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와 소치 해후 시기 정정해야

“몸을 벗어나면 본래 장애 없는 것”

 

▲ 추사와 소치의 해후 시기를 밝힌 단서 〈벽해타운첩〉
장동으로 추사를 찾았던 소치의 인연은 초의로부터 이어진 것으로, 이 기연(奇緣)은 소치의 일생에 가장 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이로 인해 추사의 슬하에서 화품(畵品)을 논평하는 고견을 듣는 일 외에도 절세(絶世)의 기품을 지닌 서화를 일람할 수 있게 된 소치의 탁마 이력은 천출로 타고난 그의 예술성을 한층 일신(日新)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스승에서 안목을 높일 일견(一見)을 듣는 것보다 새해에 고향을 찾는 일이 더 다급했던 소치의 소탈한 속내는 1839년 정월 9일에 쓴 추사의 편지에 여실히 드러난다.

間從秀奭付 今已經年 團蒲爐火 迎新吉祥 遠念方切 卽接禪函 雖臘前出作 年後慰沃 第一信息尤庸開懷 此逢新 頑忍依舊宛轉 無足遠聞 許君迫歲告歸 不能挽住 單寒行色 其能利涉否 多少示意是世諦也 何用如是區區也 脫落形骸 本無?碍 屠刀糞擔 俱不必作拖泥帶水耳 腕痛方?橫斜無定 不得長皇 惟再圖一飄然而已 都留不一一 己亥 元九心沖

그 사이, 수석에게 편지를 부친 지도 이제 벌써 한 해가 지났습니다. (그대는)좌포에 앉아 수행하며 차를 즐기리니 새해를 맞아 길상여의(吉祥如意)하시길 빕니다. 멀리에서 마음만 간절했는데 곧 그대의 편지를 받았으니 비록 섣달 전에 써 보낸 것이지만 한 해가 지난 후에 받았는데도 마음이 흐뭇합니다. 새해 첫 편지라 더욱 마음을 열게 합니다. 새해를 맞아 모질고도 질긴 나는 옛날처럼 지내고 있습니다만 멀리까지 들려 줄만한 것이 없습니다. 허 소치가 새해에 작별하고 고향에 돌아가기에 다급해하지만 만류할 수 없었습니다. 쓸쓸한 행색으로 잘 갔는지요. 다소 들어낸 뜻은 세간의 이치(世諦)입니다만 어찌 이리 구구합니까. 형해(形骸:몸)를 벗어나면 본래 장애가 없는 것이니 칼을 잡고 짐승을 잡든 똥 짐을 지든 모두 다 반드시 (일을) 시원시원하게 처리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팔이 아파서 글자 획이 빗나가 기준이 없으므로, 장황이 쓸 수 없군요. 다시 오시기를 계획하시어 지팡이 하나로 표연히 달려오십시오. 모두 뒤로 미루고 일일이 쓰지 않겠습니다.己亥(1839)년 정월 9일 심륵충

이 편지는 〈완당전집〉〈여초의〉14신과 최근 발굴된 〈벽해타운첩〉에서 함께 수록된 것이다. 기해(1839)년 정월 9일에 쓴 것이란 단서는 〈벽해타운첩〉을 통해 비로소 밝혀진 셈이다. 특히 이 편지에 “허 소치가 새해에 작별하고 고향에 돌아가기에 다급해하지만 만류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한 대목은 그의 일시적인 귀향의 시기를 밝힌 단서이다. 실제 학계에 알려진 내용(1839년 겨울)과 이 편지의 내용(1839년 정월)과는 차이를 보인다. 지금까지 소치 연구의 핵심 자료는 〈몽연록(夢緣錄)〉이었다. 이 책은 소치가 진도로 귀향하여 1867년경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며, 저술 장소는 진도의 운림각(雲林閣)이다.

그가 〈몽연록(夢緣錄)〉서문에서 “황량한 곳에서 홀로 슬퍼하며 서책을 버리고 모든 것을 잊어 버렸다. 뜻밖에 손님이 찾아와 다정하게 며칠을 쉬는 동안 문답한 것이 있어 이것을 엮어 〈몽연록〉이라 불렀다”라고 했다. 서술 배경은 손님이 찾아와 문답한 것을 엮었다는 그의 증언이 있고 보면 이 책은 소치의 회고록임이 분명하다. 후일 서명을 〈몽연록〉에서 〈소치실록〉으로, 다시 〈소치실기〉로 정정했다. 특히 이 책의 서술의 형식이 초의의 〈선문사변만어〉와 동일한 구성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초의의 열반 이듬해에 저술된 〈몽연록〉은 소치의 의지처였던 두 스승과의 인연과 자신의 삶을 반추하려했던 것이라고 여겨지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이 편지는 소치와 추사의 해후 시기가 지금까지 알려진 1839년이 아니라 1838년으로, 정정해야하는 근거 자료이다. 이 외에도 그가 장동을 찾았을 때 추사가 상중(喪中)이었다는 증언은 추사가 양자이기에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던 전후 사정과 일치한다. 따라서 〈몽연록〉에 기해(1839)년에 추사와의 만났다는 소치의 회고는 착오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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