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지성콘서트 - 우리 시대의 철학자 강신주 씨 ‘인문학적 삶이란 무엇인가’

강신주 씨는 … 연세대에 입학한 공학도 였다. 전공을 살려 관련회사에 입사한 후 자신이 꿈꾸던 삶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 서울대서 철학과 석사·연세대서 철학과 박사학위를 받은 후 〈상처받지 않을 권리> 〈철학이 필요한 시간> 〈김수영을 위하여> 등을 집필했고, 신문 기고 활동과 강연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꿈 위해 자기 목소리 갖자
주인공 될 때 긍정의 눈 열려

철학자로 인문사회 오피니언으로 활동하는 강신주 씨. 강 씨는 3월 13일 동국대가 개최한 인문교양강좌인 지성콘서트에서 인문학적 삶에 대해 강연했다. 강신주 선생은 이 날 강연에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단순한 성공의 삶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을 강조한 그의 강연으로 들어가보자.

여러분 시(時) 좋아하세요?

오늘 이 강좌는 교양강좌로 듣는 분들이 대부분 1학년생 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시를 좋아하지 않네요. 그것은 아마 시를 산문 읽듯 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고 산문은 논리적인 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를 산문처럼 대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감정을 논리적으로 다루고 있는 건 아닐까요?

감정은 절대적이며 단순하고 거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합리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삶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감정에 맞춰 살며 합리성을 그것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감정은 복잡한 것, 변덕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번뇌로 인한 고민이 감정을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상대방이 상처받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느낀 그대로 행동했을 때 잃게 되는 것들을. 그리고는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곤 합니다. 이런 과정이 되풀이 되면 습관이 되고 감정은 죽어버립니다.

죽은 감정 살려야 지성 솟아나

감정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기계와 같습니다. 인간이 기계, 컴퓨터와 다른 점은 우리 인간은 감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감정은 소중한 것입니다.

합리주의를 가장한 냉소주의야 말로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지 알면서 외면하는 것. 그저 그렇게 수긍하며 사는 삶이 죽어있는 삶인 것입니다.

(앞 쪽의 여학생을 지목하며) 학생이 만약 회사에 취직했어요. 연봉은 7000만원 수준이고요. 그런데 상사가 엉덩이를 만지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에요?

(여학생이 대답을 못하자)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데도 손 하나 어찌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가부장적 관습, 자본주의 병폐 등이 무엇인지 알면서 외면하는 것. ‘아, 어떻게 해도 사회는 변하지 않아’이러며 순응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 모습입니다.

(앞쪽의 다른 학생을 지목하며) 학생은 동국대에 입학해서 많은 교수님들을 만났을텐데 그 분들이 월급쟁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존경할 만한 스승이라고 생각합니까?

(월급쟁이 같다는 답이 나오자) 그럼 왜 학교에 다녀야 합니까?

(모르겠다는 대답이 나오자) 여러분은 이미 사회에 길들여 닳고 닳은 것입니다. ‘학교라는 것이 그렇지, 선생님과 교수님들이 그렇지 뭐’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1학년 대학생이지, 4학년 고등학생이 아닙니다. 스스로 왜 학교에 다녀야 하는지, 존경하지도 않는 이 교수님 밑에서 내가 왜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또 다른 학생에게) 존경하지 않는 선배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요 안해야 하나요? 그 선배를 선배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닙니까?

(체육교육과 출신인 학생이 선배에게는 무조건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선배가 나중에 승부조작을 하자고 하면 해야 합니까. 거부해야 합니까.

(그 학생이 대답하지 못하자) 선배나 스승을 떠나 자신 만의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게 아무 생각 없이 배우면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선생님이 가르치는데로, 수업방식이 이어지는데로 그대로 지낸다면 무엇이 나올까요.

모든 위대한 사람은 당대에 욕을 바가지로 먹었습니다. 베토벤은 당시 음악이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고 하여 듣지도 못하게 하는 형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했습니다. 이것이 옳다고 생각되면 거침없이 밀고 나갔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보는 책들은 책과 교재로 나뉩니다. 책은 스스로 읽도록 유도합니다. 교재는 스스로를 멀리하도록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대와 같은 명문대에 진학한 아이들 중에 스스로 생각하고 끌려 책으로서 공부한 이들이 몇이나 될까요. 교재로서 책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해야 하는 것이기에 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을 되돌아 보십시오. 대학에 책을 읽으러 왔는지, 교재를 보러 왔는지를. 여기서 더 나가면 대학생활 이후의 삶은 꿈을 위한 것인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인지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3월 13일 동국대 지성콘서트는 젊은 학생들의 꿈과 이상에 대한 대화 형식으로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화엄경>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각자가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여러분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30가지를 리스트로 작성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1년이 지나 연말에 이를 정리하고 매년 쌓아 30년이 지난 뒤 이 리스트를 보면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학위, 학교는 옷에 불과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소설과 음악을 자주 보고 들어야 자신이 성장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계속 억누르다 보면 풍선 터지듯 언젠가 가장 약한 부분이 터지게 됩니다.

죽은 감정을 살리는 것에서 모든 것은 출발합니다. 저는 17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이면에는 저를 흥분시키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감정 없이 어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이뤄낼 수 있을까요.

시체처럼 살지 않고 살아 숨쉬어야 합니다. 새로운 기회가 왔을때 자신의 신념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자아는 비겁하다’고 했습니다. 합리성을 빙자한 이성은 감정을 억누릅니다. 〈화엄경〉에서는 이런 이성과 감정에 대해 설합니다.

화엄은 들판에 잡다하게 피어있는 수많은 꽃들의 장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자기만의 가능성과 삶을 긍정하며 만개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불교에서의 자비 역시 자기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연민과 다름이 아닙니다.

여러분, 향이 옅다고 나쁜 꽃이 아니고, 색이 탁하다고 무가치한 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향취와 자태를 지닌 주인공입니다.

지금 여기 모인 여러분 개개인이 주인공인 것입니다.

개나리의 자태와 향취를 지닌 여러분이 장비꽃이 가치가 있다고 하여 꽃잎을 붉게 물들이고 장미처럼 보이려 한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입니까.

자신의 잠재성을 부정하고 성장한다는 것. 혹은 자신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애절한 일입니까. 20살 이전까지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타자가 바라보는 모습이 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부정해 왔습니까.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타인과 세상마저도 긍정하는 눈이 열립니다.

마지막으로 〈임제어록〉에 나오는 귀절을 소개하며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그대들이 불법에 부합되는 견해를 얻으려 한다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혹되서는 안된다.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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