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관음과 선재동자

관음의 응신 중 하나 수월관음
온화함의 위엄으로 중생제도
그 앞에서 우린 선재가 된다

화엄경 표현한 불화 수월관음도
고려인은 온 우주가 자비라 생각
나를 관음의 자비로 채워내야

▲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에는 수월관음 이외에도 이를 예경하고 있는 선재동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어머니처럼, 공기처럼 우리 곁에있는 보살의 자비는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선재동자로 만든다.
“나에게 있는 관세음보살은 밤낮 의연(依然)하신 관세음보살입니다. 잘난 이에게는 어떨는지, 아는 것 많은 이에게는 어떨는지, 나에게는 관세음보살님이 편안하고 좋은 구제(救濟)의 님이심을 믿습니다. 경론(經論)에서 선록(禪錄)에서 사부(四部)에서 백가(百家)에서 보고 듣고 헤매는 것을 관세음께 다 맡겼습니다. 아니 어느 틈에 맡아 가셨습니다. 불평과 희망과 삼독과 팔난이 남보다 치성하다고 하겠지마는 모든 풍파를 관세음의 회향 중에서 겪으매 불안 그대로가 평안(平安)입니다.”
 -최남선 〈묘음관세음〉 중에서

앞선 연재에서 우리는 사천왕이 어떻게 불법을 보호하고 세상을 구원하는지 보았다. 사천왕은 그 외에도 사람들이 죽음에 임했을 때 그들이 생전에 지은 업을 낱낱이 조사하여 제석천왕에게 보고하는 일도 한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중생의 업을 기록하여 선업을 지은 자는 좋은 과보를, 악업을 지은 자는 나쁜 과보를 받게 한다. 그래서 사천왕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이렇듯 사천왕은 악을 징벌하는 심판자로서 세상을 구원한다.

그러나 불이문을 지나서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면, 우리는 모든 시비와 호오, 선악이 사라진 적정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이 세계에 머무는 존재들 또한 대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보살피고 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들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달려갈 것이며,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해 연화대를 마련하여 마중하려 갈 것이다. 그들의 자비는 한이 없어서 천하의 악당도, 불법을 모르는 일천제도 구원해주신다. 아무리 험난한 삶의 행로라도 그들에게 의지한다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관음 화현의 한 모습, 수월관음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까? 〈법화경〉 보문품에 따르면,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은 뱃사공의 모습, 여인의 모습, 어린아이의 모습 등 서른세 가지 변화된 모습으로 세상 어느 곳에든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제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세음보살은 앉은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세상을 구원하고 있다.

고려불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그 모습을 선보이는 수월관음이 바로 적정처 한 가운데에서 온 세상을 구제하는 존재이다. 이 수월관음은 〈법화경〉 보문품에 나오는 응신이 아니라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만난 선지식 중 한 분이다.

수월관음이 계신 곳은 남인도 해안가 험준한 바위산 보타락가산, 스승을 찾아 남으로 구도의 길을 떠난 선재는 관세음보살을 뵙고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그곳을 향한다. 거친 바다를 건너고 험준한 암벽을 올라 골짜기 깊은 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미묘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본다.

거기 시냇물 굽이쳐 흐르고 나무가 울창한 곳, 아미타불을 모신 보관을 높이 쓰고 향기로운 풀 위에 반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든 수월보살이 있다. 암굴 속의 관음은 어깨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화려하고 섬세한 옷과 온갖 보석으로 장식하고 온 몸은 빛으로 감싸여 있다. 두 그루 푸른 대나무 사이로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는 꿈에서 깨어난 듯 선재를 응시한다. 관음의 시선이 향하는 맞은 편 물가에 선재동자는 발을 쫑긋 세우고 합창하며 수월관음을 우러러보고 있다.

이 그림은 보살과 존재 자체의 만남이라는 가장 인간적이고 내면적인 순간을 형상화하고 있다. 대각선 구도 속에서 화면을 가득 채운 압도적인 보살에 비하여 선재동자는 왜소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관음의 거대함은 서양미학에서 ‘숭고’라고 부르는,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을 가져다주기보다, 부드럽고 온화함에서 흘러나오는 위엄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선재의 눈으로 관음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거대한 관음 앞에서 선재처럼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

관음은 어떻게 우리를 제도하는가?
격랑이 부는 바다는 우리를 의지할 바 없는 어린아이로 만든다. 삶의 고통은 우리가 어떤 지위에 있든,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관계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를 직면하게 만든다. 고통 앞에서 우리는 삶의 진실을 만나게 되며, 그래서 어린아이가 된다.

그런데 고통 외에 우리를 순수한 존재 그 자체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또 없을까? 우리를 순수한 어린아이로 돌아가게 하는 것 말이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 앞에서 어린아이가 된다. 어머니의 사랑 앞에는 그 어떤 외양이나 속임수도 필요치 않다. 어머니의 사랑에 의해 우리 모두 어린아이가 되듯이 수월관음의 자비 앞에서 우리는 모두 선재동자가 된다. 관음의 자비가 우리를 어린아이로 만든다.

그러므로 선재동자는 존재 자체의 순수성으로 돌아간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를 선재동자로 만드는 힘은 위압적이고 초월적인 힘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공기처럼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자비의 힘이다. 그 자비는 약하고 미미한 존재의 것이 아니라 모든 능력을 갖춘 가장 강한 자의 자비이기에, 그것은 우리를 어리광만 피우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가장 순수하고 가장 깊은 내면에서 본 어린아이로 돌아가게 한다.

수월관음은 그렇게 선재동자를 내려다본다. 그는 마치 공기처럼 부드럽고 가볍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선정에 잠기어 모든 현실적인 것들을 벗어나 꿈꾸는 듯 선재동자를 내려다본다. 선재동자를 향하여 몸을 구부리고 있으나 그의 눈동자는 선재동자를 주시하지 않는다. 그저 내면을 바라보면서 선재동자를 향하고 있을 뿐이다.

고려인에게 자비는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 항상 거기 있는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관음의 화려한 보관과 섬세한 옷매무새, 포동포동한 손과 발, 부드러운 자태, 편안하고 한가롭게 앉아있는 자세, 모든 것이 자비를 형상화하고 있다. 화려한 보배로 장식한 그것조차 겉치장의 화려함이 아니라 오로지 순수한 아름다움으로서 형상화되어 있다.

보배구슬을 한 관음은 그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으로 선재동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을 것이다. 관음은 그저 고요히 앉아 있지만, 선재동자는 관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 쫑긋이 발꿈치를 들고 보살을 향해 두 손 모으고 있다.

하늘과 바다, 바위를 배경으로 한 관음은 화려한 궁전과 나무, 수많은 보살과 부처들로 장엄한 극락세계의 아미타여래보다 더 인간적이고 친밀하며 내면적인 순간을 반영한다. 그것은 어떤 인위적인 대상도 없이 자연 속에서 그저 존재 자체와의 만남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정병과 용, 또는 보주 등 몇 개의 상징물이 있기는 하지만, 관음이 머물고 있는 자연은 어떤 인문적 세계도 벗어난 존재 그 자체의 순수한 현현을 보여준다.

관음보살은 어디에나 있다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나 지장보살과 시왕의 지옥에는 인간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좋음과 싫음, 죄와 벌, 기쁨과 고통 등등. 그래서 그것은 극락이건 지옥이건 세계 내 존재들의 삶과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관음이 자리 잡은 바다로 둘러싸인 보타락가산, 구름과 암벽 사이에 앉아 있는 관음은 그런 인간적인 의미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는 존재 자체의 본래적인 모습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지옥조차도 이곳에서는 한낱 미미한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지옥세계가 묘사되어 있지만 그 세계는 인간을 위압하거나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고 오직 관음의 자비에 비하여 그것이 얼마나 미미한지 보여줄 뿐이다. 지옥조차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지 못한다. 관음의 자비가 지옥조차 두렵지 않게 느낄 정도로, 관음은 공기처럼 세계를 감싸고 있다. 사천왕이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악한 자를 물리쳤다면, 수월관음은 두려움 없는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게 하는 한없는 자비로 세상을 구원한다.

자비로 감싸진 세계, 고려인들은 이렇게 온 우주가 자비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몽고의 침입을 부처님의 자비로 해결하겠다고 전란의 와중에 팔만장경을 판각하였던 그들은 어떻게 보면 어리석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 고통과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 속에서도 오로지 부처님을 믿을 수 있었기에.

과연 나는 얼마만큼 어린아이로 살고 있는가? 관음의 자비가 온 우주에 가득 찼다고 믿고 있는가? 나는 자비를 얼마나 채우고 있는가? 선재동자의 눈에 비친 관세음보살은 산보다 크고 거대하지만, 그는 조용히 우리를 내려다 볼 뿐이다. 우리는 거룩한 그의 자비 속에서 그저 어린아이가 될 뿐이다. 그 순수한 내맡김 속에서 선재동자와 수월관음이 하나가 되고 자력과 타력이 하나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보살도의 실천자가 된다.

나를 관음으로 채울 수 있다면, 그대에게 곧 법문이 있을지니 묻지 않아도 물은 것이고 대답하지 않아도 대답을 얻은 셈이다.
보살은 파도 소리와 같이 깊고 미묘한 음성으로 선재동자에게 말한다.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자비 해탈문을 성취하였다. 선남자여, 나는 이 보살의 자비행문으로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교화하는 일을 끊임없이 할 것이다. 선남자여, 나는 이 자비행문에 머물며 모든 여래가 계시는 곳에 항상 있으면서 일체 중생들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때로 보시로 중생들을 거두기도 하고…. 선남자여, 나는 이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어 영원히 물러나지 않게 하노라.”

보타락가산에 계신 관자재보살로부터 선재동자는 넓고도 큰 세계의 모든 중생 앞에 몸을 나타낼 수 있는 대자비법문광명의 행을 배우고,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여 일체지에 머무르며,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따르는 회향을 배우게 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