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길에 일지암 들러 초의와 담론

초의〈제주화북진도〉그리며 안녕 빌어

 

▲ 유배길에 오른 추사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초의가 그린 ‘제주화북진도’

 

추사가 동지부사에 임명된 것은 1840년 6월이다. 옹방강이나 완원으로 인해 맺어졌던 옛 벗들과 즐거운 해후를 기대했던 추사, 이런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동지부사로 임명된 후, 7월 김홍근의 탄핵으로 이미 돌아가신 추사의 부친 김노경의 벼슬이 모두 삭탈되는 참화를 입었던 것. 풍전등화처럼 어수선했던 추사의 신변,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간파했던 그는 8월 초, 향리 예산으로 몸을 피했지만 8월20일 한양으로 끌려 와 추국(推鞫)을 당하고 만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추사를 도운 이는 조인영이다. 우의정이었던 그는 추사의 무고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추사의 목숨을 구했지만 제주 대정리로 위리안치 되는 횡액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해 9월 2일, 유배 길에 오른 추사, 그가 일지암에 도착한 것은 9월 20일 저녁 무렵이었다. 초췌하고 참담한 몰골로 일지암을 찾았던 그를 따뜻하게 맞았던 초의, 작디작은 모옥(茅屋), 일지암에서 산차(山茶)를 앞에 두고 펼쳤던 이들의 충심어린 담론(談論)은 필부(匹夫)의 망언(妄言)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이튿날 완도의 이진나루에서 추사와 전별할 때 초의는 성심어린 기원을 담아 <제주화북진도>를 그린 것으로, 초의의 상상에서 나온 작품이다. 1840년 9월23일에 그린 <제주화북진도>는 분명 모진 풍랑을 헤치고 가야하는 추사의 무사안녕을 간절히 기원한 초의의 염원이 담긴 작품이다. 이 그림의 화제(畵題)에는 이들의 절절한 우정이외에도 추사의 장부다운 기개와 충심이 드러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40년 9월 20일 막 해가 저문 후, 추사공이 일지암의 내 처소에 들러 머무르셨다. 공은 9월 2일 한성을 떠나 늦게 해남에 도착하셨는데, 앞서서 공은 영어(囹圄)의 몸으로, 죄 없이 태장을 맞아 몸에 참혹한 형을 입어 안색이 초췌하였다. 이런 중에 ‘제주 화북진에 정배한다’ 는 명을 받아, 길을 나선 틈에 잠깐 일지암에 도착한 것이다. 평시에 공은 나와 더불어 신의가 중후하여 서로 사모하고 경애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는데, 갑자기 지나는 길에 머물게 되니, 불행 중에 다행한 일이다. 산차(山茶)를 들며 밤이 새도록 세상 돌아가는 형세와 달마대사의 <관심론>과 <혈맥론>을 담론함에 앞뒤로 모든 뜻을 통달하여 빠짐없이 금방금방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몸에 형벌의 상처를 입었으나 매번 임금 은혜의 지중함을 칭송하고 백성들이 처하고 있는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인 양, 중히 여기니 참으로 군자라고 할 만하다. 하늘은 어찌하여 군자를 보호하지 않고, 땅은 어찌하여 크나큰 선비의 뜻을 길러주지 않아, 이처럼 곤경에 떨어지게 하여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가. 탄식하고 또 탄식할만한 일이로다.

 

이튿날 공은 적소로 떠남에 공의 원망스러운 귀양살이에 눈물 흘리며, 비로소 <제주화북진도> 한 폭을 그려 나의 충정을 표하는 바이다.(道光二十年九月二十日薄暮 秋史公投泊一枝庵貧道處 公九月初二日 離於漢城 晩到海南 先時公被逮囹圄 無罪笞杖 身被刑酷 顔色憔悴 然中受命濟州華北津謫所 仰仰延路 暫到一枝庵 平時 公與我信義重厚 不忘相思相愛之道 橫路留得 幸於幸耳 山茶一盃 終夜談論俗塵之勢 達磨大師觀心論及血脈論 前後通儀 無漏速對 然而身被刑傷 每稱君恩之重 處民之苦 自苦如重 眞可謂君子耳 天何以不保君子 地何以不育宏士之志 如此困橫脫機 可歎可歎耳 翌日公發謫所 乃泣公之怨行 始寫濟州華北津圖一幅 以表貧道之衷情矣)

 

서로 사모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않았던 초의와 추사. 이들의 우정은 간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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