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923호 1월 16일]

 (지난 호에 이어서)
나는 지금은 그렇게 안 하지만 전에는 한번 그렇게 해 보기도 했어요. 그게 스스로 돼야죠. 억지로는 안돼요. 습이 다 녹고 업력이 다 소멸되면 스스로 내가 나를 이익하게 생각하는 법이 없어요. 없어져요. 모두가 나 아님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무리 고생해도, 붙들려서 맞아도 나는 그 사람 탓을 안 했으니까요. ‘아! 나를 부딪히게 해서 단련시키느라고 그러는구나.’ 하고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니까. 죄 없이 맞은 거는 빨리 낫는다고 하는 속담도 있죠. 그렇듯이 금방 괜찮아지고 그래요.
그것을 말로는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여러분한테 그 말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는 본인들이나 아는 거지 제삼자가 다 알 수는 없는 겁니다. 어쩌다가 한마디 이렇게 말하는 거지, 그걸 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말은 “남을 먼저 생각해라.” 이렇게 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은 드뭅니다. 공을 치면 튀어 온다고 그러죠. 분명코 치면 튀어 오는 건데도 불구하고 욕을 막 해 댄단 말입니다. 욕을 해 대면 그 욕한 것이 나한테까지 튀어 오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어느 회사에서, 또 학교에서도 그렇고 어떠한 문제가 있으면 그저 그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면서 ‘둘이 아닌데 저 사람에게도 마음의 불이 들어오게 해서 그렇지 않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관하라고 그러죠.

그러면 사람의 마음이 백팔십도로 달라져요. 그렇게 해서 하나하나 고쳐 나가는 거지 어떻게 그걸 다 고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고치면 누가 좋으냐 하면 자기가 좋거든요, 편리하고. 앙숙으로 지내다가도 편해지거든요. 부모자식지간에도 그렇고 형제지간에도 그렇고, 부부지간에도 그렇고, 그냥 의리가 나빠서 싸우고 하는 것이 다 마음 싸움이거든요. 그 업보로 인해서 모든 게 쌓이고 쌓여서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만났던 과거의 인연들이 또 이 세상에 나와서 다시 만나서 앙숙이 돼 가지고 그렇게 하거든요.
그래서 어떤 때는 신도님들더러 내가 그러죠. “남편을 원망하지 마라. 너도 전에 그랬잖아. 지금 네가 그렇게 당하는 거를 생각해 보면, 금방 당할 때는 알지만, 과거로부터 당해서 지금 현실에 온 것은 너는 몰라. 너도 남을 그렇게 아프게 했어. 그러니까 네 탓으로 돌려. 그러면 그것이 다 소멸돼.” 그렇게 합니다. 사실이구요, 또 그게. 뭐 그걸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의 도리를 빨리 배우려면 이유를 붙이지 마세요. 이유를 붙이면 빨리 일심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것은 일심으로 정진해야 하거든요. 소멸시키는 실천이거든요. 우리가 실천하는 겁니다, 지금. 정진이다 뭐다 이름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실천해 가는 거예요. 소멸시키는 실천요. 그래서 다른 이름은 붙이지도 않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는 여러분처럼 아주 지식이 많고 학식이 많아서 이렇게 여러분한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길이 없는 길을 알기 때문이죠. 길을 알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 가만히 살펴보세요. 내가 아까 아주 중요한 말을 했는데요, ‘물에 가면 주해신이 된다. 모든 걸 자유스럽게 대치해 나갈 수 있는 주해신이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거든요. 기독교 믿는 사람이 “나는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이름이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실천이 중요하지. 그래서 천차만별의 마음은 ‘그 마음이 없는 것이 마음이다.’ 이겁니다. 부처라는 이름이 없는 것이 부처지, 부처라는 이름이 있는 것은 부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북하면 ‘마음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을 했을까요.
그러니까 마음을 자유스럽게 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자유스럽게 실천하지 못한다는 얘기예요. 여러분도 사람이기 때문에 부딪히면 아프고 또 좋고 나쁜 걸 다 뻔히 아세요. 아시는 그대로 행하세요. 그대로 행하시면서 그냥 그렇게 편안하게, 일상생활 속에서 내 몸이 하는 거, 먹는 거, 말하는 거, 사는 거 모두 몽땅 그놈한테다 맡겨 놓고 사시면 얼마나 편리해요. 이 세상이 다 없어진다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해도 돼요. 정말이에요. 여북하면 부처님께서도 그러셨나요? “허허바다에 배를 타고 가는 형국인데, 배는 네 모습이고 배 속에 있는 생명들은 네 중생이니라. 그런데 그 배를 이끌고 가는 선장한테다 진짜로 믿고 맡기고 가만히 있으면 선장이 다 알아서 가는 데까지 끌어다 줄 것을 그냥 ‘관세음보살’, ‘지장보살’하면서 찾고 온통 난리를 치니까 그 배는 뒤집힐 수밖엔 없다.” 이거죠.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마음공부는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허공길의 공부입니다. 우리가 저승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승의 이치를 다 알아서 대치를 해 나가겠습니까?

그, 여덟 달 만인가 일곱 달 만에 애를 낳았다는데 다 죽게 됐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애가 또 몇 대 손이랍니다. 몇 대까지 손이 없었대요. 아, 그러니까 어떡합니까. 그런데 그 부모가 이 공부를 잘 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급하니까 그냥 그렇게 지극하게 오직 그거 하나로만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살아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급하게 자기 앞에 떨어져야만 그렇게 야단법석을 하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급한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허허바다에 그냥 배 한 쪽 타고 가는 형국이거든요. 지금 살아나가는 게 그렇게 아슬아슬해요. 어느 때 차 사고가 날는지, 어느 때 떨어질는지, 어느 때 또 잘못될는지, 어느 때 식구가 어떻게 될는지 그것도 모르구요. 그냥 허허바다에 그냥 가는 거예요. 그와 같은 거예요.
그러니 내 가슴이 얼마나…, 여러분이 들으면 얄팍한 말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가슴이 아파요. 여러분 개개인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만 불쌍하고 가엾은 게 아니에요. 벌레서부터 내려오면서 그 사는 걸 보면 기가 막히죠, 아주. 기가 막혀요, 그냥. 그래서 아마 화성에는 생명들이 다 없어졌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다 그냥 알아서 다 사라져서요.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 뒤로 돌아가서 이렇게 보면 사람 살던 흔적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그거를 안 거예요. 아, 여기서도 살다가, 이 화성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제 살고 살고 부딪히고 부딪히고, 수백 수만 년 가다가 보니까 ‘사람 사는 게 이렇구나!’ 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모두가 그냥 화해 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마음이 보살이 된다면, 왜 저, 은비까비 금비까비 이런 거 텔레비전에서 나오죠. ‘은 나와라 뚝딱, 금 나와라 뚝딱’ 하는 그런 사람, 보살이 그렇게 행을 하거든요. 보살뿐만 아니라 우리도 다 할 수 있죠. 그런데 여러분이 그런 거는 만화 영화에서만이 할 수 있고, 그거는 그저 그려 놓은 거고 텔레비전에서만 나오는 얘기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도 ‘은 나와라 뚝딱, 금 나와라 뚝딱’ 할 수 있는 그런 재질을 가진 인간이에요.

나는 내 수중에 아무것도, 내 수중이 아니라 내 몸까지 없어요. 아주 버린 사람이에요.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버릴 것도 없는 걸 버렸다고 했구나.’ 했어요. ‘버릴 것도 없는 걸 버렸다고 했구나.’ 했다구요. 여러분이 함이 없이 살고 공해서 내가 따로 한 게 없구나. 내가 너무 많아서, 고정됨이 없이 그냥 항상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고, 만나고 또 만나고, 하고 또 하고 이러기 때문에 내가 먹었다고도 할 수가 없고, 내가 산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이렇게 했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돈 벌었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망했다고 할 수도 없어요, 전부. 그렇게 없는 걸 알아야 내가 아주 자유스럽고, 어떠한 게, 뭐 집안 가족이 다 죽는다고 이렇게 와도 그냥 뻔뻔하게 앉아 있을 거예요, 아마.
그래, 우리 신도님들 중에도 때로는 간이 어떻다, 뭐가 어떻다 하고 오죠. 그런데 내가 할 수 없는 말이 있어요. 그건 자기가 해야 할 문제예요. “병원엘 가야 되겠습니까? 안 가도 됩니까?” 하거든요. 그럼 내가 뭐라고 그럽니까? “당신 마음 내키는 대로 해.” 이럴 수밖에요. “오직, 오직….” 하는 사람은 그냥 일어서더라구요. 그런데 “아이구, 이거 당장 이러니까….” 이렇게 하는 사람은 병원엘 가도 못 살아요.

그러니까 그런 거를 누차 보고 알게 된 사실이 ‘아, 모두가 대신 해 줄 수는 없구나.’ 하는 거죠. 다른 건 다 해 줘도 깨치는 거하고, 죽는 거, 아픈 거, 똥 누는 거, 잠자는 거, 먹는 거, 이거 여섯 가지는 아무리 해도 대신 못해 준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지혜가 풍부한 사람들은 가정에서 누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주 마음 태평하게 버젓하게 그거를 그냥 대치해 나가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방방방방 뛰어요, 그냥. 내가 생각할 때는 내 몸뚱이하고 모두 다 그냥 버리면 될 거를, 저렇게 어렵게 고생을 하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살면 얼마나 살고, 또 죽는 날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죽는 걸 겁내고 그러나.’ 하는 생각도 해 보고요.

여러 가지에요. 아주 여러 가지 말 못하는 문제들이 너무 많아요. 내가 이날까지 여러분한테 말을 했어도 정작 할 말 못한 것이 너무 많죠. 내가 해서 될 말이 아니거든요. 여러분이 스스로 알면서 점점 이렇게 돼야 이게….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대로 같이 해 주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같이 해 주고, 길면 긴 대로 같이 해 주고 짧으면 짧은 대로 같이 해 줘라. 이것이 바로 모가 나지 않고 둥근 거니라.” 때로 이렇게 자기 몸을 보면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몸은 어디 아픈 걸 더 잘 알 거예요. 기운이 없다거나 입맛이 없다거나 또 어디가 아프다거나 이런 거는 더 잘 알죠. 딴 사람보다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알면 아는 대로 대치를 빨리빨리 해 나가야지, 이거는 대치를 할 생각은 안 하고 이거 어디가 어떻게 돼서 내 몸이 이런가. 병원에 가서 좀 검진을 해 봐야 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시간을 오히려 더 늦추는 거예요. 빨리 해결을 할 것도 말입니다.

제 말이 이해가 안되십니까? 만약에 제가 어려서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 하면 벌써 죽었지 여지껏 살지 못해요. 저도 사람이니까 때로는 어디가 아프기도 하겠죠. 그럼 ‘이렇게 아파서 돼? 아프게 만들면 너도 죽고 나도 죽어.’ 허허허…. 아이, 이 몸뚱이를 집을 삼고 사는 생명들이 전부 작용을 하고 있는데 저도 죽고 나도 죽지 그럼 누가 안 죽을 수 있나요? 그런데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해?” 이러거든요. 어때요? 죽는 거를 그렇게 대단스럽게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요, 내일 죽든 오늘 죽든 이따가 죽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이 제일 문제가 되는 게요, 부모를 두고서 자식이 먼저 죽는다거나, 또 부모가 자식들을 많이 두고서 먼저 죽더라도, 죽으면서 그 자식들을 괴롭힌다거나 이런다면 그 부모된 마음은 상당히 괴로울 거예요. 그래서 빨리 죽는 방법, 그것도 생각 안 할 수가 없죠. 그렇죠? 하하하…. 남을 괴롭게 하면 나는 그 몇십 배, 몇백 배 더 괴로우니까요.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실천을 하는 것이 자비에요. 실천은 자비고 사랑은 말이에요.

그래서 사랑을 안 하더라도 사랑한다고 해야 상대가 좋아하니까 “사랑한다.” 이렇게 좋게 말해 놓고 자꾸 그러다 보면 진짜로 실천이 되죠. 그러면 그게 자비에요. 그래서 그 한 가정이 화합해서 좀 화목하게 살려면 거짓 아닌 거짓도 많이 해야 되거든요. 거짓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더라도 그 가정을, 상대방을 편히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참 당신 고생해. 사랑해.” 이렇게 말 한마디 하는 데서 그 웅크려졌던 모든 마음이 다 스르르르 녹거든요. 그 마음이 녹으면요, 애들한테도 신경질 안 내요. 또 부모 모시는 사람은 부모한테도 신경질 안 내구요. 그런데 웅크려진 걸 더 웅크려지게 말 한마디를 퉁 해 버리면요, 그 양쪽을 다 불안하게 만들게 되죠. 한 가정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지키고, 또 나라 일과 사회생활을 잘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잖아요. 고생을 아무리 했어도 말 한마디만 그렇게 잘 해 주면 그 고생한 게 다 스스로 녹아지는데, 돈이 드니 못해요, 왜 못해요, 글쎄? 그런데도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마음인가 보죠?

그러니까 거짓이 거짓이 아니라, 우리는 지혜롭게 방향을 이끌어나가는 큰사람이 돼야 되겠다 이런 거죠.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하는 게 아니에요. 뭐 자기가 하고 사는 거예요? 그 업식이, 업보가 거기에 뭉치고 뭉쳐서, 화가 불끈 일어나면 그냥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막말을 해 대는 사람도 있고 그렇죠. 그게 그 사람이 틀린 게 아니에요. 뭐 질문하실 거 있어요?
여러분이 나한테 ‘아이구, 저이는 저런 말만 만날 한다’고 재미없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인생을 어떡하면 단 한 시간이라도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저녁에 자리에 누우면 참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돼야지, 불편해서 그냥 잠도 못 자고 일어났다 앉았다 이러시면 그게 사람 사는 겁니까, 어디?


이 마음공부를 빨리 배우려면 이유를 붙이지 마세요.
이유를 붙이면 일심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것은 일심으로 정진해야 하거든요.
우리가 실천하는 겁니다, 지금.
정진이다 뭐다 이름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실천해 가는 거예요.
소멸시키는 실천 말입니다.



질문자1(남): 스님께서는 늘 사람 몸 받기가 어렵고 불법 만나기가 어렵다고 그러셨는데, 공부를 해 가면서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인데 뭔가 알고 가야 되겠다 싶어서요, 공부 좀 한다고 하다 보니까 스님께서는 늘 “어묵동정 행주좌와가 모두 선인데 무슨 특별한 선을 하느냐.” 이렇게 일러 주셨어요. 그런데 요즘이 안거 철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많은 스님들께서 안거 행을 하시는 그런 뜻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큰스님: 안거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거지, 이 마음공부 하는 데는, 선에는 안거라는 것이 특별히 없습니다. 왜냐하면 해제를 했다 하더라도 선이고 안거를 했다 하더라도 선이에요. 해제했을 때는 지구가 안 돌아가고, 또 안거했을 때는 지구가 돌아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사는 것도 그래요. 안거했을 때는 우리가 살고 있고 해제했을 때는 우리가 죽나요? 그게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이 마음공부 하는 데는 누워서 잘 때 와선, 서서 다닐 때 입선, 또 일을 할 때 행선, 앉아 있을 때 좌선, 이것이 전부 네 가지가 송두리째 그냥 요만큼도 끊어지지 않고 참선이 된다 이거죠.

질문자1(남): 예, 잘 알겠습니다. 스님 말씀 들으니까 우리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선의 기회를 갖지 않아도 된다, 그런 말씀이시죠?

큰스님: 네. ‘선이라는 이름 없이 참선을 하고 간다, 끊어지지 않게.’ 이런 거죠.

질문자1(남): 네,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는데요, 먼저 답변을 해 주셨어요. 공부하다 보니까 삼독(三毒)을 좀 없애야 되겠다 싶어서 공부를 하면서 지켜보는데, 탐(貪)이나 치(癡)는 미리 예방을 하고 들어가니까 좀 덜한데요, 진(嗔)은 어느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튀쳐나와서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을 막 짓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오늘은 삼독에서 벗어나는 하루를 지내야지.’ 하고서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튀쳐나옵니다, 진(嗔)이라는 놈이. 그거를 막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큰스님: 하하하…. 그래서 내가 항상 이러지 않습니까. 잘못 나오든지 잘 나오든지 간에 잘 나오는 거는 ‘주인공, 감사해.’ 하고, 또 잘못 나오는 거는 ‘너만이 잘 나오게 대치할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 놓으란 얘기죠.

질문자1(남): 놓고 또 놨는데요, 결과적으로 짓고 말았습니다, 업을. 그러니까 이제 그래도….
큰스님: 업을 지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업을 짓는 거죠. 이게 내가 함이 없이 하는데 업이 어떻게 지어집니까? 그 지혜가, 머리의 지혜가 안 돌아가는 게 바로 업이에요.

질문자1(남): 예를 들어서요, 어떤 경계가 왔을 때, 욕을 하고 손찌검을 했을 때 이것을 미리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습니까, 하는….

큰스님: 벌써 그렇게 벌어지려고 할 때에 ‘주인공, 너만이 그러지 않게 할 수 있어.’ 할 때는 반드시 손찌검을 하지 않아도 돼요. 근데 그것을 못 믿거든요. 분이 이런 게 일어나는 게 그냥 주먹부터 가지, 자기가 자기를 다스릴 수 있나요?

질문자1(남): 글쎄, 그래서요, 이제 탐심 같은 거는요 아, 이것은 탐에서 왔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에서 왔다 하는데 진이라는 놈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생각할 여유도 없이 튀어나가기 때문에 어떤 훈련을 하면 되나 해서 여쭤 봤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큰스님: 훈련은 그 훈련밖에는 없어요. 그냥 업 지은 대로 입력이 나오는 거를 현재 나오는 그 자리에다 되입력하는 것밖에는 없어요.

질문자1(남): 네,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큰스님: 그리고 옛날에, 그 얘기를 하시니까 생각나네요. 옛날에 어느 성현이 제자들한테 금 한덩어리씩 주면서요, “너 이거 가지고 밑천을 해서 더 늘리든지 어떻게 해 봐라.” 그러고 줬거든요. 그 중에 한 사람은 그냥 그거 없어질까 봐, 망할까 봐 금덩어리를 장 속에다 꼭 넣어 놓고는 꺼내지도 않고, 한 사람은 그걸 가지고 가서 늘려서 금덩어리 몇 개를 만들고, 한 사람은 금덩어리를 가지고 가선 망하고 그랬대요. 그래, 세 사람 중에 어떤 게 제일 괜찮겠어요?

대중속에서: 늘리는 사람이 제일 좋습니다.
큰스님: 하하하…. 그런데 망한 사람은 그 마음의 지혜를 다 얻어서 금덩어리보다 더 중한 거를 얻었더래요. 그리고 또 금덩어리를 많이 불린 사람은 지혜로워서 그렇게 금덩어리를 많이 불렸구요. 또 장 속에다 넣어 놓고 꺼내지도 않은 사람은 옹졸해서, 마음이 지혜롭질 못해서 자기 거 그대로 그냥 거기다 놓고 살기 때문에 보살이 못 됐다잖아요. 그러니까 이 도리에는요, 악이다 선이다 이런 게 없어요. 왜냐? 그냥 수시로 대치해 나가기 때문이죠.

그럼 오늘 마칠까요? 제발 빕니다. 그저 정진이라는 말도 말고 그냥 그저 끊임없이 닥치는 대로 모든 건 나오는 대로 그 구멍에다가 다시 놓으세요. 감사하다고 놓고, 또 ‘너만이 대치할 수 있어.’ 하고 놓고요. 또 좀 조용하게 앉아 있을 때는 ‘너만이 네가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 이렇게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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