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생태여성주의와 여성성의 사회

여성들 환경운동…모성애 기반둬
인도 벌목저지운동 여성들 주동
여성과 어린이 환경파괴에 피해 더 커
생태여성주의 핵심은 여성 가치 존중


▲ 지율 스님은 한국환경운동사를 새로 쓴 인물로 평가 받는다. 스님이 주도한 소송은 동물의 법적 지위에 대한 첫 소송이었고, 죽음 직전까지 멈추지 않았던 단식 시위는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前 18대 대통령 후보까지 찾아오게 했다.
생명을 지키는 여성들
“내원사 선방에 왔다가 산에 올라갔는데 포크레인으로 바위를 부수고 길을 내는 현장을 봤지요. 그게 얼마나 섬뜩하고 잔인하게 보이던지 저는 폭행당하는 여자가 생각났어요. 구타당하는 어린이를 보거나 강간당하는 여성을 보고 그냥 지나쳤을 때의 그런 심정을 느꼈어요. 그래서 무관심하게 살아왔던 벌이다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제 대답을 산을 통해서 한 것 같아요.”

고속철도를 위한 터널 공사의 포크레인 굉음을 듣고 산의 울음소리를 듣고 벼락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는 지율스님의 이야기이다.

1973년 갠지즈 평야지방에 테니스라켓 제조회사인 사이몬사가 호두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벌채하기 위해 산간마을인 고페쉬왈에 벌목인부를 보냈다. 이때 그 지역의 여성들이 주동이 되어 벌목대상이 된 나무를 감싸안고 “나무를 베려면 나의 등에 도끼질을 하라”고 소리치면서 시위를 벌여 벌목을 저지시켰다. 마을버스 매표원이었던 찬디 프라사드 밧트가 주도하여 힌디어로 “나무껴안기”라는 의미의 “칩코운동”(Chipco Andolan)운동이 벌어진 이 운동은 인도 전역에 벌목저지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왕가리 마타이는 식민지배를 한 영국인처럼 케냐 정부도 나무와 숲을 베어 차나 커피를 심어 부유한 나라에 팔아 돈을 벌지만, 야생동물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여전히 굶주림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숲을 파괴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수차례 투옥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숲을 살리기 위해 그린벨트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여 3천만그루의 나무를 심어 2004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환경운동의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위와 같이 여성들의 자연과 특유의 교감능력을 바탕으로 한 운동은 여느 환경운동과는 확실히 다른 동기와 전개의 양상을 띄고 있다. 모두 자연에 대한 모성적 자비심이 기반이 되고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여성은 생태적 위기의 가장 큰 희생자
1991년 대구의 페놀오염사건은 다수의 주부들로 하여금 기형아출산의 공포로 인해 자연유산과 낙태를 하게 했고, 실제 페놀이 섞인 수돗물을 먹은 임산부가 반신불수가 되고 기형아를 출산하기도 했다. 또한 울진, 월성 등 핵발전소의 근무하는 노동자의 부인들과 골프장의 캐디들이 유산을 경험하거나 기형아를 출산한 사례가 나왔다.

최근 여성들의 모유내에 PCBs나 다이옥신과 같은 독성물질의 함양이 높아지고 유산, 조기 폐경 등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실제 기형아 출산율도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여성, 저소득층, 원주민, 소수민족등 약자들이 대체로 환경문제로 인한 질병의 피해를 입게된다.

실제로 임신, 출산, 육아, 수유를 전담하는 여성들은, 남성과는 달리 물, 식품, 공기등 환경적 영향이 곧바로 태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만큼 자연변화에 민감할 수 밖에 없으며, 여성과 어린이가 환경파괴에 방사능, 살충제, 독극물등 기타 오염원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그러한 이유로 환경운동이 여성과 주부들에겐 직접적으로 관계된 실천운동이 될 수 밖에 없다.

과거 봉건사회에서는 왕이 국민을 ‘지배’했고, 귀족이 노예나 농노를, 양반이 상놈을 ‘지배’하는 수직적 사회였다. 위가 있고 아래가 있으며, 우월한 것이 있고 열등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월한 것은 열등한 것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이렇게 ‘지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사회가 바로 가부장적 사회이며, 그러한 지배를 중심으로 생각해온 것이 바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게 만든 것이며,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 사회였던 것이다. 따라서 가부장적 사회는 곧 생태위기와 여성차별의 동일한 원인제공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이 지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의 세계를 필요로 한다. 문화-자연, 정신-육체, 이성-감성, 보편-특수, 인간-자연, 문명-원시, 공-사, 주체-객체, 자아-타자 등 둘로 구분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대체로 어느 한쪽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유색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 식민지국가의 제국주의 지배로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의 세계는 분리할 수 없는데도 그것을 둘로 분리하여 지배와 종속관계를 만들고 그 사이에 대립과 갈등, 투쟁을 당연한 자연의 질서라고 몰아가며 오랜기간 문화를 만들어온 것이 바로 가부장제사회의 특징이다. 이러한 사회의 특징은 ‘차이’가 있으면 그것들 간에 우열을 만들어 ‘차별’을 만드는 사회이다.

이러한 가부장적사회의 극단적으로 정치행위가 바로 전쟁이다. 전쟁은 역시 여성과 약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된다. 이렇게 볼때 여성운동은 곧 환경운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나아가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과도 분리될 수 없다.

▲ 지율 스님이 주도한 천성산 도롱뇽 살리기 운동은 한국불교에 환경이라는 화두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사진은 2003년 비구니 스님들이 지율 스님 단식 회향에 맞춰 가두 시위를 하는 모습.
여성운동서 한발 나아가는 ‘Eco Feminism’
여성의 참정권이 생긴 것은 불과 100년이 안되었다. 자유의 국가인 프랑스만해도 1946년에야 참정권이 인정되었고 우리나라는 48년에 인정되었다. 아직도 뿌리깊은 가부장적인 차별과 관습들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여성이 경제력을 갖게 되면서,

또한 힘과 근육을 중심으로 한 노동이 간편한 기계조작과 컴퓨터를 사용하는 서비스노동으로 바뀌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한 높아졌다.

여성운동은 5-60년대를 거치면서 대단히 활성화되었다. 참정권운동부터 여권신장을 위한 법적 차별철폐를 위한 우먼리브(Women's liberation)운동, 남녀가 실질적인 평등을 지향하는 여성운동(Feminism)이 오랜기간 동안 전개되어왔다. 그러나 이들 여성운동은 생태주의사상과 결함되면서 기존의 여성운동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가부장적사회에서 평등이란 곧 남성적 질서내에서의 평등을 의미한다. 그 안에서의 평등을 누린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가부장 남성적 질서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질서안에서 여성은 남성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은 여성들이 자기 특성인 여성성을 포기하고 남성적 문화를 추종하는 경향을 갖게된다.

그래서 생태여성주의 (Eco Feminism)는 평등을 지향하는 방향과 목표가 환경파괴적 가부장적 남성성의 사회질서를 뛰어넘어 생태를 회복하는 여성성의 사회가 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남성 따라가기 또는 남성과 같아지기 운동이 아니라 생태주의 여성운동은 오히려 여성성이 주된가치로 발현되는 사회, 곧 여성성의 사회를 만들어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 자연, 육체, 감정 등 남성적 문화에서 폄하되었던 여성적 가치들을 재평가하고, 옹호하면서 폭력, 지배, 정복을 특징으로 하는 남성적 가치에서 평화, 조화, 상생을 특징으로 하는 여성적 가치의 사회를 목표로 노력해는 것이며, 갈등 대신에 협력, 대립 대신에 관계, 권리와 의무 대신에 배려를 강조하는 ‘돌봄의 윤리’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 생태여성주의는 1974년 프랑스 작가 드본느(F. d'Eaubonne)가 처음 사용한 이래 여성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 등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죽임살이를 넘어선 여성들의 살림살이
마리아 미즈와 반다나 시바와 같은 생태여성주의 운동가들은, 풀뿌리 수준의 자급적 생활,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비주의 극복 등을 제안한다.

또한 국가주의로부터 탈집중화, 시장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대안적 경제와 인간관계의 네트워크, 참여민주주의 혹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토대등이 바로 그러한 여성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성의 사회는 남성적 억압을 다시 여성의 억압으로 환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해방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남성의 해방, 생명의 해방을 의미한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이다. 그래서 지구는 종종 가이아라는 말로 사용되었고, 자연은 항상 어머니 지구, 어머니 대지 (Mother Nature)라는 표현처럼 생식하고 포태하고, 양육하며 보살피는 여성적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을 단순히 집안일이 아니라 ‘살림살이’라고 표현했다. 살림살이는 죽임살이의 반대개념이다. 살림살이란 생식과 양육, 보살핌을 잘하는 것이며, 인간이 자연을 살리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 자기 내면의 우주를 찾아 발현하는 것이 살림살이인 것이다.

생태여성학자인 김정희씨는 여성에게 억압적 질서를 제공한 이분법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유기체적 세계관을 강조하고 그것은 곧 모든 만물이 상호의존성의 자각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호의존의 세계관은 불교와 노장의 세계관인 모두가 연결된 관계망적 사고여야하며, 깨달음이란 바로 이러한 ‘생명’, ‘살아있음’의 관계망을 깨우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아직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은 아주 넓게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게이, 페즈비언, 양성애자등 성적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고, 더 나아가 동물들에 대한 생명권은 여전히 무시되고 있고 차별되고 있다. 사회문화가 발전할수록 그 마저도 아무런 차별과 불편없이 사는 방향으로 인류는 진화해야 할 것이다.

지율스님은 터널을 뚫지 않으면 대안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대안을 말하지 않아요, 아니 못합니다. 왜냐면 천성산을 뚫는다는 말에 이미 너무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대안이라는 건 결국 천성산 대신 다른 데를 뚫거나 다른 곳을 지나가라는 소리잖아요. 제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 상처를 다른 누군가한테 안길 수가 없어요. 저는 고속철도가 천성산을 뚫지 말고 우회하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천성산이 살겠다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면, 어느 누군가에게 너무도 귀할 수 있는 숨은 가치를 훼손시키라는 말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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