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山窟의 無影樹 〈1〉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각성 스님

方山窟의 無影樹 〈1〉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각성 스님
근대 한국불교의 선지식 한암 대종사의 법을 이은 탄허 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맞았다. 문도회와 월정사는 40년에 걸쳐 〈신화엄경합론〉을 번역하는 등 역경과 교육 등 한국 현대불교사의 외연을 넓힌 스님을 기리는 증언집 〈방산굴의 무영수ㆍ方山窟의 無影樹〉의 발간을 앞두고 있다. 책은 김광식 동국대 교수가 법제자를 비롯한 스님의 생전 지인 62명을 만나 그들로부터 들은 스님의 고뇌와 행보, 사상, 가르침, 인연담 등을 기록한 것으로, 본지에 먼저 책의 신간(身幹)을 정리해 연재하기로 한다.
제호인 ‘방산굴의 무영수’에서 방산굴은 스님의 생전 조실채의 당호로, 이통현(635~730)이 〈신화엄경론〉을 지은 장소인 중국 북경의 ‘방산토굴’에서 가져온 것이며, 무영수는 그림자 없는 나무란 뜻으로 불교의 공(空) 사상을 뜻하는 것이다. 제호의 ‘방산굴’은 스님의 친필 현판에서 가져왔다. 결국 ‘방산굴의 무영수’는 스님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으로, ‘탄허’를 찾아갈 수 있는 새로운 안표(眼標)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각성 스님 (해인사·통도사 승가대학장 화엄사(부산) 회주, 화엄학연구원장)
한암 스님, 화엄경 현토 번역 부촉
각성 스님, 〈신화엄경합론〉번역 증의
통화사상과 회통사상 일맥상통
월정사, ‘오대산 수련원’ 계승해야

- 각성스님은 탄허 스님의 강맥 제자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 인연의 출발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나요.
1957년, 저는 관응 큰스님에게 구사론과 유식을 배우려고 대구 은적사에 가 있었어요. 한 달을 지키고 있었는데, 관응 스님이 오시지 않았어요. 그래 스님이 어디에 계신가 알아보니 예천 연방사에 계셨습니다. 관응 스님은 은적사 주지 발령은 받았지만 은적사에 오시지 않고, 당신에게 전강해주신 법사 스님인 최취허 스님과 인연이 있는 연방사에 계셨어요. 그래 저는 연방사로 관응 스님을 찾아갔지요. 그런데 거기도 공부하는 분위기가 여의치 않았어요. 그러니깐 관응 스님이 탄허 스님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을 써주시면서, 여기 있지 말고 오대산수도원으로 가라고 해서 탄허 스님을 찾아 월정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탄허 스님은 강원도 종무원장, 월정사 주지를 겸하면서 전국의 수재를 모아 놓고 수도원의 강의를 직접 지도하셨어요.

- 스님은 1969년 부산 송정의 삼덕사라는 곳에서 탄허 스님의 화엄경 교열 작업에 참여하셨지요. 그 참가 과정, 내용을 듣고 싶어요.
저는 그 작업에 참가하기 전에는 김천 개운사에 있으면서 종단에서 만든 역경원의 번역을 했어요. 그 무렵 수원 용주사에 역장(譯場)이 생기고, 거기에 역경사 양성소가 생겼지만 저는 역경사 양성소를 거칠 필요도 없다고 해서, 심사를 해서 바로 합격하고 번역을 했어요. 무비, 통광, 정안, 성파스님은 용주사와 봉은사의 역경사 양성소 과정을 거친 원생 출신들이지요. 그렇게 번역을 하고 있는데 정무 스님이 영은사에를 가니깐 큰스님(탄허)께서 8년간 번역한 원고의 수정 작업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같이 할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걱정을 하시드라는 것을 나한테 와가가지고 말을 했어요. 나는 정무 스님에게 그 말을 듣고서는 내가 자천하는 식으로 자신만만하게 내가 하면 된다고 큰소리를 쳤어요. 사실 그 당시까지는 화엄경론을 안 보았지만 자존심이 강해서 대장경을 볼 때와 같이 하면 되지 않겠는냐고 했어요. 정무스님이 내가 한 말을 영은사로 가서 큰스님에게 전달했어요. 그랬더니 탄허 스님께서 “각성 수좌가 수도원에 와서 공부를 하기는 하였는데 그 이후로 대성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하느냐?” 하시면서 “그러면 같이 해보자, 일단 와봐라.”고 해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부산 송정의 삼덕사라는 절에서 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교림 사장인 우담이 삼덕사로 스님의 번역 원고를 담은 캐비넷을 실어오고 자리잡고 있게 되었죠. 거기에서 꼬박 6개월을 작업했어요. 인허 스님은 기도를 했고, 윤창화는 시봉을 했고, 대외적인 일은 우담이 담당했어요.
그때의 작업은 주로 내가 하고, 거기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했어요. 무비, 통광, 성일 스님이 있었고 자민 스님은 가끔 오고 그랬죠. 그 분들은 누가 낭독하면 그것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읽다가 틀린 것이나 이상한 것을 내가 지적하면은 큰스님이 직접 고치십니다. 내가 보기에 “이런 것은 이렇게 고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고 진언을 드리면 큰스님이 고쳤지요. 그때에 다른 사람들은 한마디 말도 못했어요. 그냥 듣고 공부한거지. 그리고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있었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왔다 갔다 하면서, 참가했어요. 나갔다가 한두 달 있다가 다시 오고 그랬죠. 나는 증의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때에는 밥만 먹으면 하루 종일 작업을 했어요. 꼼짝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잠이 부족해서 간혹 졸면서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 문장은 제대로 교열, 증의를 못한 것이 아마 있을 것입니다.
- 탄허 스님은 수 많은 고투를 이겨내고 1975년 여름에 〈신화엄경합론〉을 발간하였어요. 그 서문에 수고한 대상자에 각성스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탄허 스님이 그 책을 펴내고 나서, 나에게는 책 한질을 주셨지. 그런데 그 서문에는 나와 다른 스님들과 똑 같이 교정한 것으로 나옵니다만, 난 원래 증의를 한 것입니다. 그거는 탄허 스님이 프라이드가 쎄어서, 내가 증의한 것을 밝히면 스님의 위상이 격하될까봐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교정한 것이 아니고 증의를 한 것입니다.
현장 법사의 제자로 원측스님이 있지 않습니까? 원측스님은 신라출신 승려로 범어에도 능통한 스님인데 이 스님이 현장스님이 번역한 것을 증의했어요. 그와 같은 내용으로 나도 탄허 스님의 것을 증의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를 교정한 것으로 기술한 것은 잘못되었어요.

탄허 스님이 주석했던 월정사 방산굴 전경
- 탄허 스님은 화엄경 발간 이후에도 사교, 대교과정의 경전뿐만 아니라 다양한 책을 번역하고 펴내셨는데, 그런데에는 참여하지 않았나요.
그 이후의 다른 경전의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았어요. 하나도 안했어요. 그때에는 거사들이 했고, 난 안했어요.

- 탄허 스님은 화엄사상을 강조하셨습니다.
탄허 스님이 화엄사상을 강조하시게 된 발단은 일제시대 때에 한암스님이 상원사 수련소에서 수련생들을 가르칠 때에 탄허 스님이 중강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한암스님의 입회하에 탄허 스님이 석사를 하셨어요. 그때 한암스님이 탄허 스님에게 화엄론과 화엄경을 현토, 번역할 것을 부촉한 것이 큰 인연이 됐어요. 그래서 큰스님께서 화엄경을 보시게되니까 자연 화엄사상에 정통하시게 된 것이죠. 화엄경은 부처님의 최고 경전으로 더할 나위없이 진지하고 풍부하게 부처님 사상을 설명한 것이죠. 탄허 스님께서는 화엄경은 일승원교로 보시고, 부처님 사상의 최고의 경전으로 그리 생각하셨죠. 그러나 스님은 법화경과 열반경은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번역도 안하셨어요.

- 각성스님은 통화불교, 통화사상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이번 기회에 그것을 설명해주시지요.
통화불교 이것을 말하라면, 저는 우선 현 시점에서 본다면 공산주의이니 자본주의이니 하는 이것들로 인해서 인간들의 분열, 갈등이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런 것도 통일, 화합이 돼야 한다고 보고 우리의 남북관계도 통일, 화합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뜻이 있는 것입니다. 또 일본, 중국, 인도, 한국 불교 전체가 법성원융 무이상이라는 그 말씀처럼, 부처님의 원융법에서 본다면 통화 아닌게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지역별, 나라별의 특성이 관습에 의해서 다른 면이 있지만, 그 부처님 법에서 본다면 통일, 화합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제자백가, 인도의 부파철학, 제가의 외도, 중국불교의 다양한 철학 이런 것들도 근본은 하나다, 그것도 통화아닌게 없다는 그런 뜻을 제가 외친 것입니다.
내가 이런 주장을 담은 책을 별도로 쓴 것은 없지만, 강의한 것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뜻에 따라서 제가 내는 책은 통화불교 시리즈, 통화총서라는 명칭을 쓰고 있죠.

- 스님의 통화사상과 탄허 스님의 유불선 회통 사상과 같은 점, 다른 점이 있나요.
물론 제 주장과 탄허 스님의 주장과 같은 점이 있어요. 사실은 원효의 화쟁사상은 지금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확대된 것은 아니에요. 지금은 그것을 확장을 하고, 넓혀서 말들을 하고 있지만. 통화사상은 범위가 굉장히 넓고, 동서양과 동서고금의 모든 것을 총망라하여 통화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주장하는 통화는 탄허 스님의 회통사상에게서 받은 영향이 있죠.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말은 다르지만, 뜻은 서로 통하지요.

- 탄허 스님의 정체성을 말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요. 스님을 강사, 선사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탄허 스님의 정체성, 성격은 복잡해요. 사실은 김선생의 말씀처럼 탄허 스님은 전통적인 강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방에서 장좌불와를 한 선사도 아닙니다. 그냥 보면 석학, 학자이면서 유불선 삼교에 능통한 특이한 분이시지요. 그리고 유불선을 회통하시면서 이것만이 최고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아이디어를 갖으셨지요.

- 각성스님의 삶에서 탄허 스님의 존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나로서는 탄허 스님을 처음 공부를 할 때에 만났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래서 저는 유불선을 재확인하였고, 내가 미쳐 보지 못한 것을 혼자 읽어서 보게 되었고, 회통하는 것에 영향받아서 나도 모든 것을 내것으로 만들 수 있었죠.
나는 명안존자, 석학들의 저술을 보면 그것들을 다 나의 것으로 만들어, 내 속에서 소화를 시켜 버립니다. 탄허 스님의 영향, 가르침은 내 마음에 분명하게 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의 선에서 받들고 인정하지요. 저는 탄허 스님과는 다른 저대로의 길, 지향, 노선이 있어요.

- 탄허 스님은 선지로써 경전을 해석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실 불교를 깊이 알고 보니 교를 제대로 알려면 선도 알아야 하고, 선을 제대로 알려면 교도 알아야 합니다. 한쪼가리, 반쪼가리만 알아서 교와 선을 안다고 할 수는 없어요. 정의를 해보면 교와 선은 둘이 아니고, 교가 선이고 선이 교입니다. 선교가 같은 것입니다.

- 탄허 스님은 역경사에 한 획을 그으셨지요. 혹시 탄허 스님의 위상에 대해서는 의견이 없으신가요.
한국 역경사에 위상은 분명하지요. 한동안은 역장장(譯場長)도 하셨지. 현대불교에 위상은 있지만 세월이 가면 점점 잊혀지고, 스님의 책과 문헌만이 남아서 전해지는 것이지.

대담 / 김광식 동국대 교수
- 성철 스님과 같이 활동하셨는데 성철스님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영향력이 지속되는 것 같지만, 그에 비해 탄허 스님은 잊혀진 것 같습니다.
성철스님은 부산, 대구, 창원 등 남쪽 지방에 신도수가 많았죠. 그리고 해인사라는 배경과 종정을 하신 파워가 있었습니다. 큰스님이 되려면 재력, 인력, 힘 이런 것들이 겸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탄허 스님은 많이 약하시지.

- 탄허 스님의 정신, 사상 이런 것이 계승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요. 탄허 스님을 계승하려면은 내 생각으로는 월정사 도량에 강원이 만들어져야지 않을까 봅니다. 탄허 스님이 지향하신 소수 정예의 엘리트를 길러내는 오대산수도원 정신이 구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부는 10년은 해야 됩니다. 불교를 포함한 동양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없어서 아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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