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선우- 불교의 윤리는 무엇인가?-법인 스님 (조계종교육원 교육부장 )

▲ 법인 스님은 … 중앙승가대를 졸업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수련회로 오늘의 템플스테이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조계종 교육원 교육부장을 맡고 있다.
“지혜의 통찰력 없이 윤리적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죠. 노숙자에게 밥을 주는 것이 선행과 자비라면 노숙자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법인 스님은 2월 2일 장충동 우리함께빌딩에서 열린 우리는선우 법석에서 불교의 윤리관은 옳고 그름을 인정하되 이를 잘 구분해 선한 방향을 따라갈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80년 광주서 깨달음에 ‘회의’

세상사에 옳고 그름 항상 존재

부처님도 선악은 분명하게 판별해

자비심은 악을 소멸시키는 처방전

 오늘 주제는 ‘불교의 윤리는 무엇인가’입니다. 불교의 윤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의 도리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과 부처님 가르침은 다르지 않습니다. 좀 무거운 이야긴데 제 경험부터 먼저 얘기해 보겠습니다. 1980년도 5월에 저는 광주에 있었습니다. 당시 사미승이었던 저는 스승을 따라 광주도청 희생자들 앞에서 염불을 했습니다. 가족들이 정말 엄청나게 울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때 제가 왜 염불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가족들이 희생자들의 죽음을 잊으라고 망각하라고 염불하고 기도하나? 참혹하게 사람들을 죽인 학살자들을 용서하라고 염불하나?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에 마음을 접고 극락세계가라고 기도를 하는 건가?”

아무튼 열아홉 나이에 알 수 없는 의문과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때 수행자 종교인이 참 무력하게 느껴졌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으면 이렇게 불행한 세상을 그냥 놓아두어도 되는 것일까? 사후에 있다는 극락세계는 삶의 희망이고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저는 다시한번 깨닫고 나면 어떤 변화가 있으며 중생을 위한다는 이타보살이라는 게 무엇일까 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바른가 이런 생각을 다시한번 말해보죠. 예전에 이런 광고 카피가 있었습니다. ‘징기스칸 그에게 열정이 없었다면 한낱 양치기 소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 광고 문구에 대해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징기스칸 혹은 나폴레옹이 정말 영웅이기만 할까요?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징기스칸과 나폴레옹이 영웅인가부터 근본적으로 성찰을 해봐야 합니다. 만약 지금 전쟁이 일어났다면 여러분에게 이 전쟁은 옳은 겁니까? 내 일이냐 아니냐에 따라 인간의 도리가 갈라지는 겁니다. 그 무지막지한 전쟁 속에서 그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했을까요, 누가 총칼로 통일을 해달라고 했나요? 그 정복 전쟁으로 인류에게 어떤 진보가 있었을까요?

‘한낱 양치기 소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구절도 생각해봅시다. 그럼 택시기사도 공장 노동자도 ‘한낱’에 지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카피 문구들이 사람들에게 공감과 설득을 주고 아무런 판단도 못하게 한다면 우리 삶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는 겁니다. 전도몽상 돼 있는 거죠.

징기스칸과 나폴레옹의 전쟁, 또 80년 5월의 광주. 기본적으로 여기서는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종교적인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과 동일한 말입니다. 종교라 하면서 종교가 사회와 역사 속에서 아주 특별한 것이 되어서는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보편적인 것을 떠나서 또한 인간 사회를 떠나서 특별한 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죽임을 두려워한다. 이를 견주어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 이것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경전 구절입니다.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 합니다. 맞으면 아프죠. 불교라는 종교는 너무 거창할 필요도 없고 너무 많이 알 필요도 없고 크게 알 필요도 없습니다. 남을 때리거나 죽이거나 억압하거나 차별하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거죠. 인간이 해야할 마땅한 행동이죠. 이런 게 아주 중요합니다.

제가 오전에 태화산 전통불교문화원에서 행자 교육을 시켰는데요 그 첫 번째 주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뚫고 수행하자’라고 했습니다. 세속을 떠나버리자가 아니고 말입니다. ‘인간이 가져야 할 보편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자. 성불도 중생제도 이런 거창한 걸 버리고 인간이 가져야할 보편적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남을 속이지 않는 것, 정직함 이런 걸 가지라’고 말합니다. 남을 속이면 그 피해는 상대에게 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불행하고 힘들게 됩니다. 사람이 해야할 도리가 아니죠. 정직함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불교적인 정직함은 여기에 하나가 더해집니다. ‘자기자신을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인정해라’ 내가 질투하고 있구나, 꾸미고 있구나…이렇게 자신을 인정하면 성찰하는 것을 덧붙일 수 있죠. 그 다음이 성실함 책임감 이런 것입니다. 출가 수행자는 겸손과 친절이 필요합니다. 출가 수행자 성불 깨달음에 짓눌려서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정직 성실 인욕 배려, 더불어 살겠다는 공동체 의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의 전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옳고 그른 것, 아름답고 추한 것, 어떤 것이 선이고 악행일까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29년 동안 했습니다. 부처님은 계급제도를 부정했고 전쟁을 말리셨습니다. 모든 생명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으며 모든 생명은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계급이 생겨나면 모든 생명은 억압하고 억압 받는 자가 생깁니다. 자 그럼 해탈 열반 자유 평화 행복 이런 것이 종교적 선언으로만 끝나야 하는 건가요? 지금 이 자리에서 구현돼야 할 것인가요? 그러면 참선한다고 이것이 해결 될까요?

연못에 돌을 딱 던져 놓고 떠올라라 하면 떠올라지나요? 그리고 돌이 떠오른다고 삶이 달라질까요? 내 삶에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도는 물 깃고 나무하고 잠자고 이렇게 평범함 속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을 해요. 이렇게 살면 생의 기적이고 최고의 신비 이걸 신통력이라고 하는 거지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왜 불교인들은 옳고 그름 정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까? 진선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게 곰곰이 생각해보니 불교교리를 잘못 해석하고 있었고 저 또한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선종에 모든 법은 공하니까 아름다움도 본래 없고 추함도 본래 없고 악도 본래 없다고 말합니다. 선도 공하고 악도 공하고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하면 교리 해석을 잘못한 겁니다.

보통 우리는 쓰레기장은 싫어하고 꽃밭은 좋아하죠. 그런데 쓰레기장은 원래 있었습니까, 만들어진 겁니까? 쓰레기 던지니 쓰레기장이 되고 꽃을 심으면 꽃밭이 됩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모든 존재는 만들어진 겁니다.

여러분이 웃으면 웃는 사람, 불친절하면 불친절한 사람, 제가 꽃을 들고 있으면 꽃을 든 스님이 되죠. 선과 악이 없다는 측면을 놓고 설명하는데 교리를 잘못 받아들여서 현실적으로 만들어진 선과 악은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선과 악은 현실적으로 있지 않습니까? 사회에 아주 착한 사람 살인자 정직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요. 그런데 이것이 태생적으로 있는 겁니까? 환경적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이 사회에 선과 악이 있고 정의 불의가 차별이 있는 걸 인정하되 인간의 탐욕과 무지 등 온갖 어려운 것이 생겨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도 악과 선을 분명하게 판별하고 선한 것을 가까이 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악을 소멸하라고 말씀하시죠. 이런 걸 잘못 해석해 인간을 불신하면 안 됩니다. 악한 사람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니 미움 갖지 말고 자비심으로 악을 소멸시키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라는 뜻입니다. 모든 게 본래 있지 않으니 내게 있는 단점 이런 것들을 소멸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정진해 노력하자 이렇게 ‘공’을 해석하십시오.

‘무상’도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이 많죠. 무상이라는 말 모든 것은 계속 변해간다는 뜻입니다. 모든 걸 무상하다고 했을 때 노력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집착하지 말고 가치 있는 걸 선택해서 잘 살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나요? 서로가 도우면서 살라고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만 살자고 하면 인간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연기의 이치를 제대로 알았을 때 거기서 주는 가치를 알 수 있어요. 내가 웃으면 상대방도 웃어요. 이를 삶에 적용시켜보세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 말은 이것의 중심이 내가 아닙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을 이해한다면 세상이 바뀌어야 내가 바뀐다는 말도 알아야 합니다. 악법이 있는데 그게 안 바뀌는데 내가 바뀔 수 있나요? 우리가 또다시 강대국에서 식민지가 된다면 식민지 환경 속에서 우리가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나요? 요즘 대학생들 등록금 문제, 취업로 어려운데 이런 현실 속에서 내 마음 청정하면 한 세상 바뀌어지나요? 현실적 고통은 자기 마음보다는 사회 구조적 환경에서 더 많이 오게 돼 있습니다. 연기의 쌍방소통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참으라고 했으니 그냥 참자 이렇게 마음먹고 내 마음만 다 깨끗하면 이 세상이 다 깨끗해질 수 있다고 왜곡시키지 마십시오.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윤리적으로 사는 것은 자비와 선행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현명함 지혜 똑똑함이 있어야 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공동체 이루고 사는데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지혜의 통찰력 없이 윤리적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죠. 노숙자에게 밥을 주는 것이 선행과 자비라면 노숙자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회 속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요소, 불행하게 하는 요소 인과관계가 무엇인지 통찰하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 바탕 안에서 자비와 선행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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