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2. 도원 스님

도원 스님(파계사 회주)
한암스님 설법 중 일어나 “주십시오”
스승이 던진 주장자 받으며 인가받아
본인이 손수 번역한 책으로 강의
늘 선정에 계셨던 철저한 수행자
 

-스님은 탄허 스님과 인연이 제일 많은 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 말기(1941)에 파계사에 입산해서 은사인 고송 스님을 모시고 3년간 있다가, 글공부 하고 싶어서 간 곳이 오대산 상원사입니다. 그때 다른 곳의 강원은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상원사에는 승려수련소가 있어서 글을 배울 수가 있다고 해서 은사 스님이 탄허 스님에게 보내는 추천장 받아서 가게 된 것이지. 우리 노장님은 상원사 한암 스님의 회상에서 탄허 스님과 같이 공부한 터라 탄허 스님을 잘 알고 있었거든. 그리고 은사스님은 한암 스님에게서 법도 받았어요.

- 탄허 스님이 중대에서 장자, 주역을 공부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탄허 스님이 중대로 올라가서 노장을 숙독했다고, 희찬 스님이 말하는 것을 들었지. 중대는 방이 세칸 집이었어. 한 칸은 부엌이고, 한 칸은 부처님을 모시고, 또 한 칸은 지대방이었는데 그 방에는 기도객이 오면 머물기도 했어. 탄허 스님은 보궁에 마지 올리면서 공부하셨지.

- 한암 스님이 탄허 스님을 애지중지 하였다는 말이 있어요.
외부에서 사람들이 와서 한암 스님에게 더러 글씨를 써 달라고 하거나, 서문을 지어달라고 하면은 “나보다 탄허에게 가서 받아 가거라.”고 했어. 그래 사람들이 탄허 스님에게 글을 받아 가면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이지. 내가 갔을 때에도 한암 스님이 절의 재정관리 같은 것도 직접 챙기다가 탄허 스님에게 넘겼어.
한번은 한암 스님이 법상에서 법문을 하시는데, 고인(古人)의 말을 인용하시면서 법문을 하셨어. 한암 스님은 고인은 그렇게 말을 하였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자 탄허 스님이 말없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시더니 법상의 한암 스님에게 가서는 ‘주십시오’ 하는 자세를 취했어. 그러자 한암 스님이 당신의 주장자를 탄허 스님의 손에다 던지시더라구. 말이 필요 없는 장면이었지. 사람들이 그 때 일로 탄허 스님이 인가받았다는 말들을 했지.

- 스님은 6.25 이전에 탄허 스님과 함께 통도사로 가셨지요.
그것은 탄허 스님이 곧 전쟁이 날 것으로 보시고, 한암 스님을 모시고 남방인 통도사로 모시고 가려고 한 것에서 나온 것이지. 그러나 한암 스님은 끝내 안가시겠다고 해서 탄허 스님, 보경 스님, 나, 그리고 성도 스님 이렇게 넷이서 통도사로 갔지. 그때가 1949년 봄이었어. 통도사 큰절에 갔는데 절을 바로 안 줘서, 극락암으로 갔어. 나중에 백련암으로 옮겼지.
그렇게 해서 그 해(1949), 겨울부터 비로소 통도사 백련암에서 수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때 공부한 대중이 11명이었어.
그때에는 아주 철저하게 공부 위주로 살았어. 밥은 아침에 한번만 하고, 그걸 갖고서 저녁까지 먹었어. 밥을 해서 방의 따뜻한 구들목에 묻어 넣었다가 먹게 했어. 마지는 따로 지어서 올렸어. 된장국을 끓이고, 김치만으로 공양을 했어. 그런데 그 지방 사람들 인심이며 신심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신도들이 쌀을 대두(大斗)로 한두 말씩 올려 주었는데, 그렇게 모인 쌀이 몇 가마가 되었어. 그래 식량은 문제가 없었지. 아침 먹고 공부하고 마지 올리고 공양하고 또 공부하고 그러고 나서는 울력하고 저녁 먹고 그랬어. 그렇게 철저하게 살았지.
그런 공부를 2, 3년만 더 했으면 큰 성공을 했을 텐데. 나는 그때 탄허 스님에게 본격적인 공부를 처음으로 받은 셈이었지. 그때 탄허 스님에게 전부 강의를 들었어. 그렇게 공부하기를 두 달이 되었을 때에 한암 스님이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어. 그래서 탄허 스님과 보경스님이 오대산으로 가게 됐지. 그런데 오대산에 올라가시더니 소식이 없었어.

-그럼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탄허 스님으로부터 소식은 없었고, 통도사에서는 소용돌이가 있었어. 경남에서 계엄령이 내렸지. 탄허 스님은 통도사로 오시지 않고, 고양의 도림사라는 절로 가셨어. 나는 통도사에서 나와서 범어사에 가서 비구계를 받았지. 그런데 탄허 스님으로부터 도림사로 오라는 연락이 왔어. 보따리를 싸서 도림사로 갔지.
그리고 얼마 후에 몇몇 스님들과 스님 모시고 흥국사로 갔어. 대처승인 흥국사 노장이 우리와 같이 살자고 해서 그리 갔지. 그런데 흥국사에서 6.25를 만났어. 인민군이 흥국사 일대를 접수하면서 매일 인민군 노래를 부르게 되고, 급기야는 인민군에 입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었어. 같이 갔던 스님이 인민군에 들어가면 위험하니 여기에서 흩어지자고 했어. 탄허 스님은 안 된다고 하셨지만 우리는 흥국사를 나왔어. 그리고 오대산으로 갔어.

- 그러면 탄허스님은 그곳에 계속 계셨나요.
탄허 스님은 그곳에 계시다가 도봉산 원통암으로 가셨어. 그러나 그곳에만 계시지는 않고, 왔다 갔다 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 나는 성도 스님과 함께 걸어서 오대산 상원사에 와서 한암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지. 상원사에서 하루를 자고는 나왔어. 그리고 태백산으로 떠났어. 그런데 가다가 월정사에서 와운 스님을 만나 그만 월정사에 붙들려 있게 되었지. 추석 때 한암 스님 뵈러 상원사에 갔는데 대중은 모두 중대에 올라가고 스님 혼자 계셨어. 그래서 중대에 올라갔더니 탄허 스님 계시더라구.

- 탄허 스님은 1956년부터 3년간 오대산수도원을 열었는데, 도원스님은 거기에 참가하지 못하였지요. 그 후 영은사에서 수도원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은사로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영은사 시절 얘기 좀 해주세요.
3년 정도 공부했는데, 그때 탄허 스님은 교과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번역해 놓은 초발심 자경문 같은 것을 중심으로, 가르쳤어. 당신이 번역해 놓은 것에서 애매한 것은 강의를 듣는 대중들에게 의견을 물어 보시고 그랬어. 너는 이것이 어떤 뜻으로 들리느냐, 혹은 당신이 번역한 것이 어떠냐는 식으로 의견을 물으셨어. 그렇게 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보완을 하신 것이지.
스님은 평소에 사집에 <영가집>을 넣어서 오집으로 하자고 그랬고, 사교에는 <법화경>을 넣어서 오교라고 해야 한다고도 하셨어. 그리고 화엄경은 화엄론으로 하자고 하면서, 이런 것을 교본을 정해야 한다고 하셨지.

- 탄허 스님은 월정사 주지가 되셔서 1963년 가을에 월정사 오셨지요.
그때 희찬 스님이 탄허 스님을 모시려고 방산굴을 새로 지었어. 나는 방산굴을 짓는 것은 못 봤고, 나중에 방에 도배를 했지. 그때 들어갈 때가 겨울이어서 무척 추웠어. 그런데 그때 대처승들이 집달리를 앞세우고 쳐들어와서 난리를 피웠지.
난리를 겪고 나서 1964년 봄에 나는 병이 나서 강릉의 병원에 입원을 했어. 나는 그때 폐병 말기였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공부를 하고, 소임을 보고 그랬던 것이지. 그 무렵에 대중들은 탄허 스님에게 능엄경 강의를 듣고 그랬지만, 나는 참석하지 못했어. 병원에서 8, 9개월을 치료받다가 나와서 오대산에 와 보니 강의가 중단되었어. 오대산 강원은 문을 닫은 것이지.

- 탄허 스님을 모신 스님으로서 탄허 스님의 정체성을 말씀해주세요.
탄허 스님에 대해서 당시 선방에서 하는 소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스님은 아직도 상투가 덜렁덜렁 한다고 그랬어. 그 말은 스님이 유교적이라는 말이지. 그래서 절집 강사도 어렵고, 선비 테를 못 벗었다고 그랬어.
그러나 내가 스님을 모셔본 견지에서 보면, 탄허 스님은 철저한 수행자셨어. 스님은 초저녁에 주무시면 밤 12시, 새벽에 일어나서 밤새도록 주무시지 않았어. 그리고 스님을 모시고 어디를 가면, 스님은 절대 방심하시는 것이 없어. 늘 선정(禪靜) 상태로 계셨지. 항상 선에 천착하셨어. 남들은 스님을 강사라고 하지만, 스님은 유불선을 통달한 학자였어. 경율론에 능통하셨잖아. 거기에 유교까지 겸비하였으니 호랑이가 뿔까지 단 격이지. 또한 노장도 얼마나 해박해. 노장을 잘한다는 사람들이 스님에게 와서는 절절 맸지. 관응 스님이 일본에 가서 노장을 배워 와서는 당신이 최고라고 여기다가, 탄허 스님을 만나보니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그런 말이 있지.
탄허 스님은 일상에서도 글, 경전에 대한 것만을 말씀하셨어. 그리고 전적으로 종지(宗旨)를 갖고 하셨어. 스님은 유불(儒彿)이 다른 것이 아니다, 도(道)의 입장에서는 같다, 다만 교화 방법이 다르다고 하셨어. 다시 말하지만 내가 모셔서 아는 것으로는 그 당시 스님은 방심이 절대 없으셨고, 수행 중심으로 사셨어. 그리고 편벽한 분이 아니셨어. 스님은 두루 많은 것을 아시면서 그것에 대한 종지를 갖고 있었지. 하여간에 스님은 선교(禪敎)를 겸했어.

- 탄허 스님의 평소 어록을 소개하신다면.
스님은 말끝마다 하신 것이 경전, 종지입니다. 스님은 도를 벗어난 분이 절대 아닙니다. 스님은 항상 지행합일(知行合一)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 말과 행실이 일치되지 않으면 수행도 안 되고, 도를 닦을 수 없다고 하셨어. 어쨌거나 앞으로는 그런 스님(탄허)을 만날 수 없어. 스님은 유불선을 회통하셨고 스님의 속 살림살이는 조그마한 것에도 구애 받지 않으셨어. 사람들은 스님의 껍데기만을 보고 판단하기도 했지만 스님의 속을 알게 되면 스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어요.

- 탄허 스님은 명예 욕심이 있었나요.
탄허 스님은 간혹 강원도 종무원장, 오대산 수도원장, 월정사 조실 같은 이름을 가지셨지만 그것은 본의가 아니고, 그저 이름만 갖고 있었지 명리(名利)에 급급하시지 않았어.
다만 이런 에피소드는 있어. 스님이 평소 민족 통일, 국가 장래 이런 것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사람들이 “탄허 스님은 장관감이고 그중에서도 국방장관이야.”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을 당신이 자랑삼아 이야기 하신 적은 있지.

- 스님들 교재의 전체를 현토, 역경, 출간한 것은 어떻게 보시나요.
나는 그것에 대해서 돌아가신 전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어. 그 이상 잘된 것이 없다고 했지. 지관 스님은 탄허 스님의 현토는 전래 강원의 토를 전부 뒤집어서 새롭게 한 것이라고 했지. 영은사 시절에 그것으로 공부했지. 스님은 “안진호본에서는 이렇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어. 그러면서 문맥을 다듬고, 종지의 입장에서 뜻이 합일되는 것을 따지고 했지. 그때 스님과 우리들은 토론을 많이 했어. 그러면서 한암 스님의 금강경의 토도 많이 고쳤어요. 그것을 영은사에서 주로 하고, 그 이후에 월정사에 가서도 하셨어.

- 탄허 스님의 글씨를 신필(神筆)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세요.
스님의 글씨는 독특하고, 필체가 살아있지. 내가 스님에게 공부를 어떻게 하였냐고 물어보았어. 최면암의 직계 선생인 이극종을 만나서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했다고 했어요.
스님은 매일 한문으로 시 한편을 짓고, 한문으로 일기를 썼다고 했어. 그리고 4서3경을 전부 한문으로 쓰다시피 하였는데 글씨가 늘지 않을 수가 없지. 당신은 글씨를 숭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글씨가 좋을 수 밖에 없었어.

- 탄허 스님의 정신, 학문이 계승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스님의 학풍, 가풍이 오대산 월정사에서 구현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최근에는 혜거 스님이 스님을 이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水流竟歸海 수류경귀해 / 月落不離天 월낙불리천
“물은 흘러 마침내 바다로 돌아가고
달은 떨어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물의 본성은 바다이다. 그리고 달(月)은 하늘과 떨어져 있지만 항상 본성[天]을 떠나지 않는다. 물과 바다, 달과 하늘의 관계는 본성(體)과 작용(用)의 관계이다. 〈탄허 스님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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