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베드카르는 누구인가 (하)

 

▲ 인도 델리대학교에 있는 암베드카르 흉상

신분때문에 박사학위 무용지물 되기도
美·英 유학, 변호사·인도 초대 법무장관

인도 내에서 불가촉천민에 대한 극단적 차별이 19세기 까지 성행하던 당시 암베드카르 역시 불가촉천민으로 1891년에 태어나 그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교실에서 다른 학생들과 떨어진 구석자리에 앉아야 했으며 산스크리트를 배우는 것이 수드라계급과 불가촉천민에게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원하던 산스크리트 대신 페르시아어를 배워야 했다.

또한 학교에서 목이 마를 때도 자유롭게 물을 마실 수 없었는데 그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오염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그는 학교 급사가 와서 수돗물을 틀어줘야만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은 어린 암베드카르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특정한 직업에만 종사해야 했던 불가촉천민들은 영국의 인도지배를 계기로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암베드카르의 아버지도 영국군대에서 근무하게 됐다. 자식교육에 열의가 대단했던 암베드카르의 아버지는 누이의 귀금속을 저당 잡혀서라도 아들의 책을 사주곤 했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는 불가촉천민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어서 축하모임이 열렸다. 열심히 공부하던 암베드카르를 눈여겨보고 있던 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이 모임에 참석해 한 주정부의 장학금을 주선해주었다. 이 장학금으로 그는 대학을 졸업했고 해외유학까지 떠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에서 공부하던 1917년에 그는 장학금을 지금한 주정부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주정부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그 당시 인도에서 드문 박사학위 소지자였지만 불가촉천민이라는 신분은 그의 학력과 경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그는 사무실에서 물을 마실 수 없었으며 사무실의 사환조차 그와의 신체접촉을 꺼려 서류를 건네야 할 때는 멀찍이 떨어져서 던져주곤 했다.
또한 불가촉천민에게는 누구도 방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으므로 배화교도((拜火敎徒)라고 거짓말을 하고 하숙을 얻었다가 나중에 사실을 알고 분노한 배화교도들에게 폭행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에 좌절한 그는 결국 몇 달만에 주정부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암베드카르는 그 이후 봄베이에 있는 한 상과대학의 교수로 임명됐다. 그러나 상황은 지성의 요람이라는 대학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그는 교수 휴게실에 놓인 주전자의 물을 마실 수 없었고 동료교수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못다한 공부를 마치러 다시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에서 그는 다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했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암베드카르는 두 개의 박사학위와 변호사 자격을 가진 최고의 지식인이 되어 인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인도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불가촉천민들을 고통에서 구하려는 활동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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