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범룡 스님

범룡 스님(봉암사ㆍ동화사 비로암 조실, 조계종 전계대화상 등 역임)

한암스님께 배워 다음날 강의
한암 스님 “나보다 낫다” 칭찬
고암·영암·서옹 오대산 도반

※본 내용은 범룡 스님 입적(2005) 전, 2002년의 대담이다.

-스님께서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하여, 1937년 강원도 3본산 승려 연합수련소에 입소하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로 오셔서 처음 탄허 스님을 만나셨다는데 그 당시 탄허 스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때 탄허 스님은 선원 대중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3본산 승려 연합수련소의 수련생들에게 강의를 하기 위해 저녁때가 되면 한암 스님께 올라가 원문에 토(吐)를 달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묻고 배운 뒤 이튿날 우리에게 쭉 읽어 주었지요. 그리고 대중들이 듣다가 의심이 나거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한암 스님이 직접 대답해 주었어요. 다시 말하면 탄허 스님이 풀어서 읽어 주면 대중들은 그것을 듣고, 대중 가운데서 모르는 사람이 질문하면 한암 스님이 대답해 주는 방식이었지요. 그때는 책이 귀한 시절이라 목판본 책을 몇 질 구해다가 5, 6명이 빙 둘러앉아서 보았는데 우리는 한문이 서툴러서 강의를 잘 알아듣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법문은 꼭 듣고 싶었지요. 내용을 잘 모른다 해도 자꾸 듣다보면 가끔씩 머리에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때 수련소에서 함께 공부하던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영암 스님도 같이 공부하셨던것으로 아는데 도반 중에서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유점사ㆍ건봉사ㆍ월정사에서 열 명씩 왔으니 대략 서른 명 가량은 되었지요. 고암 스님, 영암 스님, 백양사의 서옹 스님 같은 분들은 우리들보다 위였지요. 그 분들은 저보다 먼저 들어와서 공부를 시작하셨는데, .〈화엄경〉과 이통현의 .〈화엄론〉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책이 없어서 .〈화엄경〉을 구하기 위해 북경과 남경에 연락해서 겨우 10질을 구했지요.

-그러면 한암 스님께서는 탄허 스님이 한문도 잘 하고, 또 중강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시고 어떠한 생각을 하셨을까요? 제가 듣기엔 한암 스님과 탄허 스님은 현토(懸吐) 하는 방법을 두고 하루 종일 논란하신 적도 있다는 말이 있던데요?
그런 때도 있었지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한암 스님은 탄허 스님을 하나 길러낸 셈이지요.

-그때 탄허 스님께 배운 것은 이통현의.〈화엄론〉이외에 무엇이 더 있었습니까?
.〈금강경〉, .〈보조법어〉, .〈육조단경〉을 배웠어요. .〈범망경〉은 내가 상원사로 가기 전부터 시작했는데 그때만 해도 현토(懸吐) 하는 방법이 사람마다 모두 달랐지요. 그래도 한암 스님의 토(吐)가 가장 낫다고 해서 통도사 어느 스님은 한암 스님의 .〈육조단경〉 토(吐)를 그대로 베껴갔어요. 그때 한암 스님이 토(吐)를 달 때 보니, ‘~하고’, ‘~하니’, ‘~하며’로 해야 하는가를 두고 한참 동안이나 고민하잖아요. 그런데 탄허 스님은 전혀 머뭇거림이 없이 그대로 죽 읽어 내려가는 것이에요.
-한암 스님께서는 탄허 스님의 현토(懸吐)하는 것을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탄허 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본래 유가(儒家)에서 한문을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장자 남화경〉 같은 책을 읽어 보니 통 모르겠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불경을 보고 나서 보니 그때야 .〈장자〉라는 책이 눈에 들어오더라는 겁니다. 탄허 스님은 장자를 다 줄줄 외우고 있었지요. 그리고 관응 스님은 일본에 가서 공부를 했는데 .〈유식론〉과 .〈구사론〉은 관응 스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마 지금도 제일일 텐데, .〈장자〉에 대해서도 “내가 이만큼 배웠으니 한국에 가면 내가 제일이지.” 이렇게 생각하였는데 탄허 스님을 만나 보니 대단하더라는 겁니다.
또 역사가 황의돈 선생은 탄허 스님을 보고 말하기를, “집에다 처자를 놔두고 와, 그래 .〈장자 남화경〉을 줄줄 외우고 있어.”라는 말을 하였지요. 한암 스님도 “탄허가 나보다 더 낫다.”라는 말씀을 가끔 했어요. 한암 스님도 수많은 경전을 다 보셨지만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탄허 스님의 유학 선생인 이극종 선생이 상원사에 와서 한암 스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요?
그것은 잘 모르겠고 한암 스님의 부친이 상원사에 오신 적은 있었어요. 한암 스님의 부친께서는 자신의 아들이 도인이 되었다고 하니 월정사에 와서 “내가 한암 도인의 아버지다.” 하였지요. 그리고 상원사로 올라오는 중이었는데 한암 스님이 우연히 문을 열고 보니 당신 아버지가 올라오고 계신단 말야. 그래 버선발로 뛰어나가 땅에서 절을 하였지요. 그리고 딱 하루를 묵고 갔어요.

-요즘도 절에서는 대중들이 울력을 하는데 그때 상원사에서는 한암 스님과 탄허 스님도 직접 울력에 참여하셨습니까?
한암 스님은 울력에는 직접 참석하지 않으셨고, 탄허 스님은 중강을 하는 때라 미리 공부를 해 두어야 하므로 한암 스님께 “저는 울력을 조금 빼 주십시오.” 하면 한암 스님은 “그러면 되나? 그래도 네가 나가서 하는 척이라도 해야지.”라고 말했어요. 그때 기왓장을 져 올리는 울력을 하였는데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옆에 풀이 많잖아요. 그래 그 풀을 우리들이 울력으로 다 깎았어요. 그런데 수좌들이 서툴러서 자꾸 손을 베니 한암 스님이 내려와서는 “왜 무엇 때문에 손을 베는가? 낫과 손을 함께 움직이니 손을 벨 수밖에 없지. 이렇게 풀을 잘 잡고 낫질을 하면 손을 벨 염려가 조금도 없지.” 하고는 시범을 보여주었지요. 말하자면 너무 빨리 끝내려고 하니 손을 벤다는 것이었어요.

-탄허 스님이 바둑을 잘 둔다는 말이 있는데 바둑 두는 것을 혹시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글쎄요, 탄허 스님이 바둑을 잘 둔다는 말은 들었어도 상원사에서 바둑을 두는 것은 보지 못했어요. 당시 총무원장인 이종욱 스님이 정월 초하루가 되면 서울에서 월정사로 내려오셨는데, 그때 탄허스님이 상원사에 계셨지만 세배하러 안 갈 수가 있나요? 세배하러 가면 종욱 스님이 “탄허 스님이 그렇게 바둑을 잘 둔다면서요?” 하고 자꾸 바둑을 한 판 두자고 우기면 탄허 스님은 마지못해 한 번 두곤 했답니다. 그런데 결국 탄허 스님이 이겼다고 그래요. 탄허 스님의 바둑수가 대단히 높아요. 탄허 스님은 “내가 글공부하느라고 바둑을 안 두었지 조금만 노력하면 국수가 될 자신이 있다.”고 했어요. 탄허 스님의 바둑은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배웠는데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를 이겼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한암 스님께서 1941년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에 초청을 받았지만 참가하지는 않았지요? 혹시 여기에 대해서 알고 계신지요. 얘기가 있으면 해 주십시오.
그때 내가 한암 스님 옆에 있었어요. 선학원에서 밤중에 두 사람이 왔는데 한 명은 청담스님이고, 또 한 명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고승법회를 한다고 하니, 한암 스님 하시는 말씀이 “자칭 고승으로 할 수 있는가. 유교법회로 하라.” 했어요.

-범룡 스님께서 상원사에 계실 때 탄허 스님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으면 말씀 좀 해 주십시오.
탄허 스님은 잠을 잘 적에 꼭 겹 자로 된 목침 위에 수건을 올려놓고 주무시는데 한잠 자고 나면 목침 따로 수건 따로 각자가 흩어지지요. 그래서 깨면 다시 그것을 모아서 자곤 하셨어요. 그 목침은 버드나무나 피나무와 같이 말랑말랑한 나무를 손수 깎아서 만들었어요.

-범룡 스님은 상원사를 떠나 각처를 돌아다니시며 참선 수행을 하였는데 그 이후에 다시 상원사에 머무르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한암 스님 돌아가실 때 옆에 있었지요. 그때 나는 상원사 중대에 있었는데 낮 12시가 되면 하루에 한 번씩 노스님의 병문안을 갔어요. 그런데 한 번은 희섭 스님이 산등성이 꼬불꼬불한 데를 반쯤 올라와서 노스님이 돌아가셨다고 소리를 지르기에 나는 속으로 ‘돌아가시면 할 수 없지’ 하면서 내려가 보니 좌복에 앉아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그래서 옆에 있던 가사 장삼을 입혀드리자 옆으로 넘어 가셨거든요. 그래 좌복에 앉은 채로 뒤로 밀었는데 처음에는 고개가 안 넘어 갔지만 조금 있으니 머리가 뒤로 넘어가셨거든요. 그때 마침 김현기라는 사람이 부대의 정훈부장인데 절에 왔다가 그것을 보고 사진을 찍어 부산 가서 총무원에 주어서 한암 스님이 돌아가신 것을 모두 알게 된 것이지요.

-태고사의 명칭을 조계사로 고칠 때 범룡 스님이 그 제안을 하셨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내가 그랬을 거예요. 청담 스님이 비구측 총무원을 주도하고 나가니, 옆에서 자꾸 훈수를 한다고 그러면 복잡해지니 다 못 들어가게 해요. 그때 몸이 아파서 그랬나? 아무튼 그때 조계사로 하자고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명칭을 조계사로 처음 바꿀 때 현판을 탄허 스님이 썼다고 하지요? 탄허 스님의 글씨가 힘이 있고 좋지 않습니까?
물론이지요. 그 간판을 탄허 스님이 썼는데 그것을 글씨가 좋다고 누가 떼어 가 버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정화운동 당시에 소구산 스님과 김지효 스님이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고 할복을 기도하였는데, 그 이후 그 스님들의 별명을 소단지, 김할복이라고 했는데, 그 별명을 탄허 스님이 지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서울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애국사상을 가진 처사님 한 분이 구산스님과 지효스님을 모시고 자기 집에 가서 공양 대접을 하였지요. 그때 탄허 스님하고 나하고 같이 그 공양 대접에 따라갔는데 거기서 그 말을 내가 들었지요. 겨울이었지요.

-정화운동 이후에 탄허 스님이 월정사와 영은사에서 오대산수도원을 개설하였거든요. 이는 승려의 자질 향상을 위해서 시도한 것인데 그 유명한 .〈화엄경합론〉을 번역하였어요. 이는 역경의 대작불사인데 범룡 스님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훌륭한 역경불사였지요. 여담입니다만 .〈화엄경〉 현토에 있어서 한암 스님과 탄허 스님의 토(吐)는 서로 맛이 달라요. 한암 스님도 대단하시지만 탄허 스님도 대단했지요.

-한암 스님은 평소 승려로서 갖추어야 할 5가지 조건 참선·염불·간경·예식·가람수호를 강조하셨는데 이것을 탄허 스님이 고루 배웠다고 볼 수 있습니까? 즉, 한암 스님의 정신이 탄허 스님에게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요?
한암 스님은 계행ㆍ선지(禪旨)ㆍ간경(看經), 글씨까지 고루 있어서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어요. 특히 스님의 편지를 보면 글씨가 깨끗하니 거기에 모든 사람이 탄복하지요. 그런데 탄허 스님이 그분에게서 배웠는데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지요.
-탄허 스님의 한문과 경학실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요즈음 불교계 현실을 보면 탄허 스님처럼 해박한 경전 실력, 한문 능통, 유불선 회통 등의 분야에 정통한 스님을 찾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 정말 보기 힘들어요. 그래서 탄허 스님이 강의한다고 하면 어떤 수좌들은 맨날 장자ㆍ노자ㆍ공자가 나오니 안 간다고 그래요. 나는 그러면.〈화엄경〉을 강의하는 사람은 많은데 장자ㆍ노자ㆍ공자를 누가 아나? 그 셋을 섞어서 하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생각하지요.

-탄허 스님의 일생을 보면 여느 스님하고 다른 점이 매우 많은 것 같아요. 수도원을 열 때에는 비구와 비구니, 나아가서는 재가자들을 같이 공부시킨 점도 그렇지요?
탄허 스님은 한 마디로 안목이 탁 트였다고 말할 수 있지요. 옛날사람 같지 않아요. 한 번은 이런 말을 하였어요. “둔하긴 나같이 둔한 사람이 없고, 알려고 노력하면 나만큼 노력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지요. 그러니 .〈화엄경〉을 번역할 적엔 그저 한잠 정도만 자고 쓰곤 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또한 강의도 쉽게 가르치는 교수법으로 유명하지요. 언제 저렇게 산골에서 교수하는 법을 알았나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어요. 이는 수련소에서 중강을 보면서 숙달되었다고 봐요. 강의할 때 보면 유ㆍ불ㆍ선을 다 갖다 대요. 탄허 스님은 머리상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크잖아요. 그러니 그 안에 좀 많이 들어 있겠어요?

-조계종단 혹은 불교사 속에서 탄허 스님의 위상과 성격을 말씀해 주신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탄허 스님은 한암 스님이 가르쳤으니, 제2의 한암이라고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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