苦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항상 주인공에다 기쁘게 놓으세요

 

▲ 그림 최주현

일상생활이 그냥 참선이라 하시니…
문) 예로부터 보통 공부를 하는 스님들은 어떤 선지식을 찾아다니거나 화두를 받아서 공부하거나 선방에서 공부하거나 다양하게 공부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같이 생업에 쫓기는 사람들은 그렇게 공부하기가 참 힘듭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일상생활이 그냥 참선이라고 하시니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짧게나마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 지금 부처님이 가르치는 뜻은, 일상생활이 그냥 참선이라고 하는 뜻은 시공을 쫓아가는 게 아닙니다. 시공이라는 언어도 붙질 않죠. 자유스러운 겁니다. 그대로 자유스러운 거예요. 우리는 내 몸에도 법망이 있고, 지구에도 법망이 있고, 우주에도 법망이 있어서 내가 한 생각을 내면은, 하여튼 누구 욕을 했다 할지라도, 누구 원망을 했다 할지라도 그건 습에 의해서 그게 업보예요. 다른 게 업보가 아닙니다. 나는 업보 지은 예가 없다고 하는데 그 지은 예가 없다고 하는 그 자체가 업보예요. 모든 사람들이 그러면 다 맡겨 놔라 하면은 “맡겨 놓고 인간이 어떻게 삽니까?” 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사는 거까지 놔야 돼요. 그렇게 모두 맡겨 놓는다면 그것은 대의의 무주상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자기 중생을 무주상으로 돌리지 못한다면 남도 무주상으로 돌릴 수가 없어요. 내가 무주상으로 돌려야 남도 무주상으로 돌림으로써 공덕이 양면에 다 이익이 가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을 공으로서 즉, 공덕으로 돌리질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공덕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모두 상대성 원리면서도 한 점의 도리입니다. 한마음의 도리.

옛날에 인도에서나 중국에서나 그 많은 선지식들이 났어도, 또는 우리 조선에서도 많이 선지식들이 났어도 모두 사람들이 마음으로 높은 데만 생각하기 때문에 찾지 못하는 겁니다. 아주 턱 밑에다가, 못났든 잘났든 자기 턱 밑에 있는 거를 불구해 놓고 먼 데서, 먼 데서 전자의 선지식들이 선맥을 이어서 그렇게 훌륭했다는 거를 스승으로 삼고 화두를 쥐고 나가니까 허, 자기 그 법망도 해결 못하는 거죠. 그러니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백 년이 간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아니, 억 년이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도에서나 중국에서 하던 것을 그대로 그때의 시절에, 그때의 상황에, 그때의 방편으로서 했던 그 방편을 지금 시대에까지 끌어내려서 똑같이 이것을 해 나간다면 그것은 앞으로 길잡이의 뜻이 그릇돼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 스님네들은 그 티끌 같은 불씨로서의 전 우주를 비추면서 길을 인도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그것을 아예 생각으로서 어떠한 스승이 나 이외에 또 있는 줄 알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주 위대하고 그런 걸 생각을 하다 보니까 아, 자기 콩씨도 못 찾는 거죠. 자기 콩씨를 못 찾으면 남의 콩씨를 어떻게 봅니까. 어떻게 찾고. 자기 콩씨로 인해서 콩씨가 한데 모이는 법인데. 콩씨로 인해서 한자리에 콩씨가 담기는 법인데, 한 그릇에. 콩나무로서 콩씨를 못 본다면은, 콩씨가 없다면은 아예 한 그릇에 담기지도 못할 거 아닙니까. 작년 콩씨 찾다가 올 콩씨 한 그릇에 들어갈 수도 없는 거죠. 그 콩씨라는 것은 언제나 유생 무생을 다 먹이고도 그 콩씨 하나는 되남아요, 항상. 이 도리를 우리는 넓혀서 우리 선정에 의해서, 모든 것을 선정에서 나오는 거 선정에다 맡겨 놓는다고 하면 믿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겁니다. 믿어라 이거예요. 믿고 자기 몸이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자기 마음이 몸을 다스려요.

그렇게 해 가면서 그것은 한생각에서 나오는 거니까 둘이 아니라는 그 공한 도리를 안다면 바로 거기에서 즉시 또 지혜의 무기로써 모든 것을 해 나가면서 체험하면서 보림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바로 공부해 들어가는 일이요, 또한 우리가 평상시에 그대로 참선이라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시대에 옛날의 그 선지식들이 공부하면서 방편으로서 해 나간 걸 고집부리지 말고 지금 현 시대에 물결치는 대로 전부가 그대로 참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부가 참선이 아니라면은 어디에고 걸립니다. 앉았다는 데서 걸리고 섰다는 데도 걸리고, 참선이라고 하는 데도 걸리고, 좌선한다고 하는 데서도 걸리고, 인제는 다 했다는 데서도 걸리고. 모든 게 다 걸리는 거예요. 내가 해야겠다고 발심을 내는 데도 걸리는 겁니다, 공에 들지 못하면. 어떤 사람은 공에 들어서 또 편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잘한다고 그러죠. 몸으로 아무리 공에 들어서 그 앉는 기술이 좋다고 그래도 그건 기술이에요. 참선이 아니라 그것은 기술이에요, 어디까지나. 몸을 단련해서 잘 앉아 있고 오래 앉아 있는 거는 기술이지, 그것은 참선이 아니에요. 참선이라는 건 가다가도, 걸어가면서도, 빈 배는 걸어가면서도 나 할 일 다 하는 것이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 있을 때 알아 놓으신다면은 뭐든지 올바로 눈이 뜨이고 코가 뜨이고 맛을 알고 귀가 뜨여서 어디고 모르는 데 없이 착착 가시게 되는 거죠. 만약에 여러분이 이 도리를 모르고 기복으로만 나가는 그런 분이 있다면 죽어도, 살아서 모르니깐 죽어도 어딘지 몰라서, 항상 그러죠. 개집도 들어갈 수 있고, 뱀 소굴도 들어갈 수 있고. 그건 그 식만, 어쩌다 살던 식만 남아서, 그 습만 남아서 그냥 들어가는 겁니다. 깜깜한데 어떻게 찾아 들어가나요? 그러니 살아서 눈을 뜨지 못하면은 아니 되고, 귀가 떠지지 않으면 아니 되고, 전 우주의 그 향기 냄새를 맡지 못하면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리고 맛을 못 봐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아 있을 때 여러분들이 차원을 높이고 또 지혜를 넓히고 해서 모든 일체 신이 도로 내 한 점의 마음에 있다는 그 사실을 알고 방황하지 않는다면 내 앉은 자리가 부처 자리요, 바로 법신 자리요, 화신 자리요, 보신 자리요. 모두가, 어디에서 찾을 게 없죠. 나한테 있으니까,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이 지구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요, 또는 여러분도 영원하게 지속될 것이요, 끄달리지 않을 것이요. 업보라는 언어도 붙지 않을 것이요, 또는 윤회 아니, 유전성도 붙지 않을 것이요, 가난과 우환도 붙지 않을 것이요. 모두가 붙지 않을 거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선을 행했으면 선이 붙을 것이요, 악을 행했으면 악이 붙을 것이니 선과 악을 다 놔라 이겁니다. 그래야 자유인으로서 방방곡곡 어디 안 닿는 데가 없이 살게 될 것입니다.

고를 멸하여 도에 이르는 이치에 대해
문)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고를 만나야 하고 이를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다고 봅니다. 생로병사와 고의 원인은 집착에 있고 이를 멸하고 도에 이르고 해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깥에서나 안에서 나오는 고의 경계는 끝임 없이 나타나고 우리는 여기에 집착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큰스님의 가르침대로 놓고 관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는 있습니다만 아직은 너무나 미혹하오니 고를 멸하여 도에 이르는 이치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여러분한테 줄창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나간다면 팔자운명이다 뭐다 하면서 살겠지만 이 마음공부를 하고 가시는 분들에 한해서는 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자기고 마음을 허탕하게 쓰는 것도 자기라는 걸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이 마음공부를 하다 보면 옳고 그른 거, 하지 않아야 될 거 하여야 될 거, 이런 거를 다 알고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자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고다 고가 아니다 하는 것이지 고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본래는. 그런데 고라고 한 것은 오히려 자기가 자기를 승화시키는 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막다른 데를 들어가 보지 않았으면, 그 처참하고 갈 길이 없어서 쩔쩔매고 이렇게 해 보질 못했으면 그런 일이 앞으로 또 닥쳤을 때 기가 막히거든요. 그러니깐 모든 것이 자기 경험이고 또 그 경험에 의해서 끄달리지 않게 되고 끄달리지 않음으로서 마음을 편안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라고 생각하면은 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뜩무뜩 생각이 나지만 내가 옛날에 쓰라리게 경험했던 그 모든 일들이 여러분은 처참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은 나로서는 처참하기커녕 그 모든 일들이 너무도 감사하고 말입니다, 그렇거든요, 고맙고. 그렇게 안 해 보았으면 지금에 와서 그 고통스러운 여러분을 알 수도 없거니와 내가 그 고통을 받아야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무너져도 눈도 깜짝거리지 말라고 그랬죠. 그 마음이 모두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고 마음이 고통을 가져오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이 있어서 하늘이 무너진다 뭐, 요즘은 일본에도 그렇고 모두 지진이 나서 야단들을 할 때도 많죠. 수만 명이 죽고 그런 때도 있었지만 그러한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고통은 하나도 없단 얘깁니다. 그 즉시에 죽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고통이 고통이라고 하니깐 고통이지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고 있고를 모두 둘로 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선도 악도 둘로 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고통으로 생각을 안 하고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음파로 통해서 다 통하게 돼 있습니다. 지금 마음공부 진짜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면 그 허공에도, 즉 말하자면 두루두루 음파로 통해서 살게 되는 거죠. 진화를 하게 되고 모두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깐 그 마음 하나 쓰는 데 얼마나 여러분의 그 마음이 중요한지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런 생각 하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모두 진화력을 가지게 되고, 또 진화를 하되 이다음에 어떠한 불신한 걸로 하지 않고 모습이 아주 보기 싫은 걸로 하지도 않고, 잘 모습을 해 가지고 나오고 마음을 잘 해 가지고 나오고 또 둘 아니게 착하게 길을 잃지 않고 여여하게 살게끔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마음 하나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고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항상 주인공에다 기쁘게 놓으세요.

말 안 듣는 자식 감당하기 힘들어요
문) 가정 형편 생각해서 자식이라곤 딱 하나 있는데 너무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여서 부모로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제가 아이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요.

답) 그러니까 모든 걸 볼 때 바로 내 집에서 일을 해 놓은 거대로 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임신하게 되면 반듯한 걸 먹어라, 위 대가리로 먹어라, 대가리도 꽁지도 먹지 마라 하고선 하는 것보다, 우리 마음 하나 똑바르게 잘 안으로 굴리면서 쓴다면 그것은 똑바른 어린애를 낳을 겁니다. 모두가 끼리끼리 모이게끔 돼 있으니 심오한 그 도리를 여러분이 잘 알아서 앞으로 해 나가실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앨 다 낳아 놓은 연에 이거 이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하느냐고 그런다면, 좀 이미 늦은 점도 있지만 늦은 점이 아닙니다. 지금 낳아서 이렇게 성장했다 할지라도 참 이 마음의 도리로서 다스린다면 스스로서 그 마음의 역량이 그대로 밝아지면서 다 성장이 크게 잘됩니다. 나쁜 것도 좋게 되고요.

그러니 착을 두지 마시고 항상 안으로 굴리면서 뿌리를 도와줄 수 있는 그러한 문제를 가지셔야 됩니다. 겉으로 착을 두고 귀엽다고, 만날 잘못해도 그저 “아이, 그럭하지 마라” 그냥 그냥 이렇게 하곤 자꾸 뒷받침을 해 준다면 자식 버립니다. 애당초부터 그런 인연으로 닥쳐온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안으로 굴려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부모도 일찍 여의게 되고 모두 이런 아이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 문제들도 자기가 그렇게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거를 유복하게 만들어 주려면 마음으로서 항상 굴리면서 뿌리를 도와줌으로써 싱싱하게 자랄 수 있고 또는 이파리도 싱싱하게 돌아갈 수가 있고, 참 상대와 상대가 모두 거론이 된다 할지라도 아주 유하고 지혜롭게 슬기롭게 돌아갈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어떤 분들은 절에 다니면서 마음공부를 하고 나서는 그렇게 나쁘던 애가 참 착해졌다고 이런 소릴 하거든요. 전에는 통 그런 예가 없었는데, 그냥 그저 돈 한 푼이라도 달래서 안 주면 그냥 유리창을 부수고 이렇게 하던 아이가 그저 점점점점 착해지면서, 장독 자리에서 소지를 해도 “어머니, 이거 드시기 무거우신데 제가 들까요?” 하고선 전부 같이, 손을 걷고선 같이 해드리고, 어머니의 일을 그렇게 도와준답니다. 지금은 들어가서 공부를 잘하고 그러기 때문에 너무 고마워서 그 마음의 고마움을 금치 못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한생각을 잘해서 안으로 굴려서 모든 뿌리들을 잘 싱싱하게 해 줄 수 있는 그 능력을 여러분이 다 가지셨습니다. 이 마음의 에너지가 그렇게 융통성 있게, 마음을 내는 대로 돌아가거든요. 만약에 마음이 참 그렇게 옹졸하고 바깥으로만 굴리고 바깥으로만 그렇게 팔팔 뛰고 아등바등하면서, 우리 집이 이렇게 됐다고 누굴 나무라고 누구를 원망하고 서로 싸우고 이렇게 돌아간다면 이거는 집안도 화목지 못할 뿐 아니라 점점점점 가환이 생기고 서로 마음이 벌어져서 애정도 없어지고. 그게 뭡니까? 사는 게 그게 사는 겁니까? 밉건 곱건 잘생겼건 못생겼건 있건 없건 마음이라도 화목해서 우리가 산다면, 아니 부자라고 다 행복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부자라도 가져올 수 없는 집은 가져올 수 없습니다. 가난하다 할지라도 행복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항상 부처님만이 그 참 광대무변하시고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이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그 여건을 100% 가지고 있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도리를 알고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애가 키가 크면 좋겠는데…
문) 제가 임신을 했는데 사실 제가 키가 작아서 걱정입니다. 우리 애는 키가 좀 컸으면 좋겠는데 마음을 낸다면 그것도 가능할는지요.

답)
그래서 인제 어린애 낳기 전에 관해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애가 들어설 때에, 들어서고 바로 또 관해라. 자기가 생각할 때에 아주 키가 작게 살아서 괴로웠걸랑은, 그런데 키만 크면 또 뭘 하느냐. 그러니까 여러 가지가 다 들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관해라 이겁니다. 그러면 키도 그렇게 크지도 않으면서 작지도 않다. 그러면서 오직 마음 에너지도, 지혜도 풍부하게 가지고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가 태어날 때 생명력을 가지고 태어나거든요. 정자 난자로 인해서 부모가 주는 모습은 태어나나 태어날 애기가 생명력을 가지고 태어나거든요. 근데 그 생명력이라는 거는 이름이지 실지로 그 몸체가 생긴 건 아니죠. 그러니까는 태교를 할 때에 잘 저거 하면 그것이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고,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이겁니다. 근데 또 잘못하게 되면은 배로 태어난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쌍둥이도 될 수 있고 셋도 될 수 있고 그렇다. 이런 문제도 있고, 또 발가락이 때에 따라서는 하나가 부족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이 태교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잘 생각해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태교 안한 애들은 어떻게 되느냐. 태교 안 한 애들은 입력된 대로 그냥 나오는 거죠. 잘 됐으면 잘 나오고 못 됐으면 못 나오고. 이런 문제도 다 자기가 살아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된 대로 되는 거죠. 그러나 그 입력된 대로 되는 것이 고가 아니다. 생각을 잘하면 그 입력이 잘못된 건 없어지고 새로이 입력이 들어갈 수가 있다 이런 얘기죠. 그러니까 알게 되면 곧바로 그냥 터지게 할 수 있고, 곧바로 그냥 다시 공이 될 수가 있죠. 그러니까 너무 애타게 그러지 마시고요, ‘주인공, 너만이 알게 할 수 있어. 너만이 하게 할 수 있어.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잖아.’ 이렇게 편리하게 해요. 과거 자긴데요, 뭐. 그러면서도 과거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 조상일 수가 있죠, 자기 조상. 그런데 불가에선 불성이라고 그래요. 생명은 다 불성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병원에 가 보니까 애가 기형안데 수술을 해서 버리셔야 됩니다 이렇게 판단이 나왔대요. 그런데 그 집에선 어린애가 귀한 집이란 말이죠. 그러니깐 나에게 와서 울지 않겠어요. 그럼 “의사가 오진한 거야.” 그렇게 거짓말을 해 줘요. 그렇게 해서 안위를 시켜 주고 “아니야, 멀쩡해. 내가 보니까 멀쩡한데, 뭐.” 그렇게 해 놓고는 인제 한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보통 그냥 삼주일, 이렇게 더 있다가 가서 그 의사한테 한 번 더 가 보라고 해요. 그런 예가 한 두 건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해 가지고 인제 아프지도 않고 뭐 괜찮으니까 그냥 한 삼주일 있다가 그 의사한테 가서 다시 안 본 것처럼 그냥 본대요. 그러면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대요. “잘 자라고 있다는데요, 스님.” 그러거든요.

그도 그럴지언대 키도 클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기형아가 정상인으로 될 수 있다면 키도 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 다리 짧은 것도 이 발목에서 문제가 되는 거고 이 키 크고 작은 건 두 군데서 문제가 되는 거고 그렇죠. 그게 이게 태교에서 그렇게 되는 거는 자기, 과거의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얘기죠. 과거의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자기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애하고도 이렇게 통신이 된다는 거죠. 엄마가 말을 하는데 그 과거의 태어날 애기가 살던 걔가 통신이 되니까. 걔가 어린애를, 자기를 자기가 형성시키는 애거든요. 그러니까 보호할 수밖에요. ‘이렇게 하면 안 되잖아.’ 하고 하니까 그냥 정상으로 만들어 놓는 거죠. 그러니까 기적이라고 그러는데요, 그런 거를 어떻게 보면은 기적이라고 그럴 수도 있지만 기적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바로 정신계와 물질계가 이렇게 같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