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정각원- 근현대 한국불교(김광식 교수 동국대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 김광식 교수는 … 건국대 대학원을 수료(문학박사)하고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부천대 초빙교수, 만해마을 연구실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동국대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에 몸담고 있으며 저서로는 〈한국 근대불교사 연구〉 〈한국현대불교사연구〉 등 20여 권이 있다.

강점기 불교 일본불교 영향 불가피
부정부패, 비자주적 성향 남아
국가 권력 문제에 전략적 대응 필요

과거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듯, 불교가 미래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살필 때는 반드시 불교 역사를 알아야 한다. 동국대 정각원(원장 법타)은 1월 26일, 2월 2일 2회에 걸쳐 김광식 교수(동국대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를 초청해 ‘근현대 한국불교’를 주제로 법회를 열었다. 김광식 교수는 일제 강점기부터 근현대까지 한국불교의 역사를 정리하며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조계종단과 기타종단이 국가권력 문제에 맞서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강연의 요지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억불숭유정책으로 불교는 산중으로 쫓겨났고 수많은 탄압을 받았다. 때문에 불교는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낙후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식민지 통치 경영에 맞게 한국의 사찰을 억압하기 위해 사찰령(寺刹令)을 제정ㆍ공포했다. 일본은 민족운동의 거점인 사찰을 통제하고 후원을 차단하고 일제가 불교의 발전을 지원한다는 시혜론(施惠論)을 선전하면서 일본불교를 유입하고 관철하고자 했다. 일본불교의 대표적인 관행이 대처승(帶妻僧) 제도로, 우리나라 스님들과 충돌, 저항, 타협이 생겼다. 일제 강점기의 경향을 유형별로 △주류의 흐름 △만당(卍黨)의 흐름 △조선불교 선종(禪宗)의 흐름 △대각교: 백용성, 온건개혁의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주류의 흐름
당시 한국 스님의 80%는 주류의 흐름을 따랐다. 이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일본과 타협하는 성격을 띠었다. 대처승 7천명 중 독신 스님은 200여 명 밖에 안됐다. 또한 일본은 불교종단 및 종단의 설립을 인정하지 하지 않았다. 대부분 스님들은 이를 묵인했지만 스님의 인권과 불교 위상은 일본불교로 인해 조선시대보다는 높아졌고 사찰재산도 보호를 받았다. 때문에 스님들은 일본에 좋은 감정을 갖게 됐고, 자연적으로 대처승을 수용했고, 주류에서는 일본불교를 우호적으로 봤다.

종단을 인정하지 않는 일제는 한국불교를 직접 관리하겠다면서 30본산 연락사무소(1911년)와 30본산 연합사무소(1912년)만 설립하자 주류의 스님들은 자주ㆍ자생적으로 단체를 만들기로 노력했다. 3ㆍ1운동 후 결성된 조선불교청년회, 유신회 등이 그것이다. 주류 세력의 스님들은 불교 사업을 추진하는 법인인 1924년 재단법인 교무원을 설립했고, 1929년 승려대회를 통해 종헌종법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종헌체제를 대처승 스님들이 만들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1935~1937년 중ㆍ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제는 우리 불교를 총알받이와 재산강탈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대표기관 설립을 주문한다. 그러나 반응이 없자,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하는 사찰인 박문사의 일본 스님이 “한국불교를 장악하고 통제하겠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이에 이종욱, 김상호, 만공, 오성월 스님이 본사주지회의를 열고 총본산과 종단을 만들자고 추진해 각황사를 보수해 현재 조계사로 이전하고 1941년 4월 23일 임제 스님의 선 정신을 담은 조선불교 조계종(曹溪宗)을 출범했다. 종정을 만들고 종무총장(지금의 총무원장)을 만들고 종회를 만드는 등 자생적인 종단을 출범 시켰다.

만당의 흐름: 한용운, 진보개혁
일제강점기에는 만해 스님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았다. 만해 스님은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 〈유심〉을 통해 계몽을 선도하고 수양을 하자는 운동을 일으켰고 1920년에는 청년회, 유신회, 사찰령철폐 운동을 펼쳤다. 만해 스님은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총재 자리를 맡아 1929년 승려대회를 주도해 종헌체제를 만들고 불교 자주화를 추진했다. 1930년 5월에 만해 스님을 따르던 추종세력의 핵심인 스님 20여 명이 비밀결사조직인 만당(卍黨)을 만들었다. 이들은 △정교분립 △교정확립 △불교대중화를 강령으로 대중불교, 도회지 불교를 내세워 청년ㆍ민중운동 활동을 했다. 그러다 1934년 만당이 노출되고 내분이 일어나면서 수많은 당원들이 일제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조선불교 선종의 흐름: 선학원 수좌
당시 스님들은 일본 불교의 유입으로 전통불교가 변질되고, 계율풍토가 이완돼 선풍이 후퇴됐다는 자각을 했다. 전국 2000~3000개의 모든 사찰이 총독부 통제아래에 있으니 민족적 자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사찰령 체제와 조선총독부과 무관한 절을 만들기로 하고 선학원(禪學院)을 설립했다.
1921년 만공, 오성월, 백용성 스님 등이 주축이 돼 선방 수좌 스님들이 상부상조할 수 있도록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를 만들었으며, 적음 스님이 1931년 불사금을 기부해 선학원을 재건하고 잡지를 발간하고 부녀자들도 참선에 동참케 하는 등 불교 대중화를 추진했다.

이후 1934년 재단법인인 조선불교 선리참구원(禪理參究院)을 만들어 재정을 확립하고 이듬해 3월 일본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불교포교를 위해 조선불교 선종(禪宗)을 만들었다. 스스로 종규와 종무원 및 종정을 세웠고, 방한암 스님, 만공 스님 등이 종정으로 추대됐다. 1941년 선학원 고승 40여 명이 모여 계율을 진작하고 조계종 정신을 계승하자는 차원에서 박한영, 하동산, 자운, 청담, 금오, 운허 스님 등이 주도해 10일 동안 ‘유교법회(遺敎法會)’를 열었다. 일본은 이러한 선학원을 암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당시 일제의 태평양전쟁으로인해 군수물자를 바치고 창씨개명을 하는 등 엄혹한 시절, 스님들이 자생적으로 법회를 열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대각교; 백용성 온건개혁
백용성 스님은 1911년 전라도에서 깨달음을 얻고 상경했다. 만해 스님과 인사동 포교당에서 일제 저항운동을 하면서 선포교, 임제종 운동을 했다.
1915년에는 일본의 계속되는 압력으로 백용성 스님은 독자노선을 택했고, 임제파강구소, 선종포교당 등을 만들어 포교활동을 했다. 그러다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하고 민족대표 33인으로서 3ㆍ1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이유로 2~3년간 구금당했다. 이때 백용성 스님은 천주교, 개신교 신자가 성경 한권으로 기도ㆍ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용성 스님은 세납 60대 일 때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해 대중들에 알려야겠다는 발심했다.

용성 스님은 수좌 스님들의 동의를 받아 조선총독부에 대처승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여러 번 내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종단을 탈퇴하고 1927년 대각교 선언을 한 후 대처승, 승려대처식육 폐지 건백서를 발표했다. 당시 65세라는 나이는 최고령자로 인식됐다.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용성 스님은 불교경전을 번역하고 연변에 과수원에 농사를 짓고 포교당을 세우고 빈민교육에 앞장섰다.
일제 강점기의 불교는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불행하고 모순이 많은 시절이었다. 불교가 정권과 국가에 예속돼 눈치를 보고 조선총독부에 얽매이고 지하에서 로비 등이 오가면서 세속화되고 부정부패화 됐다. 현재까지도 이런 문제가 남아있다.

현대불교
해방 후 한국불교는 국가권력과의 대응이 불교의 변화와 발전 등에 중요한 변수였다. 삼국ㆍ고려ㆍ조선 등 전근대에는 불교가 유일한 종교였으나, 근대에 들어 천주교, 개신교가 유입됐고, 해방후 일제가 추방되고 미군정이 시행되면서 개신교가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국가(권력)를 누가 담당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정체성ㆍ운영ㆍ종교정책 등이 다르게 전개됐다.
이는 자연적으로 불교계의 성쇠, 발전, 퇴보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됐다. 현대불교는 △해방공간(1945~1950) △불교정화 공간(1954~1962) △산업화ㆍ민주화(1964~1993) △1987년 민주화 본격화, 1990년대 이후로 나눌 수 있다.

해방공간
미군정 체제에서는 일제하의 불교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대처승이 주류를 이루었다. 교단 집행부와 재야 혁신단체 사이에 ‘대처승은 법사로, 청정비구ㆍ수행승으로 스님을 모셔야 한다’면서 치열한 갈등ㆍ대립을 겪었다. 또한 불교가 산과 논밭 등 사유재산이 많았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1949ㆍ50년 농지개혁을 실시해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했다. 당시 전국의 1000여 개의 일본사찰중 남한에 있던 590개의 적산사찰(일본이 소유하던 사찰)은 미군정에 의해서 모두 개신교와 친일세력에 제공됐다.

이후 스님들은 사찰령을 철폐하고 자주적으로 종단을 운영할 수 있도록 미군정에 건의를 했으나 거절당했다. 차별적 대우가 시작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 공무원 60%가 기독교였고 불교는 5%도 채 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개신교였으나 모친이 불교신자였기 때문에 불교적인 마인드가 있었다. 불교정화운동도 지지하고 농지개혁으로 토지를 잃은 스님들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해 사찰 주위 2㎞이내에 있는 농지와 문화재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한계는 불교 존립을 국가권력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구현한 친기독교 정책(크리스마스 공휴일)과 개신교 성장에는 무감각 했다는 것이다.

불교정화 공간(1954~1962); 8년 현대불교의 정체성, 노선; 결정된 시기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을 떠나라는 내용의 정화유시를 발표했다. 이 유시에 힘을 얻은 독신비구승들은 1954년 7월 6일 종명을 ‘불교조계종’으로 하는 종헌을 제정하고 새로운 종헌을 채택했다. 그 주된 내용은 종조를 보조 국사로 하고 승단은 비구승단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당시 대통령의 유시와 새로운 종헌은 비구승들이 대처승으로부터 종권을 이양 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였다. 게다가 비구승들은 이러한 법적 근거 이외에도 두 차례의 전국비구승대회(1954년 8월 24일과 9월 27일)를 개최해 다시 한 번 종단 내적 합법화를 꾀하는 동시에 정당화와 세력화를 시도했다.
이후 4.19와 5.16사태 등으로 불교정화운동이 진통을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비구승과 대처승이 합의를 보고 1962년 4월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새출발 했다. 정화운동으로 불교는 내분과 싸움을 일으키는 이미지를 만들었고 기독교는 원조에 힘입어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산업화, 민주화 공간
박정희 정권 때부터 불교가 서서히 성장했다. 이 당시 군인들이 정치를 많이 했는데 이 사람들 대부분이 농촌출신에 불교신자였다. 불교의 입지가 점점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 1975년에는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되고 군승제도가 도입됐다.

지속적으로 불교와 국가는 우호적 관계를 맺다가 1980년 10월 27일 법난이 일어났다. 군부정권이 정권 유지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교를 희생양으로 삼고 불교의 문제점이었던 부정부패 등을 척결해 사회정화를 한다는 차원에서 발생했다. 군인들이 법당에 침입해 간첩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많은 스님들을 고문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불교가 각성을 하고 민족불교, 호국불교대신 민중불교를 주창하고 불교와 국가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고민이 생기면서 실천승가회, 민중불교연합 등 수많은 단체들이 등장했다. 1986년 9월 7일 해인사 승려대회가 열려 스님 2000여 명이 모여 지난 5~6년간 불교ㆍ국가관계를 개편하고 법난 진상을 밝히기 위한 운동이 열렸다. 이 사건이 당시 스님들이 각성하고 현 정권에 눈을 뜨게 한 사건이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발단이 1994년 종단개혁을 불러오고 2008년 종교편향 서울시청 범불교도대회를 가져왔다.

최근 조계종이 템플스테이를 2002년부터 시행하면서 불교가 비약적 성장을 했다. 종교와 무관한 일반인, 외국인에게 불교의 친화적 이미지를 심어줬다.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국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추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있고 종교간 경쟁 및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때문에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조계종단과 기타종단이 국가권력 문제에 맞서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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