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미학- 붓다의 미소

▲ 국보 제84호 서산 마애삼존불.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자 했던 고통스러운 예수의 성상과 달리 불상은 고통을 벗어나 적멸에 드는 즐거움을 고요한 미소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불상, 종교적 감성 더하는 예술품
부처의 미소 통해 불교 핵심 표현
이 시대 수행자는 어떤 얼굴인가
진정한 부처 찾기위해 관념 넘어야

언젠가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분이 물었다.

“스님, 이 사진 보세요. 어떻습니까?”
“글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그 분이 말씀하셨다.
“이 얼굴이 평화로워 보입니까? 아니지요. 고통으로 찌들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사진 속의 인물은 굵게 파인 주름살에 약간 딱딱해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테레사 수녀의 사진이었다.

가난한 사람의 성자, 불행한 자들의 어머니, 마더 테레사는 이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나 역시 그를 깊이 존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테레사 수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한다면 테레사 수녀의 얼굴은 아름답지 않다. 만약 그 사진 속의 인물이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 평생을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성직자라는 정보가 없었다면, 어쩌면 그냥 고생 많이 한 평범한 노파의 얼굴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삶에 대한 관념 때문에 그 얼굴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고통의 자국을 무시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관념을 덧씌워서 본다. 그 분의 질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내 어리석음을 질타한 것이다.

그 분이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과연 테레사 수녀는 행복했을까?”라는 문제이다. 성직자에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 헌신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산 성인에게 어쩌면 고통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도 테레사 수녀에게 행복을 말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이 질문은 오랫동안 불교수행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테레사 수녀가 만년에 쓴 일기 중에 “내 안에 어둠이 가득합니다. 도대체 신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한 대목이 있다. 침묵하는 신 앞에서 느꼈던 좌절과 실망, 고독과 번민은 자신에게 철저하고 진실했던 그의 내면을 보여준다. 근거 없는 자신감과 값싼 용기가 횡행하는 이 시대에 찾아보기 어려운 솔직함과 용기이다.

그래서 그의 진솔하고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왠지 그의 삶이 행복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정말 행복했을까? 가난한 자들에 대한 그의 헌신이 오로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신에 대한 복종과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테레사 수녀의 희생은 어떻게 평가될까? 불교수행에서는 ‘자리이타’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다. 그러므로 남의 행복을 위해 나의 행복을 희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간주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의무적으로 하는 일,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일은 올바른 수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승보살은 끝없는 이타행을 실천하더라도 마음에 고통을 느끼는 일이 없다. 금강경에서 말하듯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어도 보살의 마음은 평화롭다. ‘내가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적멸의 즐거움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불교수행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자신의 행복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 행복하게 하고, 남의 행복으로 내가 행복한 그런 사람이다.

▲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부처님의 즐거움, 부처님의 행복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사진술이 있었을 리 만무하므로 사진도 없고, 초상화가 그려졌다는 기록도 없으니 부처님의 얼굴이 그림으로 남아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보통 인간을 뛰어넘고 신의 단계도 뛰어넘는 이 위대한 존재의 비범한 특성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세상에서 가장 선한 존재인 예수와 가장 악한 존재인 유다를 그리기 위해 마지막까지 고심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불상을 만드는 장인들에게도 불상의 제작은 벅찬 과제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상상력과 종교적 감성을 모두 발휘하여 이 위대한 존재를 형상화했을 것이다.

부처님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32상과 80종호라는 도상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탁월함을 감성적으로 체험하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이 위대한 존재의 초월적이고 정신적인 특징은 육체적인 특징만으로 표시할 수 없지 않은가? 그 분의 정신적 고결함을 한 눈에 알아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장인은 자신의 종교적 체험 속에서 그 모습을 고심하였을 것이고 그 중 가장 깊은 정신적 상태를 표시하는 모습으로 형상화했을 것이다.

그 간절한 그리움과 깊은 종교적 체험 속에서 불교예술은 미소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고통을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이라고 설파하는 종교가 고통이 아니라 미소에서 자신의 상징을 찾은 것이다.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난 자, 열반의 즐거움을 누리는 자라면 가질 법한 적정 삼매의 고요한 미소를.

미소야말로 고통에 찌든 보통 사람들과 부처님의 경계를 나누는 가장 확실하고 뚜렷한 표지이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 그 감화력과 구제력도 가장 구체적이고 직관적인 표현인 깨달음의 미소로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적멸의 즐거움’, 곧 미소는 불상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은혜의 종교라고 하는 기독교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대속(代贖), 즉 십자가에 못박힘과 비교해보면, 불교적 감성과 기독교적 감성의 차이가 더 뚜렷해진다. 종교의 정신과 이념은 그 종교의 상징적 조형물 가운데 가장 잘 구현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고통과 추종자들의 비탄의 표현에 집중하는 기독교 도상과 달리, 거의 대부분의 불교 도상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지옥도나 아귀도에서나 고통스러운 도상들을 볼 수 있을까, 불교에서 고통을 표현하는 도상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기는 고행하는 모습의 불상도 있지만, 거기서 강조하는 것은 수행과정에서 겪은 고통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한 노력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으로서의 고통이든, 그것을 없애기 위한 수행으로서의 고행이든, 불교는 고통을 부처님을 부처님답게 만드는 자질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상은 고통보다 고통의 해소에서 오는 적멸의 고요함과 즐거움을 형상화하는 데 전념한다. 혹독한 수행을 표시하는 저 앙상한 몰골의 고행상마저도 미소를 띠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는 아름다운 불상도 많고 거룩한 불상도 많고 거대한 불상도 많다. 특별한 종교적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불상도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신심이 절로 우러나는 불상이 있는가 하면, 오래 보아 아름다운 불상도 있다. 각각의 불상은 저마다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불상의 미적인 아름다움은 진정한 종교적 체험에 대해 부차적일 뿐이다. 불상이 아름다운가 그렇지 못한가는 부처님을 향한 불자들의 예경심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거대하기만 하고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불상 앞에서도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몸을 낮추어 절을 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감성을 깊게 하는 불상이라면 좋은 종교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경에서 색이나 음성으로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했지만, 불상은 우리의 종교적 감성의 깊이를 더하고 마음을 성숙시키는 불모(佛母)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불자들은 자신의 본사에 있는 불상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나의 출가본사에는 작은 인법당에 어울리는 자그마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 대부분 불상이 그 절 주인의 얼굴을 닮는다고 하지만, 그 부처님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불경스럽게도 속가 친구 여동생의 얼굴이 생각났다. 참한 조선미인인 그 동생은 선이 고운 눈썹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부처님이 바로 그런 길고 가는 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탁자 밑에서 무릎 꿇고 예불 드리기를 기다릴 때면, 가만히 부처님 얼굴을 올려보기만 했다. 그 깊은 눈매 속에서 나는 조용히 빛나는 적멸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고요해졌고 그렇게 행자생활의 어려움을 견디며 수행을 익혀갔다.

그 후 몇 년 뒤 개금불사를 하면서 불모(佛母)가 동그랗게 눈썹을 고쳐 그리는 바람에 그 곱고 깊은 눈매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맑고 단정한 모습은 여전하지만 왠지 모르게 요란스러워져 버려서, 요즘은 가끔 본사에 들리는 일이 있어도 그 동그란 눈썹을 보면 조금 불편한 생각이 일어나 그냥 절만 하고 물러나온다.

우리 시대의 불상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과거 우리 조상들이 표현한 그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세속화의 시대에 불상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불상을 오로지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하지만 불상의 얼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수행자들의 얼굴이 아닐까?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를 했지만 그만큼 진실한 얼굴도 드물기 때문이다. 마흔을 넘기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시대의 수행자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우리 시대의 부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형상의 한계에 갇혀서 부처를 만나도 부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형상과 형상 없음 사이에 있는 참된 부처를 만나려면, 형상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고 관념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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