용해서 성공한 정화는 거의 없어요. 다만 아쇼카왕이 행한 것이 유일한 사례이지요. 이것도 아쇼카왕이 불자이었고, 아쇼카왕을 도와준 선지식인 목칼리풋타팃사라는 스님이 있어서 가능하였던 것이지요.

-현해 스님은 탄허 스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난 노스님의 위상, 성격을 요새 용어로 말하면 대종사(大宗師)라고 보지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갖춘 분이었지요. 노스님은 모든 것을 갖춘 어른이었어요. 한암 스님에게서 모든 것을 이어서 받은 큰스님이시지요. 다만 탄허 스님은 유불선을 종합하고 회통한 사상가였기에, 어떤 면에서 보면 선도(仙道)에서는 한 발자욱을 더 나가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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