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재를 시작하며

예경의 대상이었던 불상
박물관 예술작품으로 소구
종교와 예술의 갈림길서
종교의 미학화 경계할 일

1902년 8월 청년 릴케는 로댕에 관한 논문 집필을 의뢰받고 파리에 도착한다. 로댕의 비서로 일하면서 그는 로댕으로부터 사물을 깊이 관찰하고 규명하는 법을 배운다. 로댕의 정원에서 릴케는 특이한 조각품 하나를 만난다. 바로 붓다의 이미지, 불상이다.

불교에 대한 릴케의 생각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원래의 종교적 맥락을 잃고 조각가의 정원에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 진열되어 있는 불상 속에서 어렴풋이 남아있는 초월적 성스러움을 이렇게 읽어낸다.

붓다 Buddha

이미 멀리에서 이방의 겁먹은 순례자는
느낀다. 그에게서 금빛이 방울져 떨어지는 것을.
마치 회심에 찬 부자들이
그들의 은밀한 것을 쌓아올린 것처럼.

그러나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는 이 눈썹의
고상함에 혼란스러워진다.
그것은 부자들의 술잔도 여인들의
귀걸이도 아니기 때문에.

과연 누군들 말할 수 있으랴,
어떤 사물들이 녹아들었는지,
이 꽃받침 위의 이 형상을

세우기 위하여, 황금빛 형상보다 더 묵묵하고
더 차분한 누런빛을 띄고, 스스로를 만지듯
주위 공간을 어루만지는 이 형상을.

릴케 〈신시집〉中 (안상원 번역)

화려하게 금으로 도금된 불상은 이방의 시인에겐 낯설고 두려운 대상이다. 언뜻 부자나 여인네의 천박한 장신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그 고상한 눈썹에 매료당하고 만다.

시인은 묻는다. 이 불상에 무엇이 녹아들어 있는지를. 비단 물질을 묻는 것은 아니리라. 묵묵하고 차분한 빛으로 주위 공간을 어루만지는 이 고귀한 형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그에게는 예경의 대상이 아니지만 하지만 릴케는 이 불상 속에서 다른 예술작품에서 볼 수 없는, 찬연하게 빛나는 그 무엇을 보았던 것이다.

서구의 기독교 사회에서 발생한 세속화 현상이 한국불교에서도 생각보다 깊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100년 전 릴케가 머물렀던 파리에서 불상이 조각가의 아틀리에에 전시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사찰 밖에서 불교 상징물을 보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예전에는 예경의 대상으로서 사람들이 자신의 괴로움을 호소하고 염원을 기원했던 종교적 상징물들이 이제 관광객의 눈요기나 박물관의 유물, 또는 기껏해야 예술작품으로서 소구되고 있다. 그 예를 조계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살펴보자.

▲ 조계사 대웅전의 삼존불. 불상은 예경과 기도의 대상이며 부처님의 화현으로 신성시 된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주체에 따라 예술작품으로 소구되기도 한다.
도심 속의 사찰이지만 조계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괴로움을 호소하고 소망을 염원하는 귀의처이다.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조계사 대웅전은 한가한 틈이 없다. 한편에서 절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참선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떨 때는 전통적인 법회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어떨 때는 마당 가득 사람들이 운집하여 대규모 행사가 치러지기도 한다.

이 모든 신행 행위의 중심에 불상이 있다. 조계사 대웅전의 불상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곳을 특별한 장소로 만드는 근원이다. 지극정성으로 불상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불자들에게 조계사의 불상은 철과 동, 금으로 만들어진 생명이 없는 무정물이 아니라 예경과 기도의 대상이자 영험과 가피를 주는 살아 있는 부처님의 화현으로 신성시된다.

한편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조계사는 한국문화를 체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그들은 한국불교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불상은 릴케가 마주한 것처럼 이국의 신기한 종교적 상징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발길을 옮겨 불교박물관으로 간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여러 불상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박물관에 보존된 불상은 예경의 대상이 아니다. 아무도 그 앞에서 절하거나 기도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그는 교양이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관람객 중 더러 그 불상들에서 종교적인 감화를 받는다 할지라도, 조계사 대웅전의 불상처럼 종교적 예경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다.

불상들은 이곳에서 그 역사적 가치나 예술적 가치에 의해 평가될 뿐이다. 그것들은 불교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이며, 과거의 어느 시점에 그 종교적 생명력을 다한 유물로 간주된다. 그것들은 역사학자나 미술사학자에게는 역사적 정보를 제공해주는 연구 대상이고 일반 관람객이나 예술가들에게는 미적 즐거움을 주는 예술작품이며 외국 관광객에게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문화유산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인류문화유산으로서, 예술작품으로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박물관이라는 맥락은 종교적 상징물에 대하여 종교와 무관한, 역사적 기억을 담은 유물이나 미적 감상의 대상, 또는 이국적 산물이라는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이제 기념품을 사야할 시간이다. 관광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조계사 주변의 불교용품점에 들어서면 우리는 최근에 제작된 많은 불상들을 보게 된다. 갖가지 모양과 크기의 불상들이 있어서 취미에 따라 고를 수 있다. 가격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들여온 저가의 불상이 적당하지만 한국관광을 기념하려면 조금 비싸더라도 한국에서 제작된 불상을 구입해야 제격일 것이다.

불교용품점 쇼 윈도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 불상들은 엄격히 말해 종교적 상징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그것들은 관광객이나 법당 기물을 찾는 사람과 같은 불특정 다수를 위해 제작된 상품이며 따라서 그 의미와 기능은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 의미와 용도는 구매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만약 어느 스님이 구입하여 법당에 안치한다면 그것은 종교적 상징물로서의 제 기능을 되찾겠지만, 관광객들에게 팔리면 기념품이나 예술작품으로서 감상의 대상이 되며, 골동품 수집상에게 팔리면 재테크의 수단이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불상을 둘러싸고 다양한,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맥락들이 공존한다. 한 때 법당에 모셨던 불상도 박물관에 옮기는 순간부터 더 이상 종교적 대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종교적 예경의 대상이었던 불상이 어느 날 상품으로서 판매되기도 하고, 상품으로 제작된 불상이 어느 날 종교적 대상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어떻게 하나의 대상에 서로 모순되는 맥락이 중첩될 수 있을까? 그 중 어떤 것이 불상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일까? 이렇게 모순되는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이 종교적 상징물에 대한 ‘모독’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 종교적 상징물이 당면하는 상황이다. 이제 한 사물은 그 의미와 기능이 그 고유한 성질과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그것이 위치한 다양한 사회적 맥락에 따라 결정된다. 법당에서는 법당에 적합한 행동이 기대되고, 박물관에서는 박물관이라는 환경에 맞는 행동이, 불교용품점에서는 또 그에 적합한 행동이 기대된다. 그 행동의 양식은 사회적 관례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불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불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맥락이다. 불행하게도 이 맥락들은 한번 설정되면 없앨 수 없으며 모순되는 다양한 맥락들을 통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처럼 어떤 대상을 그 내적 가치가 아니라 외적인 맥락에 따라 규정하는 태도는 종교적 상징물에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상징물은 과거에 그것들이 주장했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를 상실하고 인간적 해석의 대상으로 퇴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성상파괴운동과는 다른 의미에서 이 상징물들의 생명을 빼앗아간다. 그것이 종교적 상징물이 환기시키려고 했던 본래적인 것, 즉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종교체험과 무관하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세속화 시대에 종교적 상징물은 그 본래의 종교적 맥락을 떠나 이질적이고 낯선 세속적 맥락에서 이해되고 기능한다. 그렇다면 종교의 미학화는 반길 일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고 경계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종교와 예술 사이의 오랜 애증의 역사를 비추어보아도 그렇고, 일체의 상을 떠나야 하는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다.

그래서 불교에 대한 미학적 글쓰기는 매력적인 주제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두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또한 불자라고 하더라도 현대인들에게 불교 상징물들이 가졌던 본래의 세계를 실체적으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바람직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도 여전히 살아있는 전통으로 기능하는 그 세계에 깃든 정신과 미적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나의 수행을 살찌우는 방편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릴케처럼 사물을 깊이 관찰하는 안목을 가져보기를 기원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 명법 스님/ 조계종 교수아사리
명법 스님은 … 조계종 교수아사리이며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미학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명상상담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서울대 불문과 졸업 후, 동 대학원 미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운문승가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명성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미국 Smith College에서 박사후과정 연수를 마쳤으며 서울대학교와 운문사에서 오랫동안 강의했다.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미학의 역사〉, 〈한권으로 보는 세계불교사〉가 있고 〈서양 현대예술에 나타난 선과 오리엔탈리즘〉, 〈디지털시대와 불교예술의 혁신〉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2011년 원효학술상 비전임강사 부분 우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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