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거수일투족 오로지 주인공 줄을 잡고 가야 합니다

▲ 그림 최주현

도량을 제대로 해 놓지 못해 여러분이 춥고 그래서 얼마나 죄송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대로 따라야지 어쩌겠습니까. 그 모두가 아마 부처님께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도의 길로 이끌어 나감에 있어 어떠한 거든지 걸림 없이 나가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생활이 공부라고 했습니다. 생활이 교재라고 했습니다. ‘불(佛)’이라는 것은 생명의 근본을 말하고 ‘교(敎)’라는 것은 생활, 삶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항상 공부하는 이유가 어딨느냐. 사람이 살면서 내 주인공의 줄을…, 이건 근본이기 때문에 움죽거리진 않습니다. 움죽거리지 않는 근본의 줄을 잡고 그 언덕을 넘어서야 된다는 얘기죠. 즉 말하자면, 천야만야한 산을 타는데 줄이 없으면 올라갈 수가 없죠. 본래 우리들은 제각기 줄이 있습니다. 그 줄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렵게 살든 못났든 잘났든 가난하든 이걸 떠나서 다, 하다못해 물에서 노는 고기들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불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느 거 하나 빼놓지 않고 불성은 있으니 불교라고 했죠. 사람들이 살고 죽고 하는 게 그냥 불교예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할 때에 내가 공(空)했다는 걸 알아야죠. 내 전체 몸속에 있는 생명들도 다 공해서 한 개체로 산다고 그랬죠. 그런데 그 살고 있는 한 개체가 ‘나’가 없다면 상대가 전부 없어요, 나만 없다면. 그래서 ‘나의 나무는 나의 뿌리를 믿어야 된다’는 것이 바로 그 줄타기할 때 줄을 잡고 올라가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그 줄을 잡게 하지 않고, 잡는 것도 모르고 그냥 부처님만 찾든지, 모든 것을 잘하라는 둥 믿으라는 둥 이렇게만 자꾸 나간다면 자기는 그 언덕 위의 맛을 못 보고 항상 심부름꾼 노릇만 해야 되겠죠. 자기 부처를 자기가 찾지 못하고 그냥 심부름꾼 노릇만 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살면서 공한 줄 알고, 내가 공해서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하죠. 왜냐. 생명들과 더불어 같이 살기 때문에 어떤 거를 했을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 공했다는 얘기죠. 모두가 그래서 부처란 얘기죠. 어떤 거를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리만큼 많은 생명들이 더불어 같이 살기 때문이죠. 이해가 되시겠죠?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하고 가면 내 몸뚱이가 살아 있어도 체가 없는데, 내 것이 없는데, 세울 게 없는데, 또 본래 있으므로 찾을 게 없는데, 체가 없는 나가 물에 빠질 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뜻을 알고 간다면요, 죽을 리가 없죠. 불에 들어가도 뜨거워서 타 죽을 일 없죠. 지옥고에 빠진다 하더라도 둘이 아닌 까닭에 오히려 건지죠. 이러한 거를 살아생전에 다 알아야 돌아가셔도 제 길을 자유대로 찾을 수가 있죠. 태어나려면 태어나고, 아니면 그냥 보살로서 행해 나갈 수도 있고, 상세계의 부처님 도량에, 한 도량에 한마음으로써 진행할 수도 있고, 지금 시쳇말로 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남이 보지 못하는 거를 보고 듣고 행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다 건질 수 있는 능력이 자동적으로 주어지죠. 그것은 전체 한울, 한 도량에서 인가를 받는다, 또는 그런 원력이 그대로 주어진다, 지위가 그냥 주어진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모르고 돌아가신다면 외려 지옥고에 들어갈 수가 없죠, 무서워서. 환상을 보면 전부 그냥 무서우니까요. 자기가 체가 없는 줄도 모르고 관습, 욕심, 착, 이런 거를 두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지옥고도 들를 수가 없는 거죠. 그 지옥고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자기를 해칠까 봐 무서워서 그러는 거거든요. 첫 단계에 지옥고를 건너지 못하면 두번째 단계에는 빠져 죽을까 봐 강을 못 건넌다 이겁니다. 세번째 가서는, 지금 이 허공에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을 볼 때에 그 불은 뜨겁지 않은 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체가 없는 거를 생각지 못하고 지금 현재에 사는 의식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식이 발동하면 뜨거운 불기둥을 넘어가질 못하거든요. 우리가 지금 ‘저 언덕’이라고 그랬죠? ‘피안의 언덕’이래도 되고요. ‘저 언덕이다’ 이렇게 해도 되죠. 그런데 저 언덕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아, 이건 참 모르겠다. 이건 우리가 못하지. 여기서는 정말 물질세계에서 정신세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모른다고 하는 그 자체가 도예요. 모르는 게 도라니까요.

그래서 저 언덕이 나를 떠나서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저 언덕도 있고 이 언덕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일거수일투족 그 줄을 잡고 간다. 옆에서 아무리 별소릴 다 해도 그냥 둘이 아니게 그대로, 진리대로 붙들고 간다. 거기서 에너지를 배출하는 거니까, 어떠한 것으로 화해서 바꿔져 돌아가든지 일거수일투족 다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다 이 줄이 말해 주는구나.’ 하곤 그냥 좇아가야죠. 그런데 그거를 좇아가지 못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서 알아야지 죽은 뒤에 알 수는 없는 겁니다. 살아서는 부딪치니까 부딪치는 아픔을 알고, 슬기로운 지혜를 알고, 모든 걸 그렇게 알아서 하지만 죽으면 더하고 덜함도 없어요, 체가 없기 때문에. 경험을 살리고 물리가 터지도록 할 수 있는 체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서 내 마음이 ‘아, 이젠 가도 넉넉하겠구나! 이젠 내 몸이 옷을 벗어도 괜찮겠구나!’ 할 때는 ‘옷을 벗으면 뭐를 할까?’ 하는 생각이 없어도 자기가 하는 대로 그냥 자동적으로 차원이 주어지고 지위가 주어져요. 그래서 벗고 가려면 벗고 가고, 조금 더 있으려면 더 있고, 그렇게 돼야 그래도 사람의 삶이 그저 허탕하지만은 않지 않겠습니까? 허망하고 허탕하고 이런 기가 없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더 정신차려야 할 것은, 이런 공부를 아니하고 기복으로만 아무리 몸을 닦아서 될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몸을 닦아라’ 이러는데 ‘닦는 게 아니라, 쓴물 단물 두 개를 놓고 봤을 때에 두 개가 아니라 하나다. 그 하나도 없다. 없는 데서 그냥 내가 지금 한 발 한 발 딛고 가고 있다. 그런데 그 딛고 가는 것도 공했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본래 그렇게 돼 있는 거를 여러분이 모르니까 내가 이렇게 말을 자꾸 하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그냥 자부처자 제불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자부처를 알면, 제불이라는 것은 모두를 한데 합친 공생(共生)ㆍ공심(共心)ㆍ공체(共體)ㆍ공용(共用)ㆍ공식(共食)을 모두 하고 가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살아서 그 뜻을 모른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뭐, 뒤에서 철퇴가 들어오니 알겠습니까, 방망이가 들어오니 알겠습니까? 또 인연으로 인해서 원수가 나를 치러 들어와도 모르고요. 길을 가고 오다가 무명 영가들이 들이덤벼도 알 수 있나? 인간 하나가 사는 데에 그렇게…, 우연히도 없고 철두철미하게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대로 그 업이 자기한테 찰나찰나 오죠. 그러니까 그것을 모두 그 안에서 타파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다 하라고 그런 겁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부처님이 깨치실 때도 별성을 보고 깨치셨다고 합니다. 내가 그전에도 얘기했죠. 참나의 그 근본 불성은 바로 별성이다. 그 별성은 ‘자신(自神)’이지만 나로서 지금 있는 것은 나예요, 그냥. 그래서 ‘자신’이 자기를 돕는다, 자기는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면 ‘아유, 천도를 했는데 왜 또 하래나.’ 이러지만 그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살아온 차원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길에 오가다가도 천도가 금방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사람 자체가 그렇게, 인과성으로 인해서도 그렇고 유전성, 또 세균성, 이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서 매여 있어서 한 고비 한 고비 이렇게 풀려 나갑니다. 그런데 여러 번 해야 할 거를 다 묵살하고, 자손들이 한 번 하고 나서도 ‘아주 천도가 제대로 됐다.’고 생각을 한다면 제대로 되는 거죠. 삼천 년을 업을 지었다면 삼천 년을 지금 현재 찰나로, 이쪽도 찰나, 저쪽도 찰나가 돼서 하나로 묶어지면서 멸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한생각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봐야죠.

내가 요즘 답답한 것은요. 이 부처님 법을 가르친다고 온통, 사성제니 육바라밀이니 뭐니 쭉 가르치는데 그게 외려 자기를 속박하고 있단 말입니다. 전부 거기에 매달리고 속박이 돼서 자기가 그냥 밀치고 들어갈 수가 없이 돼요. 이거는 누구의 가르침에 의해서 깨치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가르쳐서 깨치는 것도 아닙니다. 즉 말하자면 자기가 우물에 빠졌다면 자기가 나와야 되지, 누가 건져 주고 거들어 주는 게 없어요. 그래서 ‘우물과 같다. 자성의 근본 자리의 구멍이 우물과 같다. 본래 우물 안에 빠져 있으니 우물 안에서 나오는 거는 바로 너에게 달려 있다.’ 이 소리나 같죠.
지금 과학이 발전되고 그래서 오신통도 성사가 돼서 현재 하고 있는데요, 보는 것도 ‘심안으로 봐라’ 이러는 거는 ‘물질계의 네가 봤다고 하지 마라. 그 눈 속에 바로 진짜 너가 있다. 그러니까 보는 것도 심안으로 봐라. 듣는 것도 심안으로 들어라. 가고 오는 것도 심안으로 가고 온다는 것을 알아라.’ 하는 겁니다. 모두가 제각기 불성이 있어서 여여한 줄 알고,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알고, 만법을 들이고 내도 손색이 없다는 걸 아는 차원이 돼야 종을 치지 않아도 건질 수 있고, 강에서 사는 고기들도 건질 수 있는 거죠. 그 무명을 벗겨 주는 것이 건지는 겁니다. 어떠한 미생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부처님 모습과 둘이 아니란 얘기죠.
그것뿐만 아니죠.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가는 것이 그대로 죽은 조상들도 무명 영가들도 다 건질 수 있는 도리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차원에 단계가 있죠. 왜 가만히 있으면 불이라고 하고 부처님이라고 하고, 왜 생각을 했으면 법신이라고 합니까? 그리고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왜 화신, 즉 보현신이라고 그랬습니까? 그 삼 단계가 다, 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더럽고 깨끗한 것도 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거지요. 더러운 것도 거기서 나오고 깨끗한 것도 거기서 나오는데요, 쉽게 말해서 병원에 갔는데 죽을 병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응, 내 참나의 줄이 있잖아. 네가 형성시켰으니까 네가 건강하게 해서 심부름을 시켜야지.’ 이렇게 해야 될 것인데도, 의사가 죽을 병이 들었다고 하면 벌써 ‘아이고, 죽었구나!’ 그러고는 마음이 전부 흐트러져서 ‘이제 얼마 살지 못할 텐데 뭘 그러냐!’ 이렇게 아주 탁 풀어져 버리죠.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까, 내 몸속에 들어 있는 생명체들은 그냥 하자는 대로 따라 주거든요. 그러니까 생명체도 확 풀어지죠. 작용해 주는 생명체들도 다 혼돈되고, 그러면 그게 그냥 벌컥벌컥 벌컥벌컥 변하죠.

이것이 딴 데 있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만 부처님 말씀이 아니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진리가 그대로 부처님 말씀이고 그대로 부처님 법이고 그대로 우리들의 법입니다. 요 백지장 하나 사이를 놓고 얘기합니다, 지금. ‘내가 깨쳐야지. 깨치질 못했으니까 중생이지.’ 이러고 ‘내가 깨쳐야 될 텐데 깨치질 못한다.’ 이런 생각을 모두 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래 여러분께서 불성도 가지고 있으며, 즉 불성이 자부처니까 자부처가 자기한테 있으며, 또 중생이라는 그 육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육체하고 정신하고 어떻게 둘이겠습니까? 둘이 아니라는 것만 아시면…, 진리가 지금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 봤을 때 내가 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많이 보는데, 너무 많이 들었는데 내가 어떤 거는 듣고 어떤 거는 안 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 하나 사는 데에는 우연히가 없고
철두철미하게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대로
그 업이 찰나찰나 자기한테 오는 겁니다.
그 것을 모두 자성의 근본자리에서 타파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다가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등 동물로서 본래 갖추어 가지고 나와 있다. 갖추어졌다. 그래서 여러분은 갖추어진 대로 지금 살고 있습니다. 듣고 보고, 또 들이고 내고 들이고 내고, 여여하게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더딘가. 깨치지 못했다. 중생이다.’ 이런 마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 쓰는 차원이 벌써 저 언덕을 넘어서지 못한 마음이다 이겁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부자고 이걸 떠나서’라는 얘기는 가난하다고 슬퍼하지 마라 이거죠. 어떠한 문제가 닥쳐도 거기 놓고 슬기롭게 웃을 수 있어야만이 된다. 그대로 진리를 한번 보세요. 내가 아무리,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 진리를 좀 보시라고 해도 그게 반절만 들어가지 하나가 다 들어가질 않아요. 그대로예요. 그대로 알면 그대로 도승이에요. 허허허…. 아니, 그대로 부처란 얘기죠.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걸 붙잡고 자기가 정말 자기 샛별을 봐서 둘 아닌 거를 알게 되느냐. 그럼 세세생생을 알게 되죠. 그런데 그걸 깨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줄을 잡고 이 도리에…, 내가 지금 백지장 하나 사이라고 말하는 차원의 근기를 한번 편안하게 놓고 보세요. 그대로 구정물이 들어오는 것도 거기, 새 물이 들어오는 것도 거기, 파도가 이는 것도 거기, 바람이 자서 물이 잔잔한 것도 거기, 죽는 것도 거기, 사는 것도 거기, 밥 먹는 것도 거기, 똥 누는 것도 거기, 잠자는 것도 거기. 매사가 그러하니 별나게 ‘내가 잤다’ 하지 않죠? 만날 자는 거니까. ‘내가 봤다’ 할 수가 없죠? ‘내가 들었다’ 할 수가 없죠? 가정에서 항상 만나는 사람도 만날 만나기 때문에 ‘만났다’ 할 수가 없죠? 그건 말로 되는 게 아니라 자동적으로 그냥 넘어가죠. 내가 했다, 내가 만났다, 내가 갔다, 가고 온다, 내가 살고 있다 이런 게 그냥, 자동적으로 그냥 넘어가지 생각들을 하고 넘어가십니까? 그러니까 여여하게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여기 내려가다가도 반가운 사람 만나면 “아이구, 이거 얼마만이야?” 하고 그냥 만나서 반가워하지 ‘내가 이 사람을 만날 때 둘이 아니니까 만나야겠다.’ 이럽니까? 그러니까 자동적이에요. 자동적으로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 거를 그대로 팔만대장경을 엮어서 여러분한테 설법을 해 주시고, 역대 조사들이 설법을 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항상 중생이고 팔자 운명에 끄달리는 거예요. 그렇게 말씀을 해 주셨건만도 그 말씀하는 뜻을 넘어설 줄 몰라요.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었더니 가섭이 웃었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왜 웃는 것이 꽃이냐?’ 이런다면 더 말할 필요는 없지만 꽃도, 사람의 얼굴도, 웃는 것도 마음을 둘 아니게 내면 다 꽃이죠. 그러니 둘이 아니게 이 도리를 배워야 되는 거지, 배워야 된다는 건 어폐가 있는 거지만요. 내가 그랬죠.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돼서 형성되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형제가 되고 이러면서 반복돼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러니까 부처님이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다 자기 몸 아닌 게 없고 자기 아픔 아닌 게 없고 자기 생명 아닌 게 없다고 그랬어요. 그러니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이렇게 돼서 여기 올라온 거를 안다면…, 그 과정을 부처님께서는 ‘둘 아니게 일대사의 인연을 맺으셨다.’ 이렇게 그 뜻을 말씀하셨죠. 그러니까 수억 나유타라고 하지마는 광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그 수억 나유타 광년을 거쳐온 자체를 찰나찰나로 했으니까요. 그게 둘이 아니거든요. 왜냐. 그렇게 내가 미생물이었다가 짐승도 되고 자꾸자꾸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올라왔기 때문에 고등 동물이라고 하죠. 그런 반면에 부처 될 자격이 99%가 된다. 자기한테 자부처가 있다. 자부처를 알아야 일체제불의 마음과 한마음으로써 모든 거를 타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내가 두 가지로 얘기했어요. 깨쳐서 아는 거하고, 깨치지 못했더라도 그 자리를 아주 철저하게 쥐고 가는 사람은 진리가 돌아가는 것이 공했고,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공했다는 거를 잘 알기 때문에 그냥그냥 통하게 돼 있어요. 별다른 게 아니니까요. 세번째는 그것도 못 쥐고서 그냥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고. 여러분이 공부를 진짜 한다면 위로는 조상들과 아래로는 자녀들이 그만큼 한 도량에, 한마음 속에 들어서 모두가 출중하게 된다는 얘기죠. 그 인연으로 인해서 아래 대대로 내려가면서 그 근기를 받는다는 얘기죠.
우리가 이 공부를 잘해 나간다면, 예를 들어서 ‘정신계와 물질계를 둘로 보지 마라. 남들을 그렇게, 누구를 막론해 놓고 섭섭하게 하지 마라. 아프게 하지 마라. 내가 좀 섭섭하더라도 남을 섭섭하게 하지 마라, 모든 거를. 부부지간도 잘못된 게 있으면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자기한테 관하라.’ 이렇게 한 번만 잘 관해도 사람이 백 년을 살면서 기복으로 하는 거보다 낫다고 그랬어요.

예전에 내가 이런 얘기를 했죠. 산에서, 그 얘긴 다 못 하겠지만, 추운 겨울에 산소 옆에서 옷을 빨아 입고 나니까 그대로 얼어 버리는데, 건너다 보니까 아, 불이 반짝거리는 옴막집들이 있더라고요. 예전 같으면 축지법을 하면 아주 간단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시대에는 축지법이 아무 쓸모가 없는 거야, 그걸 안다 하더라도. 내 몸을 감춘다, 이런 것도 아무 쓸모가 없는 거야. 부처님의 정법의 도리는 그게 아니다는 얘기지. 남을 현혹시키고 남을 붕 뜨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뚝 떨어지게 만들고 이러는 과정은 거치지 않아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을 한데 떨어뜨리지 않아야 법이 되느니라.’ 하신 거죠.
그래서 ‘저기 건너가면 이렇게 떨리고 춥지는 않지.’ 했는데, 번득 ‘로케트가 올라가는 이 시대에 무슨 칼, 창 이런 걸 필요로 하겠느냐?’ 하는 생각이 나는 겁니다. 또, ‘저기 건너가는데 축지법이 더 빠르냐, 체가 없는 너가 그냥 가는 게 빠르냐?’는 거야. 그건 빛보다 더 빠르다는 얘기지. 이 허공에도 가설이 된 전깃줄이 있듯이 보이지 않게 줄이 있다는 얘기죠. 내가 그랬다면 또 대단한 사람으로 들을 것이기 때문에 참, 말하기가 어렵고요. 어려운 게 아니라 안 하고 싶군요. 하지만 그거 하나는 말하죠.

그래서 그 집을 그냥 갔습니다. 허허허…. 거길 들어서자마자 말입니다, 온기가 딱 생기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방 안이 추우면 전기난로를 켜죠? 그와 같은…. 그래서 그 얼음물에다 빨아서 입은 것을 다 말려 가지고 떠났어요. 이 법이 이렇게 좋은 법이에요. 아주 좋은, 아니, 말로는 할 수 없는 법이죠. 그래서 여러분한테 자신을, 자기 자신을 찾아라. 자기 자신을 찾으면 바로 그렇게…, 정말 잘한다고 궁둥이 두들겨가면서 갈 거다. ‘너 손 좀 빌려라.’ 그러곤 궁둥이 두들겨서 데리고 다닐 거예요.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8년 1월 4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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