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유배시 추사와 초의의 교유를 살필 수 있는 〈벽해타운첩〉.
완도의 이진포에서 아쉬운 이별을 고했던 추사, 제주도에 도착한 지 백 여일이 지난 후 초의의 편지에 답신을 보낸다. 뭍과 섬, 제주도는 지금처럼 가까운 땅이 아니다. 거친 풍랑을 이긴 후에야 도달할 수 있는 지역이며, 세상의 풍문이 단절된 땅이었다. 초의가 보낸 편지에 “마음이 위로되고 가슴이 후련해졌다”는 추사였다. 간난의 처지에서도 막힘없는 원융의 경지를 넘나들던 추사의 달변을 응대할 상대는 초의였다. 〈완당전집〉 〈여초의〉 15신에는 이들의 무애의 경계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선두(船頭)에서 깊이 생각해 보니 모르겠습니다만 해인의 빛남도 이와 같은 경지가 있는 것인지요. 진실로 터럭이 거대한 바다를 삼키고, 개자 씨가 수미산을 받아들여 막힘없는 원융으로 녹인다는 것을 그대는 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주도에 들어온 후 이미 백일이 지났습니다. 소식을 듣기에 불리하여 세상의 소문들이 마침내 여기엔 막히고 끊어졌는데, 홀연히 여기 멀리까지 그대가 편지를 보내 주어, 실로 수행이 정길(淨吉)하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흐뭇하고, 가슴이 트이는 듯합니다. 저는 요즘 입을 벌리면 먹고, 눈을 감으면 잡니다. 그대의 삶도 이것을 벗어남이 있는가요. 그대는 자비로서 의당 마음이 쓰이겠지만 지나치게 염려할 것은 아닙니다. 허 소치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아 무척 기다려집니다. 봄이 지난 후 (제주도에 온다는)기약한 것이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또 허 소치에게 “고인과해도(高人過海圖)”를 그리게 한 것은 곧 법문의 중요한 공안입니다. 섣달도 다 지나 가는데, 오직 길상여의하시길 빕니다. 이만 줄입니다. 누륵충 경자(1840) 년 12월26일

두 가지 장을 모두 받았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생강 꾸러미 속에 능이버섯을 넣었다고 하는데 없어져 버렸습니다. 먼 길이라 편지가 잘못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여분의 향적(香積: 좋은 음식)을 봄이 지난 후에도 얻어 다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지난 해 금강에 있을 때, 그대와 철선스님이 다 함께 굳게(작은 거울을 나누어 주고 받으며) 약속했는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봄이 지난 후 모두 찾아서 철선에게 보내는 것이 어떨지요.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船頭分別 未知海印發光 亦有如是一境歟 固當以毛呑巨海 芥納須彌 無?圓融而銷之 師又謂何 入海以後 已近百日 風信不利 世諦上聲聞影響 遂此阻斷 忽此禪遠存? 悉團蒲淨吉亦足慰開 累狀開口卽喫 閉眼卽眠 師之活計 亦有外是者耶 以師慈悲 宜其注存 亦無庸過慮耳 許痴之至今不歸 不勝勞勞 春後之期預爲翹企 且令許痴作一高人過海圖 卽法門一重公案也 臘尾將收 唯冀吉羊如意不宣 累? 庚子 臘月 卄六日

二醬具領多謝 熊耳之入於薑包者 化爲烏有 遠塗魚雁之致訛 有如是耳 如有香積之餘 春後可得 更爲帶來耶 往年在琴江時 師與鐵禪 俱有小銅鏡分贈之約而遂無聞 春後?覓 於鐵禪 帶來如何 帶來如何

 

〈벽해타운첩〉에도 함께 수록된 이 편지는 경자(1840) 12월 26일에 쓴 것이다. 실제 추사는 월 일만 기록했다. 친필본 추사의 편지에 세필(細筆)로 쓴 “경자(庚子)”는 초의의 글씨이고, 하단의 “如有香積之餘~帶來如何”부분과 년 월일은 〈〈완당전집〉〉〈여초의〉15신에는 결락되었다. 따라서 〈벽해타운첩〉은 제주도 유배 시기 추사와 초의의 구체적인 교유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추사가 소치에게 “고인과해도(高人過海圖)”를 그리게 했는데 이것을 불교의 공안으로 삼았다는 점이 눈에 띤다. 고인(高人)이 바다를 건너는 그림인 고인과해도(高人過海圖)는 실제 바다를 건너 제주도로 향하는 초의를 그리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망망한 바다, 풍랑을 자유롭게 건널 수 있는 선각자인 신선을 그린 것인가. 아마도 추사 자신을 그리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초의는 대둔사의 진미(珍味)인 능이버섯과 장류를 제주로 챙겨 보냈다. 추사가 향적을 보내라는 거듭된 재촉은 지기(知己)에게나 통하는 정감어린 희언(戱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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