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미술의 주인공은?

부처님, 인간과 신 경계 초월
공덕과 자비상징… 대승철학 표현

“삼세의 부처님 지켜보고 있다
수행자들이여 두렵지 않은가”


▲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65호 갑사소조삼세불. 중앙에 석가모니불, 우측에는 아미타불, 좌측에는 약사여래가 있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4대 협시보살이 봉안됐다. 이 같이 수많은 부처가 있는 것은 부처의 자비 공덕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 항상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몇 년 전 기독교 계통의 대학연구소에서 몇 차례 사찰 건축에 대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대학의 채플관이 독특하게 원형으로 디자인되어 있어 함께 공부했던 건축과 교수와 그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그 분은 이 독특한 설계에 대해 처음에는 여러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반발했지만, 후에 교회 건축양식으로 알려진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고딕양식이 모두 로마의 건축양식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으로 그 반발을 누그러뜨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 교회 건축양식이 로마 건축에서 발전한 것이라는 그 분의 설명에 수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직적인 상승을 강조하는 기존의 교회건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수평적인 원형 구조가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무엇보다도 원형의 공간 구성 방식은 유일신을 정점으로 하여 모든 존재의 위계질서가 정해지는 기독교 신학과 잘 맞지 않는다. 원형은 내부의 모든 공간을 균질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어떤 한 지점도 특권적인 장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원형 건물로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과 판테온이 있지만,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의 세속성은 물론이고 판테온 역시 지금은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 로마의 신들을 위한 만신전이었으니, 기독교인들에게 원형이 이교도의 건축양식으로 각인된 데에는 그만한 역사적인 이유가 있는 셈이다.

1980년대 이후 불교계에서 대불(大佛)뿐 아니라 천불(千佛), 삼천불, 만불(萬佛)을 조성하는 대형불사가 성행했다. 개인적으로 대형불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천불’과 ‘만불’은 그 개념만 두고 생각해본다면 불교만의 독특한 개념이 아닌가 싶다.

오직 하나의 신을 말하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는 천 명의 신, 만 명의 절대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천 분, 만 분, 나아가 ‘천백억 석가모니불’이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다수의 절대자라는 표현에 대해 신성모독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불교에서 부처님의 복수성은 신성모독이 아니라 그 탁월함의 또 다른 표현으로 간주된다.

또한 부처님은 제각각의 이름과 역할, 능력과 위상에서 차이가 있는 로마의 신들과도 다르다. 로마의 신들은 천계에 살면서 인간보다 힘도 더 세고 장수를 누리지만, 그들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있다. 하지만 로마의 최고신인 주피터는 아래 등급의 신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심지어 아내 헤라의 여신에게도 늘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신세다.

그들이 관장하는 영역도 제한적이어서 하늘의 신인 주피터는 바다의 신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바다의 신은 땅의 신을 어쩌지 못한다. 술과 음악의 신인 바쿠스는 하루도 멀쩡한 날이 없다.

이와 달리, 부처님은 신도 아니며 인간도 아닌, 인간과 신의 경계를 초월한 존재이다. 그러나 사실 ‘존재’라는 말도 맞지 않다. 무상정등각을 이룬 이는 모두 여래이며 응공이며 정변지이며 세존이다. 과거와 현재의 무수한 존재들이 그렇게 부처님이 되었고 미래에 존재하게 될 중생들도 그렇게 부처님이 될 것이다. 또한 동방과 서방, 남방과 북방, 그 어느 곳에 거주하느냐와 관계없이 모두 부처가 된다.

그러므로 우주는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이 존재하며 동서남북 사유상하에 부처님이 존재한다. 이름이 서로 다른 수많은 부처님이 있으며, 동일한 이름을 가진 부처님도 무수히 많다.

그 부처님들은 서로가 서로를 증명한다. 천 분의 부처님이든, 만 분의 부처님이든,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상스님은 <법성게>에서 이처럼 하나가 여럿이 되고 여럿이 하나가 되는 제불의 경계를 노래하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법화경의 설주인 석가모니불도, 화엄경의 회주인 비로자나 부처님도 홀로 등장하는 법이 없다. 수많은 불보살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출현한다. 그러나 이들 불보살은 단순한 배경인물에 그치지 않고 주존불과 협시불이 서로 조응하고 증명하는 가운데 중중무진의 법계를 완성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다. 이렇듯 불교미술의 주인공은 부처님 한 분만이 아니다.

불상 조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찰 규모가 제법 큰 사찰 가운데 대웅전에 부처님 한 분만 모셔놓은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러나 조각은 그 조성의 어려움이나 공간적 문제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천불이나 만불보다 더 적은 수의 불상이 선호되었다.

그래서 가장 많이 조성되는 형식은 중앙의 주존불과 좌우의 협시불, 또는 협시보살로 이루어지는 삼존불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또는 지장보살의 조합이 있으며,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여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보살로 두는 형식이 있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는 경우, 충남 서산의 마애삼존불과 같이 인도에서 유행했던 미륵보살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보살로 두는 경우도 가끔 보인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주존불 외에 좌우의 협시보살을 두었을까? 주존불만으로 부족했던 것일까? 이 형식은 너무 흔해서 간과하기 쉽지만 다른 종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불교만의 독자적인 성상 배치형식이다. 그 바탕에는 대승불교의 독창적이며 심원한 철학이 있다.

아미타 삼존상의 경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지장보살은 아미타불이 원력으로 건설한 극락세계로 중생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실현하기 위한 존재들이지만, 그 자체 아미타불의 자비와 구제력을 표상한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이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지혜와 원행(行願)을 상징한다. 미륵보살의 경우, 미래의 중생구제를 표시하는 것이니까 이 모든 보살들은 부처님의 중생구제의 원력을 더욱 구체적으로 현시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협시보살들은 본존불의 보조자가 아니라 본존불 그 자체이며 본존불을 비추는 거울이다.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이 이들의 협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능력이 부족하거나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들은 체(體)이며 영원한 현재이며 ‘예부터 변치 않는 본질’이기 때문에 근본의 위치인 정중앙에서 부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주존불이 방사하는 빛에 의해서 비로소 협시보살들은 주존불을 비추고 모든 존재들을 비추게 된다. 그러므로 삼존불은 전체와 부분, 중심과 주변, 그리고 체와 용이 서로 의지하면서 삼투하는 법계의 조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세 분의 부처님이 나란히 배치되는 삼세불과 삼신불이 있다. 삼세불이란 현세의 부처님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석가모니불에게 장차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준 연등불(燃燈佛)과 석가모니불 열반 이후에 출현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좌우에 두는 형식을 말한다. 경우에 따라서 갈라보살(竭羅菩薩)과 미륵보살을 두기도 한다. 삼세불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도 부처님이 계셨고 그 후에도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는다. 과거불은 과거에 존재했다가 사라져버린 부처님일까? 또는 열반 후 부처님은 부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일까? 정말 그렇다면 과거불인 다보불이 현재 부처님인 석가모니불의 법회를 증명하기 위해 출현하는 <법화경>의 상황은 도대체 가능한 것일까? 또한 현재의 마음도 없고 과거의 마음도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없다는 <금강경>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근본적으로 부처에게는 시간이라는 차원이 없다. 부처님이 반열반에 든 것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라짐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부처는 시간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삼세의 부처님도 다 허망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삼세불이 이야기하려는 낙처는 다른 곳에 있다.

연등불은 전생의 석가모니불에게 수기를 준 인물이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살로 있을 때 얼마나 많은 공덕을 쌓았는지, 얼마나 치열하게 수행했는지 그 현장을 지켜보았던 분이다. 용수가 말했듯이 부처님의 몸은 무한한 과거 생을 통하여 자비로운 행위의 결과이다. 연등불은 부처님의 현재의 몸이 그 공덕과 자비의 결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석가모니 부처님 옆에 계신 것이다. 과거에 이미 수기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륵불은 그 공덕과 자비의 무한함을 보여준다. 미래가 오더라도,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도 부처님은 변치 않고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의 몸이라는 사실을 석가모니불의 또 다른 분신인 미륵불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의 길은 자비의 길이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길이다. 과거의 연등부처님이 석가모니불의 공덕과 자비를 증명하였듯이 지금 모든 부처님이 지켜보고 있다. 오늘 우리가 행하고 있는 공덕과 자비를. 두렵지 않은가, 수행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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