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를 보려면 진실되게 믿고 진실되게 구해야

 

▲ 그림 최주현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에 앉게 돼서 기쁩니다. 한편으로는 여기에 자주 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좀 안됐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자주 만나 뵈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것은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학술적으로 배우는 것도 아니고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도 아니고 지식으로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나왔다면 모든 것은 자기로부터 있는 것입니다. 자기로부터 세상이 벌어졌고 자기로부터 상대성 원리가 생긴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조사들은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라.” 했습니다. 우리는 정신계 50%와 물질계 50%가 상응하면서 작용을 해야만이 100% 인간의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계 50%에 의해 관습이 생기고 그 습성에 끄달려서 ‘꼭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하는 고집이 생기고, 거기에 그만 자기가 자기를 창살 없는 감옥에다 넣고 한 발도 떼어 놓지 못하게 묶어 놓는 그런 마음들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 마음 속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우주의 삼천대천세계의 근본이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우리 마음의 근본에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살림살이가,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이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모두가 인연에 따라서 가설이 돼 있습니다. 가설이 돼 있어서 그걸 가지고 공생·공용·공체·공식화 하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에 가설이 돼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생각하고 마음먹고 행하고 말하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우주간 법계에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모두 두루 알고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주간 법계라는 얘길 했습니다. 자신이 어질러 놓은 거, 자신이 저지른 거, 자신이 잘하고 간 것들이 전부 과거로부터 현실로 나오는 거니까요.
그럼 과거가 따로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죠. 과거라는 것이 어저께도 과거요, 아까도 과거요, 일 초 전도 과거입니다. 그런데 과거라면 우리가 나기 이전을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나기 이전에 살던 그 자체가 스스로 입력이 돼서 우주간 법계에서 모두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숙명통, 즉 컴퓨터에 입력이 돼 있듯이 그렇게 입력이 돼 있어요. 그래서 현실에 자꾸 나오는 겁니다. 그건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하죠. 천차만별로 자꾸 나오니까 말입니다. 자기가 한 것대로 산 것대로 행동한 것대로 말한 것대로, 모든 것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나오니까 내가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입력이 돼서 나오는 데다 입력을 다시 해라.’ 이겁니다. 잘 들으셔야 됩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땅에 엎드러지면 땅을 짚고 일어나지요? 딴 데 짚고 일어날 수가 없죠. 이열치열이란 말이 있듯이 ‘나한테서 나오는 것은 나한테서 해결을 해야 한다.’ 하는 건 정신계에서 벌어진 것은 정신계에서 해결을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무심의 도리가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현실로 나오는 모든 것을 거기 맡겨 놔라. 천차만별의 생활을, 들이고 내는 거를 거기다가 맡겨 놔라. 내 한마음 주인공에다 맡겨 놔라.’ 이러는 겁니다.
‘한마음 주인공이라는 건 뭐 말라빠져 죽은 건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한번 얘기해 볼까요? 내가 부모에게 몸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혼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있어요. 그것에다 과거에 자기가 산 것대로 입력된 그 업식이 잔뜩 인연이 돼서 거기에 포함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현실에 몸 하나를 받아 가지고 인간으로 출현되죠. 출현이 되면 거기에 모습과 생명, 의식들이 수십억이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이 아니에요. 어떤 것을 여러분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고, 어떤 거 말했을 때 내가 말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수십억의 생명들이 있고 의식들이 있고 모습들이 있는데 어떻게 나라고만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한마음이라고 그랬습니다, 한마음!
그런데 그 의식들은 자기가 산 것대로, 한 것대로만 생각을 하고 나오지 변동이 없어요. 이 속의 중생들은 잘되고 잘못되는 거를 도무지 몰라요. 인간의 마음이 다스려야만 되는 겁니다. 인간은 99%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 내가 행동을 잘하면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가고, 또 누가 되게 하는 일이라면 다스려서 거기 놔라 이겁니다. 다스려서 맡겨 놔라. 그렇게 다스리는 그 마음이 한생각을 낼 때에 ‘도둑질을 한다.’ 하고 생각을 하면 도둑질하는 대로 몰아 줍니다, 이 마음들이 말입니다. 또 내가 ‘좋은, 선의적인 일을 해야지.’ 한다면 그냥 그대로 또 따라 줍니다. 그러니까 악법 선법이 다 한마음 속에 있다 이겁니다. 마음속에 있는데 여러분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바로 지옥도 있고 천당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현실도 너무 많이 찰나에 화해서 돌아가니까 공했다. 그래서 무(無)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자세히 한 번 더 말씀을 해 드린다면, 가정에서도 여러분 이름이 많죠? 아버지라는 이름도 있고 아들이라는 이름도 있고 사위라는 이름도 있고 남편이라는 이름도 있고, 이름이 좀 많습니까? 생각들 해 보세요. 형이다 아우다 뭐 별 이름이 다 있죠. 그런데 남편이 됐을 때 나라고 할까요, 자식이 됐을 때 나라고 할까요, 또 아빠가 됐을 때 나라고 할까요? 나라고 할 수 없는 게 부처예요. ‘내가 했다’ ‘나다’ 이렇게 할 수 없는 도리가 바로 이 세상 진리인 것입니다. 이 세상만사가 다 그렇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기 마음으로 이름을 지어 놓았습니다. 동방에는 아촉이라고 지어 놓고, 서방에는 아미타라고 지어 놓고, 이 세상 사바세계에는 관세음이라고 지어 놓고, 지천국에는 지장이라고 지어 놨던 겁니다. 이름입니다. 여러분을 아빠다, 아들이다, 남편이다 하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름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용신이라고도 했고 지신이라고도 했고 또 신중이라고도 했고 사왕천이라고도 했고 약사라고도 했고 뭐, 좀처럼 해서는 그 이름을 다 부르지도 못합니다. 한마음에서 모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자체는 부처님이지마는 왼쪽에는 문수 바른쪽에는 보현, 이렇게 삼불을 해 놓은 것은 바로 여러분이나 똑같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있으면 법이 있고 또 움죽거림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문수는 한생각을 내는, 바로 법을 말합니다. 그리고 한생각을 내면 움죽거립니다. 움죽거리는 걸 보현이라고 그랬습니다, 화신. 그러니 그 셋이 모습은 따로따로 있을지언정 어찌 마음이야 둘, 셋이겠느냐 이겁니다.

여러분이 배낭을 짊어진 채 한 철 사는 건데
뭐가 그렇게 응어리가 지고
뭐가 그렇게 억하심정이 있고
그 가슴에 멍이 들고 그럽니까.
그런 걸 다 푸시고
한마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맡겨 놓으세요.

그리고 모두들 참선, 좌선 이렇게 말들을 하는데 이걸 똑바로 아셔야 됩니다. 생활을 떠나서는 참선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 법도 없습니다. 이것을 잘 들으셔야 됩니다. 앉으나 서나 생활이 그냥 참선이기 때문에 행선 와선 입선 좌선을 한데 합쳐서 참선이라고 그런 겁니다. 앉아도 여러분이 앉은 것이고 선 것도 여러분이 선 것이고, 눕는 것도 여러분이 눕는 것이고, 똥 누는 것도 여러분이 똥 누고 먹는 것도 여러분이 먹고, 자는 것도 여러분이 자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아니라면 부처는 없죠. 아니, 부처만 없는 게 아니라 세상도 없고 가정도 없고 형제도 없고 부모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변소에 들어가도 내가 거기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겁니다.
또 이런 게 있죠. 참선이라고 그러는 것은 이론과 학설로 되는 게 아닙니다. 염불 잘하고 또 교리를 잘 알아서 말을 체계 있게 잘하는 것만이 참선이 아닙니다. 내가 살면서 실험하고 체험하면서 자꾸 느끼면서 가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마음을 찾고 발견해서 발전시키고 창조력을 기르고 생활이 과학인 줄 알고 그대로 가는 것이, 그것이 참선입니다. 이 세상에 어린애를 임신해서 낳는 것도 바로 과학입니다. 모를 심어서 쌀을 만드는 것도 과학입니다. 그 쌀로 밥을 지어 놓는 것도 과학입니다. 어느 것 하나 과학 아닌 게 없습니다. ‘어느 것은 과학이고 어느 것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물리가 터지려면 이런 것도 좀 알아 두셔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일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왜 스님네들이 허허벌판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그 비를 맞으면서 풀섶에 그냥 앉아 있기도 하고, 물이 흘러 내려가는 데 앉아 있기도 하고, 천둥 번개가 치고 그러는 데 앉아 있기도 하고, 높은 산골짜기에 앉아 있기도 하는 줄 아십니까?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감사한 줄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오늘 아침에도 쇳송을 했지만 ‘오종대은(五種大恩)을 알라. 오종대은을, 대은을 알라. 일체제불과 더불어 일체 생명 전체에 감사할 줄 알라.’ 이 소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도 내지 않고 지금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도 감사한 줄 알아야 됩니다. 지수화풍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줄 알고 이 세상 풀 한 포기도, 곤충 하나도 감사히 생각할 수 있어야만 된다 이겁니다.
그건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쫓고 쫓기면서 먹히고 먹으면서 이 세상을 거듭거듭 걸어 나와서 진화돼서 제일 나중에 인간이 됐다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부모만 내 부모요 어느 자식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거듭거듭 거치면서 짐승의 부모도 됐다가 짐승의 자식도 됐다가, 곤충의 부모도 됐다가 곤충의 자식도 됐다가, 또 딴 부모의 자식이 됐다가 딴 자식의 부모가 되고, 거듭거듭 구름이 한데 모였다가 흩어지고 또 딴 구름하고 또 모이고 또 흩어지고 또 모이고 이렇게 하는 것과 우리 인생살이가 다 같습니다. 그러니 남의 부모는 남의 부모고 내 부모만 내 부모라고 할 수 없는 그 도리가 바로 진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오종대은을 아는 사람은, 모두가 둘이 아닌 줄을 아는 사람은 보살의 행을 할 수가 있다, 모든 데에 착을 두지 않고 사랑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또 이런 게 있죠. 부모가 자식을 조건 없이 사랑하지 조건을 붙이고 사랑합니까? 자식을 생각할 때 조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게 바로 부처님의 자비란 말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 그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은 이기적이기도 하고 조건이 있고 이익이 있어야 주고, 모두 이렇게 삽니다. 이게 어떻게 보시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게 무주상 보시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게 어떻게 무심 도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조건 없이 이익을 줄 수 있는 자비심을 내라 이겁니다. 한 가정에서도 자식이 아무리 잘못된다 할지라도, 또 남편이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부인이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주인공!’ 하고 주인공을 부르고서 거기다가 맡겨 놓고 부드럽게 말하고 부드러운 행동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해 주면 그쪽에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게 없더라도 조건 없는 자비를 줄 수 있는 그런 마음, 행동, 말이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전구는 달라도 전력은 다 똑같으니까 바로 공을 치면 공이 튀어오르듯, 내 마음의 스위치를 올리면 그쪽에도 불이 들어오게 됩니다. 가설이 돼 있지 않습니까? 부모다 자식이다 이렇게 가설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무심 도리의 그 줄은 가는 사이도 없고 오는 사이도 없이 그쪽에도 불이 들어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이 밝아지면, 자식이라는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그 쪽에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가정을 융합시키고 화합하게 하고 다복하게 하고 사십시오. 돈이 달아나가게 하지 말고 나를 쫓아오게 하는 그런 여러분이 되셨으면 합니다.
돈이고 저런 흙이고 돌이고 생명 없는 것이 하나도 없고 돌아가지 않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법상을 두드리시며) 이것도 지금 돌아가지 않는 게 아닙니다. 다 돌아가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두를 가지고 그게 끊어질까 봐 붙들고 얽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것이 옳다고 하면서 타의에서 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가 진실되지 못합니다. 진실되게 믿으면서 진실되게 구한다면 진실된 나를, 참나를 구하는 소식을 그때서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봐서 다 아시겠지만 피나는 노력이 아니라면 어떠한 경험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기술도 그렇고 모든 게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이 뛰어넘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생활에서 행하는 게 그대로 참선이라고 하는데도 그것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누구를 믿습니까? 허공을 믿습니까, 이름을 믿습니까, 형상을 믿습니까, 스님들의 고깃덩어리를 믿습니까? 말해 보세요. 모든 거를 잘 살펴봐서 세 가지가 다 충분해야만 따르라고 했습니다. 믿는 건 자기를 믿는 겁니다. 자기, 즉 수십억 마리를 사람 마음으로 다스려서 한마음으로 묶어 세운다면 그게 바로 주장자입니다. 그리고 중심입니다. 중심이면서도 찰나찰나에 돌아가니까 공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저런 풀잎 하나도 감사하고 저 흘러 내려가는 물도 감사한 겁니다. 물이 여러분한테 아마 그렇게 말할 겁니다. ‘아이구, 나같이만 살면 아무 일 없을 텐데….’ 하하하…. ‘나는 어떤 게 막혀도 그냥 이렇게 돌아서 내려가니까 아무 지장이 없는데, 막히면 그냥 뚫고 나가려고 애쓰니까 막히는 거지.’ 하고 흉을 봅니다. 흙은 흙대로 자기처럼 살라고 합니다. 아무리 파 재끼고 아무리 마구잡이로 해도 이렇다 저렇다, 왜 파느냐, 아프다 어떻다는 말 한 마디 없어요. 뭐, 뒤집건 메꾸건 짓밟건 말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개나 고양이나 풀 이파리나 꽃이나 나무나 물이나, 어떠한 거든지 둘 아니게 통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귀신이라고 그러죠? 귀신이라고 그러지 말고 그냥 혼백이라고 해도 좋고 영령들이라고 해도 좋아요. 모지락스럽게 귀신이라고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어요, 우리도 귀신이니까요.
그래서 모든 것이 나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습니다. 바로 그렇게 둘로 보지 않는다면 서로 말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해요. 개가 서로 반갑다고 그러는 게 우리에게는 싸우는 거같이 보이겠죠? 그건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부부가 들에 나가면 서로 장난하고 그러는 거와 똑같은 겁니다. 서로 사랑하는 소리인데도 다른 사람이 볼 땐 싸우는 걸로 봅니다.
모두를 나같이 알고, 즉 여러분같이 알고 감사히 생각하라. 그 은혜를 생각하라. 국왕의 은혜도 알아야 하고 국민의 은혜도 알아야 하고, 부모의 은혜도 알아야 하고 형제의 은혜도 알아야 하고, 사장(師長)의 은혜도 알아야 하고 모든 은혜를 알아야 하는데, 더불어 같이 살기 때문입니다. 혼자 살 수는 없죠. 혼자 산다면 옷도 입지 말아야 하고 먹을 것도 먹지 말아야 하고 뭐, 땅도 딛지 말아야 하고 이러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우주 만유를 창조해 나가는 인연의 필연적인 법칙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제 그만 말할까요? 여러분이 질문하시길 바랍니다. 질문이라는 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살다가 의문 나는 것을 말씀하시라 이겁니다. 부처님 법이라는 게 높은 것도 아니고 아주 얕은 것도 아니고, 우리 평상시에 사는 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모두 도를 통했습니까? 하하하…. 질문하실 분들 없어요?
우리는 마음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떠나서는 말입니다. 모두가, 천문학도 지리학도 의학도 과학도 마음 떠나서는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식들이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구하려면 진실해야 하고 너 아닌 너와 네가 항상 자문자답하면서, 잘못된 거면 다스리면서 나가야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항상 그냥 자나깨나 끊어지지 않는 겁니다, 본래. 본래 끊어지는 게 어딨습니까? 자도 자는 게 아니요 깨도 깨는 게 아니요 그대로 움죽거리는 겁니다. 아니, 자다가는 움죽거리지 않습니까? 몸뚱이는 재워 놓고 자기가 나가서 온통 돌아다니고 이 야단들을 하는데 어떻게 움죽거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배낭을 짊어진 채 한 철 사는 건데 뭐가 그렇게 응어리가 지고 뭐가 그렇게 억하심정이 있고 애틋하고 그 가슴에 멍이 들고 그럽니까. 그런 걸 다 푸시고 모든 거를 거기다 맡겨 놓으십시오.
여기 와서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오신통이라는 자체가 이런 겁니다. 과거로부터 어떻게 왔나를 아는 것이 숙명통입니다. 또 심안으로 보는 것이 천안통입니다. 또 가고 옴이 없이 듣고 무전통신 하는 것이 바로 천이통입니다. 또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을 신족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의 마음을 아는 것이 바로 타심통입니다. 아무리 이 다섯 가지를 다 안다 하더라도 그건 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왠 줄 아십니까? 알고 보고 듣고 아무리 가고 오고 한다 하더라도 내가 (물컵을 들어 보이시며) 이 물컵을 남한테 줘서 먹일 수 있고 내가 먹을 수도 있어야만이 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고 먹지 못하는 거, 무슨 소용 있습니까? 듣고 보고 먹지 못하는 거, 무슨 소용 있습니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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