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석주 스님

※본 내용은 석주 스님 입적(2004) 전, 2002년의 대담이다.

‘한문 잘 하는 이’로 소문나

6·25 때 피난생활 함께 해

운허·탄허 역경 방법 달라

정화 직후 오대산 수련원 개설


-석주스님께서는 탄허 스님을 어디에서 처음으로 만났습니까?
내가 탄허 스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일제 말기에 선학원에 있다가 상원사에 가서 한 철을 날 때였지요. 그 때 탄허 스님이 한암 스님을 모시고 수행을 하고 계셨는데 거기에서 만났어요.
탄허 스님은 고향에서 보천교를 믿던 사람 두 명하고, 이렇게 세 사람이 같이 와서 한암 스님 회상에서 수행을 하였지요. 그래 그 세 사람하고 함께 한철을 보냈어요. 그런데 탄허 스님은 한암 스님 밑에서 계속 공부했지만 다른 두 사람은 나중에 가 버리고 말았어요.

-탄허 스님과 함께 상원사에서 수행을 하실 적에 탄허 스님이 불교경전이나 유교경서 같은 책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때 산림 중에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상원사에 가서 인사도 하고 같이 공부는 했지만 특별한 기억은 없어요. 참선할 때에는 그대로 참선만 했지 뭐 특별히 다른 책을 본 기억은 없어요.

석주 스님(조계종총무원장ㆍ중앙승가대 학장 등 역임, 칠보사 조실)
탄허 스님 친필 知風之自知微之顯 지풍지자지미지현 可與入德矣 가여입덕의 “바람이 시작되는 곳을 알고 은미(隱微) 함이 드러나는 것임을 안다면, 함께 덕(德)으로 들어갈 수 있다.” 원인·기인(起因)하는 바를 알며, 은미함 속에서 드러남을 안다면 함께 덕(德), 즉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 〈중용〉 33장에 있는 말
-상원사에서는 한암 스님 지도하에 경전공부를 하였는데 탄허 스님이 글을 새기고 그랬다는 데요. 석주 스님께서는 탄허 스님이 한문을 잘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한문 잘 한다는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요. 선학원에 있을 때 상원사에 한문 잘 하는 이가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탄허 스님은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한문을 다 배워서 들어온 사람이에요. 절에 들어와서는 한문을 따로 배우지 않았어요.

-그러셨군요. 그러면 석주스님께서는 상원사에서 한 철 지내고 그 이후로는 어디로 가셨나요?
나는 한 철 나고 바로 선학원으로 되돌아 왔어요.

-1941년 선학원에서 유교법회가 열렸지요. 그래서 어떤 이는 선학원에서 한암 스님을 모시려고 찾아갔다고 하는 말도 있던데요?
유교법회 당시에 한암 스님은 참석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사적으로 참석했는지는 모르지만 공식적으로는 참석한 일이 없어요. 그리고 법회도 처음에는 ‘고승법회’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말이 많아 ‘유교법회’로 하였지요. 그때 총무원 측에서 말이 많았거든요. 처음에 그것을 주도한 이들은 청담 스님하고 운허 스님이에요.

-1937년쯤인가요? 상원사에서 〈금강경오가해〉와 〈보조법어〉를 현토 간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의 발문을 한암 스님이 쓰셨는데 그것을 원보산 스님이 화주를 하였지요?
원보산 스님은 원래 화주를 잘 하는 사람이에요. 화주를 해야 양식도 대고 그랬지요. 그이가 선학원과 상원사를 왔다 갔다 했는데 내가 잘 알아요.

-8·15 해방 이후와 6·25 당시에 석주스님께서는 탄허 스님을 만나지는 않으셨습니까?
6·25때 나하고 탄허 스님은 피난 생활을 같이 했어요. 도봉산의 ‘덕절’이라고 하는 곳인데 거기서 피난 생활을 했어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새로운 사실인데 그 곳에서는 얼마나 지내셨습니까? 그리고 그때 탄허 스님을 시봉하던 분은 혹시 도원 스님이 아니십니까?
도원 스님은 그 뒤의 일이고 그때는 보경, 즉 희태라고 하는 이가 시봉을 했었는데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고, 몇 달씩 있다가 다른 데도 가고 그랬어요. 왔다 갔다 했어요.

-피난 중에 탄허 스님은 책을 보지 않으셨나요?
피난 시절에는 그런 적이 별로 없어요. 나라가 온통 난리 통인데 책을 볼 겨를이 없었겠지요. 그리고 그이는 이미 경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인데 굳이 피난 시절에까지 경을 보지는 않았을 거예요.

-탄허 스님은 그 전쟁 통에 통도사ㆍ미래사 등지를 전전하고 고생을 엄청 많이 하였답니다. 석주스님께서는 혹시 부산 쪽으로 피난 가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덕절에 있다가 도봉산의 원통사로 왔다 갔다 그랬어요. 추석 지내고 부산으로 내려가려고 하였는데 유엔군이 대포 포격을 시작하는 바람에 갈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선학원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석주 스님은 해방이 되어서 선학원에서 김용담 스님하고 선학간행회를 만들어 〈선가구감〉을 간행하였지요?
그랬지요. 용담 스님하고 나하고 선학원에서 선학간행회를 만들고 〈선가구감〉을 펴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제일 잘된 일이지요. 후일 법정 스님도 그것을 어느 정도 손질하여 법통사에서 다시 펴내기까지 했어요.

-혹시 용담 스님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용담 스님은 혁신운동을 하다 김구 선생을 따라서 이북으로 갔는데 이북에서 병원에 있는 동생을 데리고 나온다고 나에게는 말했어요. 그리고 이북에서 정리할 것도 있다고요. 그런데 가서는 내려오지 않고 말았지요. 그러다가 6·25가 터지는 바람에 다시 내려와 조계사에 있었어요. 그때 불교인 7~8명이 같이 갔는데 그들은 수복 후에는 다시 이북으로 다 올라가 버렸어요. 그 뒤 이북으로 간 사람들의 행방은 통 알 수가 없어요. 용담 스님은 만해 스님의 상좌인데 나도 그 분의 이력은 정확히 몰라요. 부인이 서울시내에 있어서 선학원에서 상주하지는 않았어요. 나하고 용담스님은 선학원에서 불교혁신에 대하여 많은 것을 이야기했는데 그때는 이념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었고, 불교발전과 혁신만을 이야기하였을 뿐이지요. 그런데 수복 후에 내가 3번이나 경찰서로 불려갔지요. 용담스님하고 김해진 이런 이들이 6·25때 내려와서 남조선불교도동맹을 만들었는데 내가 거기에 연루되었다는 거예요. 아마 그 이면에는 대처 측에서 떠든 것도 있었을 거예요.

-그 당시에 석주 스님께서 선학간행회를 이끌어 오시면서 혹시 탄허 스님하고 같이 경전 번역 작업을 하실 계획은 없었는지요?
선학간행회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모를까 탄허 스님이 오대산에 계셨기 때문에 그때는 그런 계획은 없었어요. 〈선가구감〉 간행 이후에도 선문 관련 문헌을 계속 진행하려고 했는데 그렇게는 하지 못하였어요.

-1954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에 대한 유시 발언으로 정화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그 당시 석주스님도 선학원과 조계사를 다니면서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화 당시에 탄허 스님의 활동은 어떻습니까?
특이한 기억은 없어요. 선학원에서 탄허 스님을 자주 만나기는 했지만 탄허 스님은 남의 앞에 나서서 일을 추진하지는 않았어요.

-지금의 조계사가 당시에는 태고사였는데, 비구 측 스님들이 입주하여서 조계사로 명칭을 바꾸지 않았습니까? 그 바뀐 조계사 현판을 탄허 스님이 썼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나는 주로 선학원에만 있었고 회의할 때에만 갔기 때문에 잘 몰라요. 그때 지효 스님은 할복을 시도하였고 구산 스님이 손가락을 끊어서 혈서를 썼지요. 재판 중에 그랬어요. 그 당시 탄허 스님은 그리 나서지는 않았어요.

-탄허 스님은 정화 직후에 월정사에서 승려교육을 위해서 오대산 수도원을 개설하였는데, 수도원이 개설된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리고 당시 월정사에는 가보셨습니까?
월정사와 선학원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말은 들었지만 가보지는 못했어요. 그곳에서 운학스님도 배웠어요. 그때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이 몇 더 있지요.

-오대산 월정사 수도원은 몇 년 후 자금 부족과 대처 측과의 갈등으로 인해 자진 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영은사로 옮겨 수도원이 재개되었는데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영은사에서 배도원 스님, 녹원 스님, 혜거 스님, 자민 스님, 명성 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탄허 스님께 배우지 않았습니까?
도원 스님은 탄허 스님께 많이 배웠지요. 도원 스님이 탄허 스님을 오랫동안 모시고 있었으니 그것은 잘 알 겁니다.

-통합종단 출범 전후에 석주 스님은 법보원을 설립하여 여러 가지 경전을 번역, 출간하였지요? 그런데 왜 그곳에서 탄허 스님은 책을 출간하지 않았습니까?
법보원은 선학간행회의 후신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내가 운허 스님에게 역경을 부탁해서 그것을 책으로 만들게 되었지요. 내가 낸 책이 〈열반경〉, 〈유마경〉, 〈능엄경〉, 〈선가구감〉, 〈육조단경〉, 〈부모은중경〉 등이었는데, 나중에 동국역경원이 출범하자 이중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리고 법보원에서도 경제적인 능력이 별로 없어서 탄허 스님 책을 출판하기 어려웠지요.

-대한불교청년회에서 그 즈음 〈우리말 팔만대장경〉을 펴냈지요? 그래서 석주 스님하고 탄허 스님이 함께 그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셨던데요.
그랬지요. 〈우리말 팔만대장경〉은 법통사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그 때는 나도 기억이 나지만 몇 번밖에 모이지 않았어요.

-그런 후에 종단에서 동국역경원을 출범시켰지요(그 후 동국대 부설로 되었지만). 그때 석주 스님이 동국역경원의 부위원장으로 선출되고 탄허 스님은 역경위원으로 나오는데요.
운허스님이 원장을 하시고, 나는 그 살림살이를 맡은 셈인데 처음에는 무척이나 곤란했어요. 용주사에서 여러 차례 회의도 했어요. 그때 나하고 운허 스님 등 몇 사람이 역경위원을 정했지요. 탄허 스님은 역경위원이기도 하지만 또 역장장으로 용주사에 가 있었지요.

-탄허 스님은 역경위원이자, 증의위원으로 활동하였지요?
탄허 스님은 처음에는 약간 활동을 하였지만, 자신의 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동국역경원에는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같이 하지 않았어요.

-탄허 스님은 역경사 양성소의 강사로 근무하면서 동국대에 있던 대학선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일은 기억나십니까?
제1대 원장은 석호 스님이었고, 다음 원장이 탄허 스님이었지요.

-운허스님 역경과 탄허 스님 역경은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운허 스님은 의역을 주로 하였고 탄허 스님은 직역을 하였는데 이런 차별성을 스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혹시 운허 스님과 탄허 스님 간에 역경에 대해서 논의한 적이 있습니까?
맞아요. 역경하는 방법이 달랐지요. 그러나 그것이야 그 두 분의 차이점인데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말할 수 있나요.

-석주 스님께서는 탄허 스님이 한암 스님의 법을 계승하였다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암 스님의 법을 계승한 것은 잘 한 일이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훌륭한 불교인이지요.

-스님께서는 탄허 스님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내가 평가하기는 어려운 것이고, 내가 보기에 탄허 스님처럼 유불선에 통달한 이는 없었어요. 그런 인물은 앞으로 나오기 쉽지 않을 거예요.

-탄허 스님과의 귀한 인연을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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