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났든 못났든 내 몸 있을 때 이 마음도리 알아야

▲ 그림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부처님 법을 얘기해 준다면서 웬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나 그러시겠지만, 내 한생각에 오장이 꼬여서 틀어진 것도 펼 수 있고, 오장을 꼬이게 해서 피도 통하지 않게끔 만들어 놓을 수도 있어요. 왜 여러분이 그렇게 해 놓고 그냥 병원에 가고, 또 딴 데 가서 갖은 약을 다 써서 오히려 부작용이 나게 해 가지고 이 몸뚱이를, 집을 못 쓰게 만들어 놔요? 진짜 목수한테 맡기지 않고 가(假)목수한테 맡겨 놓으니까 저희들 좋은 대로 만들어 놓은 거죠. 그런데 내가 살아가는데 나에게 좋아야지 딴 사람에게 좋아서 되겠습니까? 그렇듯이 여러분은 자기 집을 자기가 지키고 스스로 움직이게 해서 모든 점에서 빛나게 살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죠.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말씀을 해 드려야만이 여러분이 잘 파악하고 이해를 해서, 자기를 믿고 자기한테 다 놓을 수 있고 감사할 줄 알게 될까 하는 생각이 아주 불현듯 납니다. 사계절이 있지만 여러분은 항상 봄이 돼야 되죠. 이 도리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계절이 있지만 진짜 안다면 사계절이 없습니다. 항상 봄이죠. 여기에서는 불을 껐다 켰다 하니까 ‘켜라’ ‘꺼라’ 하는 언어가 붙지만, 어떤 세계에서는 항상 밝기 때문에 ‘꺼라’ ‘켜라’ 하는 언어가 붙질 않아요. 그 도리를 아시면 바로 그런 겁니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오고 앉고 싶을 때 앉고, 이게 그대로 참선이에요. 그래서 자나깨나, 여러분이 일을 하면서도 장사를 하면서도 앉아 있으면서도 참선이다 이런 거죠.

애들한테 ‘공부해라. 너는 어디 가라. 서울대학 가라.’ 이렇게 강요하지 마세요, 제발. 알고 보면 여러분은 오히려 나중에 난 겁니다. 대의적으로 본다면 나중 난 것도 없고 먼저 난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듣기에는 횡설수설하는 것 같겠지만 마음으로 새겨들으세요. 여러분이 늙어 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른이 돼서 애를 낳았죠? 그런데 그 애는 벌써 여러분보다 먼저 늙어서 또 나왔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죽어서 앞으로 또 나올 건데 걔는 먼저 늙어서 벌써 어린애로 탄생했으니 늙고 젊고가 없이 영원한 자기 근본은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거를 말로다가 해서 복잡하고 무겁게 짐을 짊어지게 한다면 애들을 옴짝 못하게 만들어 놓는 겁니다. 그러지 말고 주인공에다 맡겨 놓으면 주인공은 둘이 아니니까 에너지가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갑니다. 자식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만 놓으면 저절로, 놔두면 공부도 잘하고 다 잘할 걸, 잘하러 가는 놈을 부모들이 오히려 붙들고 늘어져요.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말을 했는데 자식은 그 말 한마디에 그만 마음이 어딘가가 좀 비틀어져요. 그러면 이리로 갈 건데도 저리로 가요. 그렇게 만들어 놓지 마시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 울고 짜고 하지 말고 잘 가게 하는 방법이 바로 그런 겁니다. 가볍게 해 주세요. 자기가 사는 거지 여러분이 끼고 사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뚱이를 가지고 있지만 죽을 때는 몸뚱이도 다 놓고 갑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집이 좋고 또 마누라가 있고 자식이 있어도, 대신 아파 줄 놈도 없고 대신 똥 누어 줄 놈 없고, 또 대신 먹어 줄 수 없고 대신 잠자 줄 수 없고 대신 죽어 줄 수 없어요. 이 다섯 가지는 누구라도 대신 못해 줘요.

그러니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오늘도요, 제가 아침 공양을 하지 않고서 그냥 왔거든요.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시장기가 드니까 골이 아파요. ‘야, 골이 아프구나. 골이 안 아파야지.’ 하고 쓰다듬어 주는 이 고마움. 여러분은 그 고마움을 모르죠? 내 손이, 내 마음이 나를 위한다는 거,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죠? 누구도 모릅니다, 그건. 아무리 부부지간에 절친하다 못해 천하없어도, 부모자식지간이라고 해도, 효녀 효부라 해도 다 소용없어요. 진짜 자기한테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아요. 섭섭하게 해도 섭섭하다는 말 못하고 그네들을 위해서 그냥 “응, 그래. 그래, 참 잘한다.” 하고 말하거든요. 모든 게 그렇고요.

여러분이 그렇게 믿고 능력을 기르면 돈이 없어서 걱정할 필요도 없고 죽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아파서 걱정할 필요도 없고, 가난하든 부자든 탐심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고, 억만 냥을 내가 지고 있어도 관리인이지 그거를 탐착하고 있질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욕심이 없으니까 돈이 자꾸 오죠. 돈도 생명이 있고 마음이 있거든요. 그러니 내가 쫓아다니지 않는다면 오지만 자꾸 쫓아가면 자꾸 달아나가요. 이상한 마음들이죠, 모두.

그러니 여러분이 낚시질을 해도 좀 잡히게 해야지 마음을 조급하게 내면 고기가 낚싯밥을 먹지를 않아요. 조급함이 없이 인내 있고 믿음직하게 하시면서 자기 몸 바깥에서 찾지 마시고, 자기가 콩싹이라면 그 콩싹에 콩씨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진짜로 거기서 세세생생에, 올해만 사는 게 아니라 내년도 그 콩씨로 인해서 나고 또 나고 또 나고 또 나듯이 그렇게 사는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콩씨가 팥씨도 될 수 있고 팥씨가 콩씨도 될 수 있습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얘기 해 드리기도 하지만 전설의 고향에서도 가끔 보시리라고 믿습니다. 금방 부모가 됐다가 금방 그 부모가 죽어서 그 대에 또 자식이 될 수도 있고 손자가 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남의 집의 아들도 될 수 있고 남의 집 손자도 될 수 있는 겁니다. 때에 따라서는 소가 될 수도 있고요. 이렇게 수억겁을 거쳐서 미생물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진화된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지금 인간이 되기까지도 이렇게 쫓기고 쫓으면서 어렵게 왔는데, 피땀을 흘리면서 이날까지 왔는데 그냥 가시렵니까? 내가 잘났든 못났든 내 몸을 가지고 나왔을 때 이 도리를 알고 자유롭게 몸을 벗는다면 나뿐만 아니라 나 하나로 인해서 위로 부모 조상들이나 아래로 내 자녀들을 다 이끌어 줄 수 있는 바탕이 튼튼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 누구든지, 손자가 태어나도 그렇고 손녀가 태어나도 그렇고 다, 그 대에 사람 노릇을 못하고 기둥을 붙잡고 모로 서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이겁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만 하라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서, 자식도 손자도 위 조상도 전부 남입니다. 그 남을 위해서, 아니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지만요.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이런 얘기 하나 할까요? 예전에 인도에서는 사람들이 죽으면 산에다가 그냥 내다 놨기 때문에 뼈다귀 무더기가 많았답니다. 석존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모퉁이를 도시다가 그 뼈무더기에 절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제자들이 “사생자부이신 부처님께서 어찌 그런 하찮은 뼈다귀에다가 절을 하십니까?”라고 했겠죠. “이 뼈다귀가 전자의 우리 할머니일 수도 있고 할아버지일 수도 있고 형제일 수도 있고 어머니 아버지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니까, 그 제자들이 “미처 이런 뜻을 몰랐습니다.” 하고 그냥 고개를 땅에다 대고 흐느껴 가면서 울었답니다. 전자에 있었던 옛날 얘기로 듣지 마세요. 지금 현재에 그렇다는 얘깁니다. 여러분은 그 한 찰나 한 찰나를 모를 겁니다.

예를 들어서 금방 우리가 참, 그 뭡니까? 두꺼비가 뱀이 되고 뱀이 두꺼비가 되고 이렇게 되는 그런 이치도 있습니다. 뱀이 두꺼비가 됐을 때는 자기가 전자에 뱀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또 뱀이 자기가 앞으로 두꺼비가 될 줄 모르거든요. 자기가 하는 대로거든요. 그러니까 두꺼비는 욕심이 많아서 때에 따라서는 구렁이한테 가서 일부러 먹히려고 그러거든요. 왜냐하면 자기 새끼들을 많이 낳기 위해서요. 그러한 그 욕심 탐착! 많이 낳으면 뭘 합니까, 글쎄. 하나가 인연이 돼서 붙들리면 그렇게 고가 많아요. 고가 더 많죠. 그렇듯이 굼벵이가 매미가 되고 매미가 굼벵이가 되고 이랬을 때도 그렇고 모두가…, 소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소가 되고 이런 것도 우리는 생각해 볼 수도 없죠? 그런데도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달렸다 이겁니다. 그런 윤회에 항상 끄달리고 얽매이느냐, 귀신으로 사느냐, 저런 짐승으로, 개로 사느냐.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가난과 고독 속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사느냐, 아니면 참 멋진 사람이 되느냐. 이런 것도 여러분에게 달려 있죠.
그러니 오늘 이렇게 여러분하고 얘기한 것도 아마 여러분이 듣기에는 횡설수설한 것 같습니다만 그 도리를 웬만큼만 알면 다 이해가 갑니다. 요점만 따도 벌써 그건,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듯이 말입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더라도 자꾸 듣다 보면 나중에는 무불통지가 돼요. 길이 훤해요.


여러분이 낚시질을 해도
마음을 조급하게 내면
고기가 낚싯밥을 먹지를 않아요.
조급함이 없이 인내 있고 믿음직하게 하시면서
자기 몸 바깥에서 찾지 마세요.
자기가 콩싹이라면
그 콩싹에 콩씨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질문자1(남):
스님 법문 굉장히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제가 올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건데,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려고 노력은 해 왔지만 노력에 비해 많이 아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 체험으로는 불교는 책이나 법문 같은 것이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에 입문하면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까 큰스님께서는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화했다고 얘길 했습니다. 그럼 인간의 가장 오래된 첫째 조상은 뭡니까? 그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큰스님: 30억 년 전의 조상이나 지금 현재 자기의 조상이나 둘이 아니에요.

질문자1(남): 다른 종교에서는 지구나 모든 만물이 어떤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얘길 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겁의 윤회를 거쳐 가면서 인간이라는 몸이 만들어졌다고 얘길 하는데, 그러면 불교에서는 자연법칙을 그대로 순응하는 겁니까, 아니면 부처님의 힘이나 그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이나 모든 만물이 움직인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까?

큰스님: 뭘로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이런 게 있죠. 보이지 않는 세계가 50%라면 보이는 세계가 50%예요. 그래서 이런 게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도 나와 있지만 음과 양이 한데 합친다,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친다는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지는 동시에 어떤 것이 필요하냐. 자기 영혼이 거기에 계합이 되지 않으면 안 되죠. 자성신이 즉 자신(自神)이란 말입니다. 신이 계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신의 역량에 따라서 아이가 출중하냐 안 하냐가 달려 있습니다. 참 묘한 법이 있죠.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서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물로 그 물질 자체가 다 없어지죠.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졌던 그 하나에서 모습을 바꿔서 다시 수억 마리가 된단 말입니다. 두 사람의 정자와 난자 속에서 한 사람이 태어나면 이 인간의 몸 하나에 또 수억 마리가 들어 있듯이 말입니다. 이거는 대표로 대장을 하나 바깥으로 내보낸 겁니다. 그런데 이 커다란 몸뚱이를 하나 내놓고는 그 몸뚱이 속에 내가 수억 마리가 돼 가지고 또 있습니다.

그러면 몸뚱이 속에 있는 내가 옳습니까, 현재 나와서 사는 내가 옳습니까? 우리가 표면적으로 볼 때 말입니다. 그러면 내 속에 천차만별로 들어 있는 그 생명들과 지금 이 몸의 생명이 따로 있습니까? 예? 내 배 속에 있는, 오장 육부 속에 있는 생명들이 진짜 생명입니까, 지금 내 생명이 진짜 생명입니까? 그 영혼이라는 것은, 신이라는 것은 여러분 모두에게 다 있습니다. 한마음의 자성신이 수십억도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죠. 어느 나라에 아주 급한 일이 생겼어요. 50억의 군사가 나라를 먹어치우려고 쳐들어오고 있었답니다. 이쪽 나라에는 군사가 10억뿐이니 저쪽에 비하면 아주 적은 군졸들이죠. 그러니 저쪽에서 50억이 쳐들어오니 10억으로는 질 게 뻔한 일이죠. 그런데 이쪽 나라에 어느 한 사람이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야, 저 50억을 10억이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느냐. 같이 대항하자면 40억이 더 많아.’ 그러니 어떡합니까. 그래서 한생각을 하기를 ‘모습 없는 모습이여. 그쪽에 50억이라면 나도 체가 없으니 50억이 될 수 있지 않으냐. 모습 없는 내 모습이 그쪽 모습 있는 데로 가서 만약에 내가 된다면 50억이 싸움할 일도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한생각을 하면서 피리를 부니까 그 50억이 전부 그 피리 소리를 듣고 ‘야, 우리가 싸움을 해서 뭘 하냐.’ 이런 생각이 그냥 들어간 거예요. 50억이 전부 피리 부는 사람 한 사람이 돼 버린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 한 사람이 그 50억이 돼 가지고 뿔뿔이 다 헤어진 거예요. 그러니 싸움을 할 수도 없고 이기고 지고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에 의인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나라를 치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이라는 것은 30억 년 전이나 지금 현재 여러분의 신이나 자성신이나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신의 놀음은 바로 자기가 마음먹는 대로입니다. 차를 끌고 다니는 것을 예를 든다면, 신이 기름이라면 기름은 이리로 가든 저리로 가든 도둑질을 하러 가든 말을 안 합니다. 아시겠어요? 근데 이 신의 놀음, 즉 마음내는 그 놀음은 이 운전수에 달렸어요. 이리로 가든지 저리로 가든지 망해 먹든지 이건 운전수가 끌고 가기에 달렸단 말입니다.

그렇듯이 사람에게 짐승의 허물을 쓰게 하느냐, 다시 사람의 허물을 쓰게 하느냐. 또는 비상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느냐, 또는 한 나라의 왕이 되게 하느냐. 이런 것도 보이지 않는 데서 다 하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대로 자연 법계에서 벌써 주어져요.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아이고, 사람 살기 귀찮아서 어떡하나.’ 하고 말입니다. 죄가 있다 없다, 유전이 있다 업보가 있다, 내가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나, 내 팔자가 어떤가, 운명이 어떤가 이런 거 아랑곳없다는 얘깁니다. 왜냐? 자성신은 생각 내는 생산처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주인공에, 즉 말하자면 체가 없는 데다가 체가 없는 걸 놓을 때에 모든 것이 다 녹아져 버려요. 예를 들어서 자석에다가 자석을 붙이면 다 자석이 되듯이 그냥 없어져 버려요.

그러면 없어져 버리는 동시에, 즉 체가 없는 것이 체가 없는 생각을 잘하면 다 녹아 버리는 동시에 생각을 좋게 자기 분수에 맞게 잘 내면 생산이 돼서 현실로 나오는 겁니다. 이건 과학적이기도 하지만 자연과학이라고 ‘학’을 붙이기보다는 ‘자연과학심’이라고 할까요. 자성신의 활용이라고, 자활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내가 아까도 얘기했듯, 원통 자활, 즉 내공을 타파한다면 삼심 내공을 타파하게 된다. 사공법을 타파한다면 원통 자활을 하게 된다. 육바라밀의 그 평등공법을 타파하게 된다. 그리고 칠(七)!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 도리를 알게 되면, 깨달으면 보배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흙에서 일체 만물을 소생시키고 길러 내듯 모든 것은 자기 아님이 없는 까닭에 자기 거 아님이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 일체 전체에 칠보가 가득 차 있다. 내 마음속에, 육근에도 육진에도 육식에도, 둘이 아닌 내 한마음 근본에 그냥 칠보가 가득 차 있으니 바로 그것이 칠공법의 자활이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주는 것도 뺏는 것도 자유자재한다. 어느 나라든지 망하게 하려면 그냥 삽시간에 망하게 해요. 그런데 그런 도리를 배우는 사람이 그냥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남을 이익하게 하죠. 그 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자연법칙이 그렇게 질서정연하고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서 살면 자기는 저절로 한마음으로 돌아가면서 잘 지내게 돼 있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음을 잘 쓰시는 것이 좋지요.

또 사무 사유를 한데 합쳐서 팔정도라고 하죠. 수레공법을 타파해야 자유스럽게 다니면서, 이 몸도 자유스럽고 마음도 자유스럽고, 그래서 걸림이 없이 그 권리가 하늘에 솟은 듯 하다 이런 말이죠. 그래서 산 사람이 한 찰나에 저승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한 찰나에 저승 천자가 되고 한 찰나에 이승 천자가 될 수 있는 그 능력이, 자재법이 있어야 열반인 것입니다. 스님네들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열반이 아닙니다. 살아서 열반을 못했는데 죽어서 어떻게 열반을 합니까? 여러분이 한 달 내내 일을 안 해 놓았는데 어떻게 일한 대가를 받습니까?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삼천 년 전의 신이 따로 있고 지금 현재의 자기 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기 신은 능력이 없고 부처님 신만 능력이 있는 줄 알죠.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한생각을 하는 데에 따라서, 기름은 본래 주어져 있는 거니까 여러분이 차 끌고 가는 거를 잘만 끌고 간다면, 잘 생각을 해서 끌고 갈 수만 있다면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사고 나지 않고 돈 벌 수 있는 거죠.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한생각을 하게 할 수 있는 그 신, 자성신에 의해서 내 신이 이 우주 공간 안의 어떤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일체가 다 될 수가 있고, 천차만별의 신이 내 신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그런 이치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해 보지 못했다면 이런 얘기를 함부로 할 수도 없어요. 이 말을 거짓으로 했다 하면…, 여러분은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법계에 수많은 생명들과 신이 있는 겁니다. 그게 거짓말이라면 한마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거짓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랬답니다. 뇌물을 가지고 가서 바치니까 “야, 이거 못 받겠다. 난 이런 거 안 받는다. 내가 해 줄 수 있으면 그냥 해 줄지언정 이건 받지 않겠다.” 하니까 아무도 없는데 뭘 그러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하고 나하고 있지 않으냐.”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래, 네가 없고 나만 있어서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 우주 전체에서 알고 있는 것인데 어찌 없다고 하겠느냐. 내 마음에서 아는 거를 전체가 알고 있거늘 어찌 그렇게 얍삽하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내가 될 수 있는 대로, 힘닿는 대로 해 볼 테니까 짐 무겁게 해 주지 말고 이거 가지고 가라.” 그러더랍니다.

될 수 있으면 짐을 무겁게 짊어지고 살지 마세요. 여러분이 생각 하나로 인해서 그냥 짐을 잔뜩 무겁게 짊어지고 사시면 아주 괴롭습니다. 알고 보면 괴로운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내가 만약에 여러분이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아픔을 보고도 그냥 나는 편안하게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아마 이게 거짓이라면 내 자신이 내 자신을 죽이는 것이겠죠. 잘 이해해 주십시오. 난 어느 걸 보고도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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