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세계의 맛을 보고 체험을 해 보세요

 (지난 호에 이어서)
그래서 오신통에서 벗어나서, 그 통에서 벗어나서 그거를 굴릴 줄 아는 누진이 돼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저 조금 보이기만 했다, 좀 들리기만 했다, 좀 이랬다고 하면 이건 장땡이다, 내가 오신통을 한다, 뭘 한다, 이 짓들을 하거든요. 이거는 잘못하면 마구니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에게 해를 입힙니다. 그러니까 사기를 치는 사람도 그렇고 사기를 당하는 사람도 그렇고 다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라고 하는데, 정신이 있으니까 바로 정심이 있죠. 또 자성신이라고 하고 자성불이라고 합니다. 불이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입니다. 이 세상만사 생명 없는 게 없는 것을 외국에서는 바로 블랙홀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불바퀴라고 합니다. 그거는 평등공법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수레공법이라는 것은 법입니다. 돌아가는 그것을, 작용하는 법을 말합니다. 활궁법이라고 하는 것이 평등법입니다. 또 법이라는 자체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내고 돌아가는 걸 말하죠. 중심 없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법을 바로 도권법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 모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우리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고 하는데 자기한테 자기가 귀의하는 거예요. 그런데 한 얼굴에 듣는 거 따로 있고 보는 거 따로 있고 맛을 아는 거 따로 있습니까? 이름은 귀다, 눈이다, 입이다, 코다, 다 따로 있지마는 한 얼굴에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갑니다. 가서 싸우는 것을 보면 누가 잘못하고 잘하는지 판단이 아주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그렇듯이 자꾸 이름을 찾고 구하려고 하지 말고 그 이름 속의 뜻을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 무조건 몸속에 있는 수십억 마리의 의식을 한데 합쳐서 한마음으로 다스려야죠. 한마음으로 뭉쳐서 그걸 중심으로 세운 게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주인공을 믿지 않는다고 해 봐야 여러분이 여러분을 믿지 않는 건데 그걸 누구한테다 한가를 합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주인을 안 믿는데 어떡합니까? 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인연 없는 중생은 어찌할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온 거죠. 그러니까 타의에서 구하는 것은 절대로 금하는 겁니다.
외국에도 가 보니까, 지금 미국에서도 대학가에서 교수들이 정신계를 얼마나 집요하게 추구하는지 모릅니다. 과학 따로 생활 따로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는 거를 알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종교를 제가끔들 가지고 내 종교니 네 종교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걸 비유해서 그랬어요. “케네디 대통령 묘지에 가니까 항상, 자나깨나 불봉에 불이 일어나더라. 그건 무엇을 상징하려고 해 놨느냐. 우리 생명의 근본은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다. 그냥 불바퀴다. 그냥….” 그런데 이 지구라는 독 속에서 내 종교 네 종교 하고 찾는다면, 즉 말하자면 진드기들이 이건 내 집 이건 네 집, 이런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습니까. 알고 보면 우리도 지구에 붙어서 사는 진드기나 한가지예요.
그러면서도 내가 제일이라고 그러는데, 내가 제일이라는 데서 고만 한마음이 되지 않는 거죠. 좀 마음을 죽이고 ‘내가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나?’ 잘못하는 사람을 본다면 ‘저거는 꼭 저렇게 잘못하고…. 저건 나쁜 놈이야.’ 이러지 마세요. 사람이 고정되게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좋은 일도 합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이게 자꾸 바꿔집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먹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모두가 고정된 게 없어요. 그러니까 꼬집어서 저놈 나쁘다 할 필요가 없다 이 소립니다. 그저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그런 뜻을 가져야만이 무주상 보시가 되고 공덕이 되죠. 물질을 줘도 못 먹는 걸 줘서는 아니 되죠. 못 먹는 것은 씻어서 우리가 먹더라도 먹을 수 있는 거를 남을 줘야죠. 뒤에 대가를 받으려고 하지 말고 조건 없이 모두 보시를 한다면 그게 공덕입니다. 그게 무주상이고요.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말합니다. 천도재를 하더라도 부모를 원망하면서 ‘왜 우리 조상이 우리 집안을 이렇게 만들어 놨나.’ 하는 생각이 있으면 아예 천도재를 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평상시에도 부모는 자식을 무조건 사랑한다고 그랬죠? 그저 자식들 잘되게 하는 것이 나한테 복이다 하고요. 그런데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잘못되게 하겠습니까? 만약에 부모가 몰라서, 잘되는 것인 줄 알고 구덩이로 끌고 가는 것은 있을 수 있을지언정….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부모가 자식들하고 한번 살아 보겠다고 끌고 가다 보니까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거는 몰라서 그런 거지 자식을 일부러 구덩이에다 빠뜨리려고 해서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도 자비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부탁하는 것은 가정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조상의 탓을 하지 말고 누구 원망도 하지 말고 ‘내가 없었더라면 이 모든 부딪침이 없었을 텐데, 내가 없었더라면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었을 텐데 내가 있으니까 바로 상대가 있었던 거 아닌가.’ 하고 내 탓으로 돌리라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모든 거를 내 탓으로 돌리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그 상대방의 마음에도 환하게 불이 들어와서 내 의견대로 따라 주게 돼 있어요. 내 한마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놓고, 자식이나 부모가 아팠을 때도 ‘주인공, 당신만이 우리 어머니 우리 동생 뭐, 누구든 낫게 할 수 있어. 당신만이 낫게 할 수 있어.’ 이렇게 한다면 그게 가설이 돼 있으니 불이 들어올 거 아닙니까? 벌써 이 줄과 줄이,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져야 불이 들어오고 에너지가 나오죠? 그렇게 무심의 줄이 거기까지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한생각을 그렇게 할 때 그쪽도 불이 들어와요. 그래서 나을 수 있어요. 정히 따라 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야죠. 따라 주면 더욱 좋고요.

모두가 이 귀한 도리를 모르고 교리를 좇아서 가거나 학설로 가거나, 이게 옳다는 둥 이게 정법이라는 둥 이게 사법이라는 둥 이렇게 논란을 하게 되면 선(禪)에서는 아예 팔만 사천 리로 멀어집니다. 여러분이 몸이 있고 이런 인연이 있을 때, 이 배낭을 짊어지고 한 철 날 때 정신 바짝 차리고 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몸을 벗고 죽었을 때 내 몸뚱이가 그대로 있는 줄 알고 집안으로 돌아다니거나, 그 뜻을 모르고 보질 못하고 듣지 못하고 의식만 있으니까 모든 게 부자연하죠. 그렇기 때문에 짐승이 잠자리를 하는데도 짐승인지도 모르고, 또는 새가 그래도 모르고 그 속에 들어가는 거죠. 그렇게 해서 모습을 가지고 나오면 그 행동을 해야지 어쩔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천방지축이죠. 귀머거리 장님이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듯 하면서 다시 탄생이 될 때에 그 모습을 가지고 나온다면 또다시 인간 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가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 하죠? 또 기독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그러죠? 이것이 다, 살아생전에 내 몸이 공했다는 이 도리를 몰랐으니까 죽어서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강을 건너가야 할 텐데 물에 빠져 죽을까 봐 못 건너가는 겁니다. 그러니 백 년이고 오백 년이고 배 올 때를 기다리고 서성거리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타 죽을까 봐 불바퀴를 넘지 못하고요. 그리고 내 몸 안의 업식이 잔뜩 나와서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니까 또 그것도 넘어설 수 없고요.

자기 맛을 자기가 모르면 항상 가난합니다.
떠다 놓은 물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썩어요.
그러나 마음 골짜기에서 나오는 샘물이라면
항상 퍼 써도 줄지 않고
또 갖다 부어도 늘어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항상 새 맛이 나고요.
우리가 이러한 도리를 알자고 공부하는 거지
말이나 배우고 이론이나 배우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부처님께서는 네 여자로 비유를 해서 설법을 하셨습니다. 근근득생 내외가 살다가 어떻게 어떻게 먹고 살 만하니까 첩을 턱 얻었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는 아마 잘 아실 겁니다. 아시더라도 한 번 더 들어 보세요. 첩을 얻어 가지고 아주 죽자사자 하더니 또 둘째 첩을 털컥 얻었지 뭡니까. 또 죽자사자 하더니만 또 셋째 첩을 얻어 가지고도 그렇게 죽자사자 하더니 어느 날 죽어 버린 겁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셋째 첩은 남편이 죽어서 나가는데도 방문 안에서 나가 보지도 않는 겁니다. 둘째 첩은 대문 안에서 나가 보지도 않고요. 첫째 첩은 그냥 동구 바깥에서 인사하고는 그만인 겁니다. 그런데 큰마누라는 산소에까지 쫓아가서 울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셋째 첩은 금은보화를 말합니다. 금은보화가 바깥에 나가는 것 봤습니까? 둘째 첩은 큰 집을 말하는 겁니다. 집이 대문 바깥에까지 나가서 인사합니까? 첫째 첩은 자식이나 부부나 친구들이나 이런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은 동구 바깥에까지 나가서 배웅하고 돌아설 뿐이죠. 그리고 큰마누라는 업식이란 말입니다. 항상 습에 의해서 돌아가는 우리의 업식 말입니다. 이거는 그저 잘하든 못하든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니 그 업식을 벗어나야 될 텐데 그게 쫓아다니니 어떡합니까. 내가 잘되려고 ‘뭘 좀 해 볼까?’ 하고 어떻게 시작을 하면 아, 요게 핀트가 맞질 않아요. 모두 잘못돼 돌아가고 있을 때가 많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업식이 쫓아다니기 때문입니다. 눈이 밝지 못하고 귀가 뜨이지 못하고 이러는 것도 업식이 가로막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업식을 벗어나야 허공을 훨훨 날고, 그냥 만공에 꽃이 필 텐데 말입니다. ‘내가 이놈의 집 아니면 못 사나.’ 그러고선 이혼을 하고 다른 데로 가 봤던들 그 업식이 또 그림자처럼 쫓아오죠. 먼저 가 있어요. 하하하…. 사람보다 먼저 가 있단 말입니다, 벌써. 그러니 바로 나한테, 모든 것이 각자 자기로부터 있는 거지요. 자기 마음의 차원과 업식의 문제거든요. 그런 것이니 딴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딴 사람들에게 해롭게 마음을 쓰거나 이렇게 하지 마세요.

언젠가 한번 얘기했지만…, 여긴 도인들만 계셔서 질문을 안 하시니까 어쩔 수 없이 한마디만 더 하고 끝내겠습니다. 하하하…. 어느 집에 남편이 술만 먹고 들어오기만 하면 그냥 마누라를 복 패듯 패는 겁니다. 아무거로나 닥치는 대로 때리고 부수는 겁니다. 예전에는 뭐, 이혼을 한다 이런 것도 없고 ‘그 집 귀신이 돼야 된다.’ 이런 것밖에는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애 셋 넷을 낳도록 그렇게 살아나가는데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오셨더랍니다.
그 스님을 붙들고 사연을 얘기했습니다. 밥 한 그릇을 시주하면서 “우리 남편이 이러니 제가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몸에 먹물을 갈아 부은 듯이 멍이 들고 인제는 도저히 배겨낼 수가 없습니다.” 하고 붙들고 우니까 스님이 “여보시오, 당신은 예전에 마부였고 당신 남편은 바로 당나귀였소. 그래서 그 당나귀를 끄는데 얼마나 모질게 때렸는지 너무너무 그 당나귀가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아주 애원해서 당신 남편으로 태어났소.”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얇은 돗자리를 쫘악 말아서 매 가지고 손쉽게 그걸 들고 때리게끔, 그 돗자리 올의 숫자대로 수효가 많으니까 그냥 그걸 붙들고 때리게끔 찾기 쉬운 데 놔두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그 업이 다 무너질 테니까 그렇게 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다른 건 다 치우고 그것만 놔두었는데 이 사람이 들어오더니만 뭐 다짜고짜 그걸 잡고는 그냥 복 패듯 하는 겁니다. 그러니 한 번만 때려도 벌써 그 오락지가 몇 개입니까? 그 돗자리 올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때리는 데 천 대요.’ 하는 겁니다. 한 번 때리면 천 대가 없어져요. 그래서 한 번 때리는 데 천 대씩 면하고는 한 사나흘 그렇게 때리더니 나중에는 들어오더니만 “당신을 내가 왜 그렇게 때렸지?” 이러더랍니다. “당신을 왜 그렇게 때렸지? 나도 몰라. 내가 미쳤나 봐.” 이러면서 그날부터 “아유, 이거 인제 보니까 당신 몸이 성한 데가 하나도 없구먼.” 이러면서 나가더니 약을 지어다가 달여서 주고 이렇게 다복하게 살더랍니다.

그러니 내가 한 일은 내가 꼭 받게 돼 있습니다. 천당 지옥을 딴 데 가서 찾지 마세요. 내가 여기 이 세상에서 살면서 천당 지옥을 바로 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고, 또는 생산처도 있고 멸하는 죽음의 터도 있습니다. 다 이 자리에서지 딴 데서 나오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마음을 잘 쓰셔서 가정을 다복하게 이룩하는 것도, 인연에 따라서 발전시키는 것도, 창조력을 기르는 것도,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도 다 부처님 법입니다. 죽어서 천당에 가라고 그렇게 가르친 게 아닙니다. 현실에서 발전하면서 인연에 따라 돌아가는 그 공한 도리를 알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한테 나쁜 일은 씌우지 말고 조금 야속하더라도 참고, 참는 게 아니라 거기다 맡겨 놓고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서 해결하라.’ 하고 맡겨 놓고서 그저 좋은 말로 부드럽게 해 주면 그쪽에서 반성을 하고 다시 감사함을 느끼고 나한테 회개를 하고 들어온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이 부처님 법이라는 것이 무슨 글자로 배우는 것도 아니요 학술로 배우는 것도 아니요 또 학식으로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생활에서 터득하고 나가는 자체입니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어서 허공을 날 수도 있고 지구를 벗어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좀더 넓게 생각하셔서 좀 지혜롭게 사신다면 그게 보살행이고, 그게 때로는 부처님이 됐다가 때로는 보살도 됐다가, 때로는 약사도 됐다가 지신도 됐다가 용신도 됐다가, 전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할 것은, 부모들이 돌아가시면 위패를 해서 모두 갖다가 묶어 놓는데, 산 사람을 그렇게 묶어 놓으면 좋겠습니까? 네? 혼백이 있다면 좀 활보하게 놔둬야지 그렇게 묶어 놓는 게 좋겠습니까? 제사 지낼 때 위패를 해서 놓고 끝나면 소해 드려야지요. 형체가 없으면 혼백이 와서 붙질 않습니다. 그래서 위패를 해 놓는 겁니다. 그런데 위패에 이름 석 자를 써서 딱 붙여 놓고 부착을 시켜 놓곤 옴짝을 못하게 하는데 그게 자식의 도리입니까. 부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또 여러분이 인등을 켠다고 하는데, 그저 등잔 요만하게 해 놓고 꼬리표를 붙여 놓곤 거기다가, 지금은 초도 안 켜고 기름도 안 켜고 전기로 켜요. 그래, 이름을 써서 거기다 놓고선 백 일 인등을 켠다는 둥 뭐 그러는데, 인등이라고 한다면 마음의 인등, 마음의 불을 말하는 겁니다. 마음의 불, 마음의 불씨 말입니다. 아니, 백일기도 드릴 때만 지구가 돌아가고 백일기도가 다 끝나면 아예 그냥 멈춰 버리나요, 네? 세상이 멈춰 버려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마음의 불씨를 켜고 있기 때문에, 본래 켜고 있기 때문에 꺼졌다 켜졌다 이런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다 이러는 겁니다. 자나 깨나 마음의 불씨가 항상 밝아 있으니 그걸 인등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식의 걱정을 항상 하죠? 그렇기 때문에 거기다 믿고 맡겨 놓고 그런다면 항상 불이 밝아져요. 광명세계가 와요. 그러니까 그 광명세계를 맛을 보고 체험을 하고 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이런 것도 있죠. 자기 맛을 자기가 모르면 항상 가난합니다. 떠다 놓은 물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썩어요. 그러나 마음 골짜기에서 나오는 샘물이라면 항상 퍼 써도 줄지 않고 또 갖다 부어도 늘어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항상 새 맛이 나고요. 우리가 이러한 도리를 알자고 공부하는 거지 말이나 배우고 이론이나 배우고 이러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부모의 은혜를 갚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유, 나를 낳아서 이날까지 길러서 이렇게 성장시켜서 살게 해 주셨으니 감사하구나. 부모가 받든 안 받든 자식의 도리로 부모를 위해서 해 드려야지. 또 그 도리를 몰라서 부모가 업식으로 인해 떠돈다면 안 되니까 우리가 지극한 마음으로 천도를 해 드려야지.’ 하고 내 성의껏 해 드린다면 모르지만 ‘부모 조상으로 인해서 우리가 잘못되니까 천도를 해야겠다. 부모 조상 탓이다.’ 이렇게 한다면 아예 그것은 하지도 말아야지요.
여러분, 오늘은 이것으로써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공부라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대로 해 나가야 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침에 염송을 하고 절을 하고 온통 경을 달달달달 외우고, 반야심경을 외우고 금강경을 외우고 이러지마는 어림도 없어요. 어림도 없죠. 달마 대사가 양 무제더러 한 소리를 들어 보세요, 어림이나 있나. 역대 조사들이 말씀하신 거를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어림이나 있나. 오히려 그런 것은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겁니다. 우리 아까 뜻으로 푼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독송했지만 그게 다 설법입니다.

여기 테이프도 있으니까 마음이 산란할 때는 테이프를 틀어 놓고 가만히 들어 보세요. 어떤 때는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듣기 싫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땐 듣지 마시고요. 그리고 다달이 설법한 걸 책으로 묶어 놓은 게 있어요. 그것을 하루 한 장씩이라도 보시면서, 다 보면 또 되풀이해서 보시면서 자기 것을 만드세요. 그 글자가 자기를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그 뜻이 자기를 자꾸자꾸 지혜롭게 만드는 거죠. 그리고 물리가 터지게 해 주는 거지요. 그럼으로써 진실한, 바로 자기 아닌 자기를 구하는 소식이 당도한다 이 소립니다. 여러 부처님들, 그럼 이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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