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초의에게 중국 주향 등 보내

격의 없었던 두 사람의 통유

 

▲ 〈주상운타첩〉 추사친필본

 추사가 연경에서 옹방강을 만나 학연을 맺은 후, 그의 학문적 개안은 일취월장되었고, 완원이나 조강, 주학년, 이정원,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 등으로 교유가 확대된다.

이러한 추사의 외연의 확대는 그의 제자들뿐 만 아니라 초의와 대둔사 승려들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주학년이나 옹수곤 등 청대의 학자들이 초의와 대둔사 승려들과의 교유를 맺게 된 계기는 추사를 통해서이다.

특히 고증학에 밝았던 옹수곤은 대둔사의 역사적 사료, 즉 비문과 서적 등에 관심을 보여, 이러한 사료를 아암의 문도인 수룡과 기어를 통해 얻은 후, 감사하는 글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대둔사 승려들의 청대 문인들과의 교유 사례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대략 1834년이나 1838년경에 쓴 것으로 짐작되는 추사의 편지는 청대 문인들의 문적이 그를 통해 초의에게 전해진 사례를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그대가 이처럼 머물러 있는데도 한번 볼 수 있는 인연이 없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서운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마침 중국인에게 얻은 예서 한 폭과 또 향 한 봉을 정공(정중한 예물)으로 보냅니다. 모름지기 (제가) 병중에 매달려 있는 괴로움을 이해하시고 받아주시오. 경상도 행차는 반드시 계획하심이 어떨지요. 남평에 비견할 바는 아닙니다만 모두 그 기대가 너무도 간절하니 결코 저버릴 수는 없을 겁니다. 백파 노스님도 아직 학림암에 계신가요.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좋게 한번 웃읍시다. 간신히 적습니다. 이만 (甁錫之如是留淹而無緣一見 令人最?陷處 適得中國人隸字一幅 又炷香一封爲作淨供 玆以奉送 須領此病裏懸懸之苦 嶺行必圖之如何 非南平之可以比擬 具 其企望甚切 決不可孤耳 白老亦在鶴林耶 咸則非別人也 好覺一笑 艱草不式)

 

〈여초의〉12신과 〈주상운타첩〉에도 수록된 이 편지는 초의가 학림암에 있을 때 쓴 것이라 여겨진다. “백파노스님이 아직 학림암에 계신가”라고 한 추사의 언구는 이 편지가 〈완당전집〉〈여초의〉 11신과 비슷한 시기에 보낸 것임을 나타낸다.

추사가 거듭하여 백파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한 점이 눈에 띠는데, 이는 당시 초의가 학림암에서 백파에게 선리의 입각처를 훈습 받고 있었음을 드러낸 셈. 이러한 정황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추사는 거듭하여 초의에게 행장을 꾸려 귀사(歸寺)할 것을 재촉한다. 추사의 주장은 초의의 선이 부처님에게서 연원된 것이고, 대둔사에서 근원된 것이 아니냐는 것. 그가 학림암에 있던 초의를 만나지 못한 정황은 자세하지 않았다.

다만 병중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라는 내용으로 보아 그가 병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국인에게 얻은 예서 한 폭과 향을 예품으로 초의에게 보낸다. 이는 청대 문인의 진적이 추사를 통해 초의에게 전해진 정황을 드러낸 셈이다.

초의의 소장 유물 중에 옹방강이 사경한 〈원각경〉이 유전된 것도 추사를 통해 그에게 전해진 것은 아닐까. 아울러 주향(炷香) 한 봉을 정중한 예물로 보낸다는 것이 눈에 띤다. 주향은 태우는 향. 청에 유행되었던 전단향을 구해 초의에게 보낸 것인지. 아니면 귀한 침향을 정공으로 보낸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평소 그가 염주를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친불교 유학자로, 불교 이론에 밝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향을 피워 주변을 정화하고, 차를 통해 몸과 마음을 순화했던 삶의 궤적은 흔한 일이다. 특히 추사는 유마거사를 좋아했으며, 무변(無邊)의 통쾌한 삶을 살았던 소동파를 흠모했다는 점에서 그의 성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추사가 초의에게 주향을 정공으로 받친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이들의 통유(通遊)는 격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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