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연재를 시작하며

한국근대불교사는 시기적으로는 현대불교와 연결되어 있고, 그 성격이나 양상이 전시대인 조선시대와는 다르다. 이 시대는 수준 높은 사상이 더욱 발전한 것도 아니고, 불교계의 풍토가 세련되게 변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왕조 전시기 동안 철저하게 폐허가 된 지경에서 다시 일어나 보니 세상은 뒤바뀌어 있었다. 산중에만 머물러 있던 시선이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면서 저자거리로 옮겨져야 했다. 또한 다들 변화와 개혁을 목 놓아 부르니 자의든 타의든 체질개선과 굳어있는 근육을 쓰지 않으면 안될 시기가 온 것이다. 실로 경황없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불교계는 유난히 근대불교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실 학계에서는 그동안 고대와 고려의 불교사상이나 신앙, 그리고 인물 중심의 연구가 이루어졌고, 근대불교사는 연구 범주 속에도 끼워주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연구자 수나 연구 성과가 손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아마도 그 시절을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어른과 흔적들이 여전히 살아있어서 과거라고 하기에는 오늘과 아주 가까운 시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그 시기가 전통불교와 단절되었고, 식민지시기를 지나오면서 드러난 불편한 진실들이 여전히 우리가 사는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일제의 침략과 함께 항일불교·호국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교계 각 문중의 선양사업 차원에서 진행된 이른바 불교계의 항일운동과 불교정화운동 연구는 지금도 인기 있는 주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눈길을 끄는 글이 있다.

“우리 근대사나 현대사의 경우 그것을 보는 눈이 엄격해야하며, 미화(美化)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식민사학(植民史學)의 독소를 제거하는 문제, 역사의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결코 역사를 미화하는 데로 나아가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한국근대사 연구의 권위자 강만길 선생이 그의 저작 <한국근대사>(1984) 서문에 쓴 글이다. 조작된 역사를 경계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교계 한 언론사에 칼럼을 연재했던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의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정화운동에 대한 연구는 당시의 주도적인 인물들에 대한 개인적인 차원의 선양사업으로서의 성격을 띠는 것이 대부분이며,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도 대단히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를 지적하는데 그치는 실정이기 때문에 정확한 이해와 평가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거리가 멀다.”라고 평가했다.

결국 사실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이해가 부족하고, 그 결과 한국근대불교사를 바라보는 사관(史觀)이니 의식(意識)이라고 하는 것이 천박할 수밖에 없다. 2012년 가을, 불교전문평론지 <불교평론>에 실린 글이 특정 문중 어른의 덕화(德化)와 명성에 흠집을 냈다고 해서 자체 폐간되었다가 올해 봄부터 속간되는 해프닝이 그 단적인 예이다. 왜 후손들은 그 어른의 그릇으로 사실이나 구설수까지도 담아낼 수 없는 걸까. 우리가 진정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뿐인가. 요즈음 벌어지고 있는 승풍실추나 절 뺏기와 같은 일련의 상황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일인가. 어떤 학자는 “오늘날 고질화된 불교계의 세속화와 파벌싸움의 문제는 식민지불교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새겨들을 대목이다. 당분간 불교계나 불교학계의 글쓰기와 발표는 A가 준 설계도를 보고 B가 생산을 대신해 주는 “주문자 상표 부착방식(OEM,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이 지속될 것이다. 일개 범부(凡夫)가 함부로 입을 놀릴 소관사항 밖의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의 흔적을 따라 후손들도 걷는다는 점이다.
나는 이와 같은 우리의 근현대불교사 연구나 인식의 수준을 염두해 두고 선학원(禪學院)의 역사를 연재하고자 한다. 선학원의 흔적을 따라 근현대사를 이해하고 싶다. 눈이 밝다면 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내가 선 자리를 살피고 앞날을 준비할 수 있는 화두 하나라도 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선학원의 역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교계의 큰 어른들과 나이 많은 거사와 보살조차도 일부분이나마 선학원의 과거를 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단편적인 논문 한두 편, 개론서의 한 절(節)에 소개된 내용이 전부다. 최근에 와서는 선학원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흔한 기획기사조차도 찾아보기 힘들다.

소위 1921년 설립되어 굴절(屈折)의 물길을 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흔적들을 생각한다면 품삯을 쳐주는데 너무 인색한 것 아닌가. 그래도 만해와 용성, 만공이 잡풀을 뽑고 자갈을 골라 터전을 일구었고, 청담(靑潭)·동산(東山)·효봉(曉峰)·향곡(香谷)이 대들보를 세우고, 기와를 얹고, 단청을 해서 지금도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데 말이다.

연재는 1차적으로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를 해제했던 1895년부터 1945년 해방이전까지로 상정하였다. 내용은 선학원의 직접적인 설립배경이기도 했던 임제종운동(臨濟宗運動)이나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실제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조직, 그리고 선풍진작과 대중화에 진력했던 여러 장면들을 소개할 것이다.

특히 1934년 재단법인 인가와 곧이어 진행된 ‘조선불교선종(朝鮮佛敎禪宗)’은 당시 불교계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시절 왜 선학원이 종단까지 창종(創宗)했을까. 그리고 1941년 선학원은 유교법회(遺敎法會)를 개최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2008년 4월 2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조계종 중흥의 당간, 41년 유교법회를 조명하는 연찬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발제자의 한 사람이었던  목정배 교수는 이 유교법회에 대해 “범망경(梵網經)을 씨줄로 하고, 유교경(遺敎經)을 날줄로 하면서 자비참을 원융하게 하였으니 이 유교법회는 조계종이 지향할 바를 교시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밖에 유교법회에서는 조계종지(曹溪宗旨)에 대한 설법도 있어서 명실공이 조계종의 이념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때문에 2008년 한불교조계종에서는 이 연찬회를 통해 “종단의 수행종풍 쇄신과 정체성 회복의 계기로 삼는다”고 하였다.

연재를 통해 부질없이 더 나은 앞날을 향해 내딛는 발목을 잡기보다는 올바른 불교사이해와 역사의식을 정립하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 왜냐고? 잊혀진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지금의 한국불교를 염려한다면 걱정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앞선 세대보다 더 풍요로워져야 하고 후손들이 우리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오경후(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