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고 푹 잔다면 그것이 진짜로 죽는 것이다

 

▲ 그림 최주현

마음공부에도 단계가 있는지요.
문)
마음공부 하는 데도 단계가 있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공부하면 좀더 빠르게 나를 보게 될는지요?
답) 물론 계단 없는 계단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가 완전히 죽었을 때 자기가 탄생을 하는 겁니다. 자기 껍데기를 벗고 말입니다. 다 태워 버리고. 그랬을 때에 오관을 통해서 거기 말리지 않고 그 오관을 자기가 부릴 때 그때 도력이라고 합니다. 그때에 지혜와 더불어 선정과 자비가 포함해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해도 그때에 나를 세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관을 통해서 부릴 때, 즉 말하자면 오신을 부릴 때 결국 그것은 자기가 다시 보림하려고 그걸 체험하고 돌아가면서 또 놓게 됩니다.

그런데 ‘나 한 번 죽기 어렵다 했더니 나 한 번 죽기는 쉽더라. 나 한 번 죽기는 붙들고 갈 거라도 있어서 그래도 쉬웠는데 두 번 죽기 어렵더라.’ 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내가 한 번 죽어서 탄생을 해서 어린애 임신해서 탄생은 됐으나 도대체 물리를 몰라요. 어린애가 나온 것처럼. 다 자라야 어른 노릇을 할 텐데. 그래서 어른 될 때까지, 성장할 때까지 보림을 다시 해서 놓고 성장을 시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그래 성장을 다 시킨 뒤에 또 더불어 같이 죽기 어려워라 하는 겁니다. 같이 죽어서 그게 다 됐다면 더불어 같이 나투기 어려워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열반까지 이끌어 가는 둘 아닌 한 길인데, 길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 디딜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다가 손 없는 손으로서 닿을 데 없는 닿을 데 있는 데까지 아니 닿는 데 없다 이겁니다. 그르고 옳은 게 하나도 없어요. 만약에 그르다 옳다 이거를 분리한다면 반드시 이건 어긋납니다. 둥그런 그릇에 네모난 뚜껑 덮는 거나 한가지죠.

예전에 이런 말이 있었죠. 어느 사람이 와서 “이것이 옳습니까?” 하니까 그르단 말은 하나도 안 하거든요. “어떤 게 정법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응. 그것도, 그것도 옳다.” “저 얕은 산은 저 높은 산하고 어떤 게 차이가 납니까?” “얕은 산도 옳고 높은 산도 옳다.” 그래서 한 번 죽기는 어렵다 했는데, 한 번 죽기는 쉬운데 같이 죽기는 어렵거든요. 그건 또 둘째라. 전부 같이 나투기 어렵다 이겁니다. 이 뜻을 말로만 휑하게 아는 게 아니라 내가 실천을 할 수 있는 그런 게 문제예요. 거기에는 티끌 하나 붙질 않아야, 그르고 옳은 게 붙질 않아야 합니다. 이런 공부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다가 ‘아 저건 틀리다, 저건 옳다.’ 그런 걸 가지면 절대 이건 할 수 없어요. 미지수의 그것을, 한 구녁도 없고 티끌도 없는 그걸 한숨에 찰나에 뚫을 수는 없어요. 물론 그렇게 해 나가다가 점차적으로, 점차 뚫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죠. 허나 미해질 수도 있거든요. 하도 따지니까. 왜 그렇게 달기는 좋아하는지.

우리가 한번 ‘야, 참 너 만나서 좋구나.’하는 그 소리가, 아주 웃으면서 그 소리 한번 하는 게 몇 근이나 될까요. 나는 만약에 그르고 옳은 것을, 그래서 ‘선을 지킨다면 선의 업이 있고 악으로 간다면 악의 업이 있다. 선과 악을 다 놔라.’ 이러고 싶은 거예요. 잘되고 못된 거를 다 놓지 않는다면 그건 치우치게 되죠.
우리 지구도 부동한 자세로서의 그 긍지를 가지고서 지축이 흔들리지 않고 있으면서 사방에서 조여드는 그 자체로 인해서 자석과 같습니다. 어느 거 하나 붙어도 타 버리고 말죠. 타 버리는 관계상 살아난다 이겁니다. 이 유생 무생이 다 이렇게 해서 살고 있는 이 원리를 왜 모릅니까. 우리 인간 하나 하나도 혹성이다 할 수 있죠. 별성이다 이겁니다. 한 사람의 한 점의 마음의 불덩어리가 온 우주 세계를 다 집어삼킬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집어삼킬 수 있는 그 오묘한 마음을 가지고 만날 저울질만 하고 있으니 이것은 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나와서 저울질하다 간다면 저울질밖에 못하지 어떡합니까. 차원에 따라서 끼리끼리 모두가 그렇게 모이는 거죠, 뭐. 이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만 하지 말고 내 내면을 볼 수 있을 때, 내공을 볼 수 있을 때 홀연히 그 내면으로 하여금 천리도 요 눈앞이죠. 조그마한 고 불씨 하나가 삼천대천세계를 집어삼킨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것저것 따지고 뭐 남는 게 있어서 몽탕 다 태워 버리나요? 본래 태워 버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그러는 거죠. 마음으로 그렇게 쌓아 놓으니까. 무조건이지, 뭘 이렇게 달고 저렇게 달고, 그게 도대체 몇만 근이나 된다고.

나는 그전에 어느 스님한테 가서 “스님! 얼마나 가면 죽겠습니까?” 하니까 “눈 뜨고 푹 자면 돼. 죽는 거야, 그게.” 이 말씀 한마디가 참 실감났어요. 눈 감고 자는 거는 자는 게 아니죠. 눈 뜨고 자야, 얻다가 시장바닥에 갖다가 팽개쳐도 우뚝우뚝 서게 되죠. 잘된 거 못된 거를 남의 탓으로 돌려서도 아니 되고, 또는 잘된 거 못된 거를 건져 들어도 아니 되고, 잘된 거 못된 거를 일일이 그걸 계산해도 아니 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똑똑하더라도 좀 겉으로는 무식한 척 둔한 척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공부는 둔하지 않고는 도대체 될 수가 없거든요. 벌써 오관을 통해서 이 사량으로 전부 알거든. 이 머리로 다 알아 버려요. 감각이니 지각이니, 보는 거 듣는 거 이게 기계적으로 다 있는 거거든, 이게. 언제 그놈의 오는 거, 헤아릴 수도 없는 게 그냥 스쳐 가는데 언제 그놈의 걸 세웁니까.

그저 모든 게, 이 세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건 자기 탓이에요. 이 세상에 자기가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봤고 자기가 거기 갔기 때문에 들었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되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그렇게 상황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게 내 탓입니다. 못난 내 탓. 잘나지도 않았고 못나지도 않았고 그저 그대로 내 탓이다 이겁니다. 그 내 탓이라는 한마디의 뜻이 눈 뜨고 자는 일이에요. 가정에서도 무슨 언짢은 일이라든가 부부지간이라든가 자식지간이라든가 모든 일에 대해서 말을 참 이익하게, 상치 않게 말을 해 줄 뿐 아니라 말을 해서 상할 일이라면 하지 말고 안에다 굴려서 놔야 된다 이겁니다, 내공에다. 모든 걸 내공에서 나오는 건 내공에다 다시 놔야 됩니다. 잘된 거는 감사하게 놓고 안된 거는 안돼서 맡겨 놓고. ‘나는 하겠다, 못하겠다. 이런 것이 공부다.’ 이런 거 다 놔야 됩니다. 급하다는 거까지도 놔야 돼요. 그렇게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나온 자리, 내가 낳기 이전 자리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전 자리를 알게 되면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지만 말입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자기 탓이에요.
이 세상에 자기가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봤고
자기가 거기 갔기 때문에 들었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되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그렇게 상황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 모든 게 그저 내 탓입니다.
그 내 탓이라는 한마디의 뜻이 눈 뜨고 자는 일이에요.

염화미소의 공안에 대해서
문)
『법화경』에 보면 “백만 대중이 부처님께서 전법의 설법을 하신다고 하니 손에 식은 땀을 쥐고 눈만 반짝거리고 숨 하나 쉬지 않고 잠잠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대범천왕이 드린 꽃가지를 들고 법단에 오르시자마자 그 꽃가지를 번쩍 들어서 대중에게 보일 뿐, 일언반구의 말 한마디가 없었다. 이때 백만 대중은 그것이 무슨 영문인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중 단 한 사람 마하가섭이 그 이치를 알았다는 표정으로 빙긋이 웃었다.” 이렇게 나와 있는데, 그 염화미소의 공안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꽃 한 송이로 마음을 전한 이치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한데 좀더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

답) 백만 대중이라고 했습니다. 백만 대중 하면은 벌써 그건 꽃 한 송이로 표현이 됩니다. 백이라는 숫자도 없고, 만이라는 숫자도 없습니다. 대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전체 포괄된 하나에서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 평상심입니다. 이 평상심에 그 모두를 한꺼번에 든 자체의 꽃 한 송이는 꽃으로 보아서는 안 되죠. 그 마음을 드러낸 것이죠. 그 전체적인 포괄된 하나의 꽃을 드는 순간, 벌써 꽃은 들기 이전의 평상심이지요. 그렇다면 평상심에 전체적인 것 하나를 이렇게 내보일 때, 벌써 가섭 존자는 그것을 같이 포함해서 전체적인 하나를 또 웃음으로서 들었습니다. 그랬을 땐 이게 어디 전체가 둘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님과 가섭 존자 두 마음만 같이 혼합이 된 게 아니라 전체적인 혼합입니다.

여러분도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 든 이유와 또 가섭 존자가 씽긋이 웃은 이유를 소리를 들어서 다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귀로 들었을 때, 그것이 무엇인가 하기 이전에 우리가 ‘아! 그랬다더라. 그것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랬을 거다.’ 이렇게만 그저 귓가에서 들어서 넘기고 말곤 이렇게 하죠, 모두가. 그런데 부처님이 그 꽃 한 송이 들 때, 그 꽃 한 송이에 어떠한 것이 거기 포함돼서 그게 방편으로서 꽃 한 송이가 번쩍 들렸을까요? 그 꽃 한 송이에 꽃 한 송이 있는 게 아니라 꽃을 들었다는 데에 문제는 있습니다. 그리고 웃는 얼굴이 아니라 웃었다는 그 가섭 존자의 문제가 있죠. 그런데 이것은 가섭 존자와 부처님과 그 꽃 들은 거하고 말이에요, 도대체 그 꽃도 없고 웃은 것도 없었어요.

그것은 왜냐하면, 그 도리를 간단하게 비유를 하자면, 항상 그거를 내가 얘기해 드려도 여러분이 이론으로 듣는다면 이론일 것이고, 누구나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게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 전체가 이해가 안돼요. 없다고 해도 이해가 안되고, 있다고 해도 이해가 안되고, 웃었다 해도 이해가 안되고, 꽃을 들었다 해도 이해가 안됩니다. 즉 말하자면 한자리! 하나를 번쩍 쳐들 때는 벌써 주고받는 사이 없이 가섭 존자가 법을 이어받았다. 한자리를 말하고 공심을 말한 거죠.

그래서 항상 그런 말을 하고 있죠. 공심, 공용, 공체, 공식. 이것을 항상 얘기하죠. 그럭하는 데에 그 묘심, 정법안장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법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때는 여러분이 정법이라고 하는 거 다르고, 그분이 정법이라고 하는 그 말이 다른 거예요. 왜 그게 다른 거냐. 깨닫지 못하고 정법이라고 하는 거는 그건 말로 떨어지는 거고, 그분이 정법이라고 한 것은 말없이 꽃 한 송이 든 게 바로 그게 정법이 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러한 문제가 무슨 공심이니 공용이니 공체니 이런 것이 귀합된 하나의 근본을 가지고서 한번 근본을, 즉 말하자면 꽃 한 송이로 비유해서 탁 들었을 때는 우주 전체가 다 들린 거예요.

그랬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앉아서, 몸이 다녀서 전부 가정이나 또 사회, 국가, 세계, 이렇게 다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지금 무루의 법, 유루의 법이 이렇게 등장을 하고 있는데 저 숱한 별들이 모두가 나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만약에 깨달아서 둘이 아니라고 할 때, 그 모두가 돌 하나도 나 아님이 없을 때에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묘심이 되면 묘용을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 자체가 사실은 어마어마한 얘긴데, 어마어마한 작용인데도 우리는 그걸 느끼질 못하기 때문에 거짓으로 듣고 넘어가요, 그냥. 그 실감이 안 나니까.

소인은 죽 끓고 밥 끓는 거 쫓아다니면서 그거 냄새나 맡지만 대인은 그런 데 여념이 없습니다. 이 뜻은 어디에 문제가 있느냐 하면은, 즉 말하자면은 무루에,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그 공심의 묘용이 다 나인 거예요. 나라고 했다고 해서 나 하나만을 지금 세우는 게 아니라 여러분 각자 모두가 그렇게 지금 물질로만이, 유위법으로만 사니깐 그렇지 무루와 유루가 한데 합쳐져서 나 아님이 없을 때에 그 힘을 어떠한 환경에 따라서, 이러한 환경이라면 이런 데 쓰이고 저런 데 환경이라면 저렇게 쓰고, 이걸 맘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묘용이 바로 능히 여여하게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지금 이런 말을 한다 할지라도 부처님께서 말없이 해 놓으신 그 말씀이나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는 말이나 이 뜻을 모르고는 이것보다 더 좋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마 이렇게 좋은 말을 말없이 좋게 꽃 한 송이를 들어서 우주 전체 삼천대천세계를 싸고 이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없이 들었건만 이 도리를 모른다면 우리가 밥 한 그릇 이렇게 주워 먹는 것만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밥 먹고 똥 싸고 잠자고, 이것이 바로 그 꽃 한 송이에 있는 것입니다.

이날까지도 부처님의 말씀을 역을 해서 수만 경을 설해 놓았습니다만 그 뜻을 알고 지내는 사람이 몇몇이나 되었겠습니까. 그 뒤로 수백의 선사들이 났고 그 밑으로 참 많은 또 큰스님네들이 났습니다. 그렇지마는 진짜 우리가 그 꽃 한 송이의 뜻을 알고 지내느냐 못 지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에 의해서 좇아가려고 하지 말고 그 뜻에 의해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든다면, 바로 우리는 그 부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 뜻을 아마 헤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사량으로 알려고 앨 쓰지 마시고 열심히 공부해서 스스로 체득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포악해지는 것 같습니다
문)
요즘 세상은 인정이 참 메말라 가는 것 같습니다. 돈이라면 가족끼리도 서로 죽고 죽이는 세상이 되고 학교 폭력 등 자라나는 아이들의 인성도 참으로 포악해지고 있습니다. 다 우리 어른들이 문제가 참 많다고 봅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변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답) 일반적으로 부모 밑에서 올바르게 길러지는 자식들은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걷는데, 궤도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어른이나 애나 다 똑같습니다. 그러면 부모가 있는 사람은 마음이 자석처럼 붙어 돌아가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어머니라는 인정, 그게 자석입니다, 자석. 그래서 그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그 자기네 가정을 벗어나지 않는 거죠. 인간이라는 자석을 벗어나지 않는 겁니다. ‘인간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그 마음이 벌써 있기 때문에 벗어나지 않는 거죠.

그런데 어른이라도 철모르는 사람이 있거든요. 철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자기 중심을 잃고 사는 사람들, 즉 말하자면 패배된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느냐. ‘난 살아야겠어.’ 하고선 잘되고 잘못된 걸 번연히 알면서도 저지릅니다. 자기가 배고프니까 저지릅니다. 무댓방 저지릅니다. 죽입니다. 또 착취합니다. 이렇게 하는 여러 우리 삶에 대한, 이 국내에 본다 하더라도 그렇고 세계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렇고, 그런 사람이 지금 각국에 많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이고 살리고 싸우고 이 야단들을 하죠.
오신통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만 이 오신통이라는 자체는 내가 자성을 깨달아서 주인이 돼 가지고 내가 오신통을 부려야지 만약에 내가 내 안의 자성을 찾지 않고 바깥으로만 만날 신을 찾아 돌아다니고, 학문으로만 아는 양하고, 그렇게 집이 빈 사람들은 항상 끄달리게 돼 있어요. 항상 끄달리니까 이거는 바깥에서 들어와도 들어오는 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유법으로나 무법으로나, 하여튼 그냥 보이지 않는 생명들이나 보이는 생명들이나 모든 것에 끄달리는 겁니다. 그렇게 끄달리는 사람이 어떻게 내 몸을 가눠 가면서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가정을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있겠습니까. 아니, 사회를 국가를 세계를 어떻게 끌고 나가겠습니까. 그러는 사람들이 어떻게 우주적인 문제를 거론하고 이끌어 나가겠습니까?

모두들 공부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어렵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 안에서만 굴리고 내 안에서 배신하지 말고 자기 주인공을 믿고, 패기 있게, 물러서지 않고, 모든 만법이 일심에서 나고 만법이 일심으로 드는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배신을 하고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는 ‘아주 난 모른다. 나는 뭐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니까 신이시여! 아무개 신이시여! 용신이시여! 관세음 신이시여! 무슨 부처신이시여!’ 이렇게 이 신 저 신 찾다 보니까 이 신 저 신, 내 신도 잊어버리거든요. 아니, 이 신 저 신 찾다 보니까 내 신도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 신을 근중하게 생각하세요. 내가 지금 내 몸뚱이를 이끌고 가는 내 신을 말입니다. 자신을. 자성신을.

여러분 앞에 창살이 없는 것 같습니까. 창살이 있고 문지방이 높고 천야만야한 산봉우리가 있고, 이렇게 하니까 사람이 기가 막힐 때가 있고 불이 일어날 때가 있고 건너가지 못할 때가 있고. 이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억겁 전서부터 나오면서 노비 문서를 짊어지고 말입니다, 여기서 그냥 저 달나라 가게만큼 그냥 차근차근히 쟁여서는 무겁게 짊어지곤, 그 습을 한 번도 떼어 놓지 않고, 그래도 자기 노비 문서가 제일이라고 하죠. 자기라는데요, 뭐. 그걸 짊어지고도 무거운 체도 안 하고 그게 좋다고 웃으니 말입니다. 그게 사는 거래요. 아, 왜 그렇게 자유권을 갖고 자유스럽게 살지 못하고, 하나하나 끄달리면서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까? 모든 게 이 한 점의 마음에 의해서 돌아가는데 말입니다.

애들이 음식을 너무 함부로 버려요
문)
저의 조카들을 제가 보살피고 있는데 애들이 너무 음식을 함부로 버리고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잘 타일러 주는데도 말을 안 들어요. 그런 걸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답) 그거는 지혜가 부족해서 그래요. 왜냐하면 음식을 내버리고 그렇게 할 때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그 음식을 마저 먹어서 그 애가 탈이라도 생기면 더 손해가 날 거에요, 아마. 그런 거 한 가지가 있고, 음식을 내버린 걸 주워서 또 더 맛있게 해 줄 수도 있어요. 더 맛있게 해 줄 수 있는 건 여러분의 지혜지만 우리 옛날에는 음식이 다 다시 만들어도 될 수 있게끔 돼 있었거든요.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내버린 거를 주워서 다시 이렇게 밥도 남은 찌끄러기 내버리는 거 다시 저거 해서 그거를 아주 맛있게 나물 넣고 그렇게 해서 주면 그거 그런 줄 모르고 맛있게 먹거든요. 여러 가지예요, 그게. 그거 그렇더라도 마음이 훌떡 올라와서 화가 난다거나 이래서도 안 되죠.

‘그건 자연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겠구나.’ 하고 그네들을 그렇게 나와 같이 판단해서는 안 돼요. 애들이니까 애들 세계로 들어가서 한번 판단해 보세요. 그러면 화가 안 날 테니까요. 그렇게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계속 마음을 내다 보면 그 애들도 바뀔 테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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