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 탄신 100주년 증언-무비 스님

무비 스님 / 조계종 승가대학원장, 교육원장 역임 범어사 주석, ‘염화실’ 카페 운영하며 전법
노자·장자 백번 이상 읽고
필요한 공부는 그 자리서 외워
사부대중 차별없이 인재 양성
국가와 민족·정치에 관심

 

-스님은 해인강원을 마치고 선방에 다니면서, 큰스님들을 많이 친견하였는데 혹시 그 때 탄허 스님에 대해 들은 것은 없었나요?
탄허 스님에 대해서는 범룡 스님에게서 들었어요. 저는 범룡 스님과 참으로 인연이 많아요. 저는 범룡 스님을 존경해서 동림산 태안사에서 모시고 살았고, 화엄사 구층암에서도 모시고 산 적이 있어요. 구층암에서는 〈화엄합론〉을 갖고 잠깐 공부한 적이 있어요. 적명스님, 정광스님과 함께 했지요. 그럴 때에 탄허 스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범룡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였는데, 그때 탄허 스님과 같이 있었답니다. 범룡 스님은 나중에 한암 스님이 현토한 〈화엄합론〉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공부를 하셨는데, 그 책을 복사해서 스님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랬어요. 그 판 그대로도 하고, 축소해서도 하였지요. 범룡스님의 말씀으로는 한암 스님이 탄허 스님의 한문 실력과 글재주를 그렇게 아끼셨대요. 그래서 탄허 스님은 울력도 빼주었다고 했어요. 상원사에서 〈화엄경〉을 볼 적에는 탄허 스님이 석사를 하시면 한암 스님이 간간이 뜻을 설명해 주었대요.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를 자기처럼 잘하는 사람이나, 자기보다 더 잘하는 것을 제일 사랑스럽게 보죠. 공부를 잘하는 것이 제일 귀엽죠. 범룡 스님은 한암 스님을 그렇게 존경했어요. 평소에 나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이라도 한암 스님이 계신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한암 스님의 회상으로 달려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그랬어요. 범룡 스님은 저에게 이런 말씀을 했어요. “나는 밥 한 번만 먹고 싶다, 잠 한 번만 자고 싶다, 화두를 한 번만 들고 싶다”고요. 식사를 하루에 한 번만 하고 더 이상 먹지 않고, 잠도 한 번만 자면 더 이상 졸지 않고 싶다, 화두를 하루에 수백 번 놓치면 다시 들고 하는데 한 번만 들면 순일무잡하게 죽 나가고 싶다고 그랬어요. 이런 것이 한암 스님의 영향이에요. 나는 범룡 스님의 이 말이 그렇게 감명 깊을 수가 없어요.

서울 안암동 대원암에 주석하실때의 탄허 스님.
-스님은 1967년 용주사에 세워진 동국역경원의 역경사로 선발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공부하면서 탄허 스님에게 배웠죠?
맞아요. 제가 거기로 가게 된 것은 1966년 겨울에 동아일보에 역경사를 뽑는다는 공고가 난 것을 보고 그리 한 것이지요. 거기에 응모한 것은 법정 스님의 권유도 작용했어요. 제가 해인사에 있을 적에 제 옆방이 법정 스님의 방이었어요.
탄허 스님은 역장장(譯場長)이면서 늘 강의를 하셨어요. 탄허 스님은 장자를 하시고, 운허 스님은 능엄경을 하시고, 이기영은 범어를 하고, 이진영은 논어를 하고, 법정 스님은 문법을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배웠는데 운허 스님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리포트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것은 그런대로 했어요. 그렇지만 우리들을 번역할 사람으로 뽑은 건데, 우리의 원전 실력이 너무 약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원전을 보는 실력을 높이는 것이 제일 급선무라고 보시고, 강의를 올스톱하고는 연수생이 제각기 제일 좋아하는 것을 갖고 독송을 하도록 했어요. 그것을 3개월 시켰어요. 나는 맹자를 하고, 월은 스님은 능엄경을 했지요. 나는 맹자를 3천 독을 하면 좋다는 말을 듣고, 맹자를 죽자 사자 밥도 안 먹고, 집중적으로 읽었어요. 강원에 있을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했어요.

-용주사 시절, 탄허 스님에 대한 회고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거기에서 운허 스님이 능엄경 강의를 하면, 탄허 스님이 그 강의에 제일 먼저 들어와서는 앞자리에 앉아요. 그래서 강의를 듣지요. 나는 스님의 그런 자세가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내가 탄허 스님에게 “스님은 능엄경을 모르세요? 왜 강의를 듣습니까?” 하였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무슨 그런 소리를 해” 하시면서, “운허 스님의 강의는 전통적인 강원의 해석법과는 영 다르다, 들을 만해”라고 하셨어요. 탄허 스님은 선지에 의한 해석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한암 스님의 회상에서 체득한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독자적인 해석법이지요. 이렇게 스님의 학구열은 대단해요. 그런 열의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때에 스님은 화엄경 번역을 계속 하실 때였어요. 그래서 늘 원고를 가지고 다니고 그랬어요. 어떤 때에는 그 원고를 나에게 보여주시고, 의견을 묻기도 했어요. 나는 그때에 구체적으로 답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내 식으로의 의견 을 말하기도 했어요.

-대원암 시절의 추억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때 스님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스님, 재가자, 유명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렇게 사람들이 오면 스님은 몇 마디만 간단하게 하시고 그 다음부터는 눈을 감고, 하늘을 쳐다보고 아무 말씀을 안 해요. 그러면 사람들이나, 주위에 있던 우리들이 얼마나 멋쩍고 난처해요. 스님은 묻지 않으면 답을 안 하십니다. 그리고 그때에 직지사의 법안 스님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그래서 법안 스님이 출국하기 전날, 초당이라는 신도집에서 환송회를 열었어요. 그래서 스님을 제가 모시고 갔습니다. 그 집은 가정집 치고는 아주 컸는데, 공양도 거하게 차렸어요. 공양을 마치고 나서 초당이 참석한 관응 스님에게 “큰스님에 대해서 들으니 유식을 잘 하신다고 그러시는데 오늘 한 시간 안에 유식을 설명할 수 있나요. 오늘 이 자리에서 해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관응 스님이 “유식은 8년을 해야 하지만, 한 시간 안에 그렇게 할 수가 있다”면서 “그러면 혹시 칠판이 있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그 신도가 어떻게 준비를 하였는지, 칠판을 착 내왔어요. 그러자 관응 스님이 분필 하나 들고, 칠판 가득하게 적으면서 설명을 하였어요. 탄허 스님도 그것을 들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 글이 탄허 스님이 못 본 글이었어요. 그러자 탄허 스님은 내용이 좋다고 하면서, 그것을 다 적었어요. 그러고 나서 그 이튿날 대원암에서 당장 그것을 외워 버려요. 그렇게 당신 공부를 치밀하게 하셨어요. 스님은 노자 장자 전부를 백 독 이상을 하였다고 해요. 스님은 옛 성인들의 말씀은 무조건 백 번 이상을 읽어서 외워 버려요. 그렇게 공부하는 자세가 좋은 점입니다. 저는 큰스님들을 모시면 큰스님들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큰스님들의 범위에서 안 벗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지켜 보았지요. 나는 어려서 그것을 보고는 탄복했지요.

-월정사에서의 추억이 강렬하지요.
그때 스님은 본격적인 화엄경 강의를 들어가기 전에 유불선 삼교에 대한 개론을 서론 격으로 미리 7일간 강의했어요. 그것이 진수입니다. 그 강의가 명 강의입니다. 그 강의를 정리해서 책으로 내면 좋을 것입니다. 그때에 눈이 많이 와서 관조스님, 그리고 비구니들하고 눈싸움을 하던 것, 도반들하고 상원사까지 걸어서 가던 것이 기억납니다. 참 좋았죠.

-탄허 스님 강의의 특징은 어떻게 말할 수 있나요?
탄허 스님은 책을 안 들고 모든 것을 외워서 하십니다. 그러면서 분필 하나만 들고 강의를 하시는데 스님은 천하에 어떤 놈이라도 와서 물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만만하게 하셨어요. 분필 하나만 들면, 한두 달은 할 수가 있다고 하셨어요. 스님은 경전이나 좋은 글귀는 무조건 외워버려요. 스님은 강의하실 때 책을 보고 강의하신 적이 없어요. 타고난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유불도 삼교에 대해서는 기막히게 통합하셨지요.

-강백으로 날리던 관응 스님과의 비사는 없을까요?
스님은 강의하실 적에 관응 스님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탄허 스님은 관응 스님과 매우 친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약간은 라이벌이었습니다. 관응 스님도 장자(莊子)에 깊었고, 탄허 스님도 장자 등 노장(老莊)에 깊었습니다. 3대 강백의 한 분인 운허스님은 탄허 스님보다 연배가 높고, 아주 점잖았어요. 그러나 관응 스님과는 나이가 비슷하셨지요. 탄허 스님은 노장에 대해서는 천하에 제일이라고 여기셨어요. 탄허 스님이 월정사에서 강의를 하시니까, 관응 스님도 대원정사, 동화사, 직지사에서 강의를 하셨어요. 관응 스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탄허 스님의 영향을 받아서 한 것 같고, 두 분 관계상에서 나는 그렇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탄허 스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탄허 스님은 강백이기도 하고, 선사이기도 한 분이지요. 스님은 경을 보면서 참선을 하고, 참선을 하면서도 경을 보신 어른이에요. 스님은 경전과 선을 둘로 보신다는 생각을 안 하셨어요. 평소에 그런 것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어요. 스님의 특징은 유불선을 회통하고, 선과 교를 융통해서 그 모든 것을 배대해서 강의를 하셨어요. 스님은 늘 두루마기를 걸쳐 입으시고 그래서 선비와 같은 모습이었어요. 그리고 스님은 민족의식, 민족운동, 정치에 생각이 있으셨어요. 보천교 간부였던 아버님의 영향도 있었지만 민족과 정치에 관심이 많았어요. 또 예언, 미래예측도 많이 하셨지요. 일본에 갔다 와서는 일본의 땅이 밑으로 몇 센치가 들어갔다고 실측하였다고 하시면서, 그런 내용을 보도한 일본 신문도 가져와서 보여주고 그랬어요. 사주, 관상에도 관심을 두었는데 해운선생이라는 분이 스님을 자주 찾아왔지요. 그 사람은 탄허 스님을 그 방면의 스승으로 여겼어요. 하여간 스님은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스님의 정체성은 어떤 한 가지로 논할 수 없어요. 선사이면서도 강사였으니, 선교겸수(禪敎兼修)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탄허 스님이 스님들 교재 모두를 현토 역경한 것, 그리고 비구니와 재가자에 대한 가르침도 개방적으로 한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까?
맞아요. 스님은 재가자나 비구니를 절대 안 가렸어요. 재가자까지 관심을 두고 가르친 것은 국가와 민족을 폭 넓게 생각하는 관심에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른 스님은 하지 못하였지요.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입니다. 좋게 해석할 수 있어요. 그리고 스님은 인재양성을 할 수 있는 수도원을 대전 학하리 자광사에다가 만들려고 하였는데, 그게 스님의 꿈이자 원(願)이었어요. 한 번은 스님과 함께 자광사 근처에 있는 명당자리라는 곳을 가본 적도 있습니다. 낮은 동산인데 흙은 없고, 암벽으로 되어 있는 곳입니다.

-탄허 스님의 대표적인 어록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그것은 향상일로(向上一路)일 것입니다. 스님은 그 유묵을 많이 써주었어요. 그리고 스님이 법문을 하시면서도 그것을 잘 쓰셨고, 상당법문을 하시면 어느 선사보다 더 나은 선법문을 하셨어요. 49재에서 법문을 할 때에도 선법문으로 회통을 하셨으니까요.

-탄허 스님은 역사에서 소외되었고, 업적 및 역사가 정리되지 않았어요.
그런 것을 후대에서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나는 근래의 책을 갖고 공부하신 큰스님으로 둘을 꼽는데 그것은 탄허 스님과 성철 스님입니다. 탄허 스님은 유불선을 다 공부하셨어요. 아는 것이 많으셔서 천하의 학자는 와서 질문을 하라고 당당하게, 자신있게 하셨어요. 그리고 성철 스님은 불경뿐만 아니라 수많은 책(물리, 타임지, 일본책 등)을 보시고는 그것을 백일법문으로 정리해 놓았지요. 저는 근래에 대중에게 강의를 할 때에 공부한 것을 제대로 정리, 표현하는 것.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철 스님과 탄허 스님의 이야기를 합니다. 성철스님은 당신이 배운 것을 백일법문으로 표현하신 독특한 중도광(中道狂)이십니다. 탄허 스님은 화엄경과 유불선 삼교를 통달하셨어요. 그래서 그것을 월정사에서 1주일간 회통하는 강의를 하시면서 이런 강의는 천하에 탄허 당신밖에 못한다고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나는 해인사에서 일타 스님에게 그런 말을 들었어요.

-무비 스님은 탄허 스님에게 큰 영향을 받았지요?
그럼요.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이 탄허 스님입니다. 제일 크죠. 나는 강원에서 성호스님, 지관 스님, 각성 스님에게 배웠고 그리고 운허 스님, 관응 스님에게도 배웠어요. 그리고 선방을 다니면서도 수많은 큰스님들을 친견하였어요. 스승의 복이 많지요. 그래도 시간이나 영향이란 측면에서는 오직 탄허 스님입니다. 탄허 스님이 강조하신 것은 보조법어, 사집과 사교, 노장학입니다. 스님은 유교를 배우다가 도교를 배우면 유교가 시시하고, 도교를 배우다가 경전을 배우면 도교가 시시하고, 경전을 배우다가 선어록을 보면 경전이 시시하다는 것을 늘 말씀했어요. 그러나 맹자와 논어는 어쩌다 한두 마디만 언급했어요. 저는 요즈음 4년째 법화경, 임제록, 화엄경을 스님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신도들에게도 강의를 하고 있어요. 이런 것도 탄허 스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화엄경 소초를 지은 청량국사의 글을 보면 내가 죽을 곳을 찾았다고 하면서 그렇게 환희심을 내고 심취하였다는 것이 나옵니다. 그런 것처럼, 저도 화엄경을 비롯한 경전을 배우고 강의하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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