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信·正行’의 기수 광우 스님 前 전국 비구니회 회장

광우 스님은 … 1939년 15세에 직지사에서 성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 상주 남장사에서 혜봉대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최초의 비구니 강원 상주 남장사 ‘관음강원’에서 대교과 졸업. 비구니최초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1956년부터 10년간 부산 소림사에서 법화산림법회. 1958년 정각사를 창건하고 〈신행불교〉를 간행하는 등 정신·정행(正信·正行)의 기치를 들고 정법의 당간지주를 세웠다. 뇌허불교학술상을 제정하고 2002년에 뇌허 김동화전집 전14권을 펴냈다. 1986년 〈묘법 연화경〉번역간행, 전 7권 사경. 서울시립 목동청소년회관 관장 대통령 표장 받음. 전국 비구니회장을 8년 역임하면서 비구니 회관을 완공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1995년부터 2006년까지 생명공양 실천회 이사. 비구니 별소계단 전계대화상. 2007년 조계종 최초 비구니 명사 법계 품수. 저서로는 번역 〈묘법 연화경〉, 〈부처님 법대로 살아라〉, 〈회향〉 등이 있다.
‘희견여래’를 포교사 모델로

정각사 창건… 정법의 당간지주세워
전국비구니회관 건립불사 완공
〈법화경〉 번역 유포·전7권 사경
폭우 쏟아져도 큰법당서 조석예불

빛 광(光)자, 비 우(雨)자 광우 스님. 속명은 이광우. 법명과 속명이 둘이 아니다.

부친 혜봉(慧峰) 스님은 빛이 되고 자비로운 감로수가 될 법기(法器)임을 아셨는지 광우라 이름했다. 마치 부처님이 제자에게 수기를 내리시듯.

올해 세수로 미수(88)이고 법랍 73세인 광우 스님의 수행이력을 돌아보면 법답게 법명처럼 정진했음을 감지 할 수 있다.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마친 광우는 진학을 준비하느라 당대의 선지식 혜봉 스님의 주석처 상주 남장사에서 한여름을 보냈다.

스님들의 경 읽는 소리를 들은 광우는 이틀 만에 〈천수경〉을 줄줄 외웠다. 참선하는 스님들의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했다.

참선하다 졸고 있는 스님의 턱 끝에 손가락 송곳을 만들어서 갖다대고 있다가 큰 스님에게 들켰다.
큰 스님은 엄하게 꾸짖으셨다. 그때 소녀 광우는 질문했다.

“왜 스님들은 꾸벅꾸벅 졸면서 앉아 있어요”
“광우야”
“네”
“대답하는 그 놈이 무엇이냐? 어떤 놈이 있어서 대답을 하는 것이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는데요”
“바로 그 ‘모르겠다고 하는 놈’이 어떤 놈인지 그 것을 찾기 위해 앉아있는 거란다”
“저도 참선하면 그 것을 알 수 있나요?”
“물론 그렇지.”

광우는 참선을 하게 해 달라고 큰 스님에게 졸랐다. 큰 스님은 안된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입승 스님이 기특하게 여겨 선방에 들게 했다. 어린 소녀는 탁자 밑에 앉아 참선을 흉내냈다.
학교 공부보다 절집 공부가 재미있었던 광우는 이듬해 15세에 출가했다.

이어 어머니도 출가했다.(명성 스님)

광우 스님〈사진 오른쪽에서 3번째〉은 지난 7월 중국 보타낙가산 성지순례를 했다.

속명도 광우 법명도 광우

광우 스님의 수계 법명은 태우(泰雨)이다.

스님이 태우보다 광우라는 법명을 쓰는 이유는 혜봉 큰 스님에 대한 존경심에서다.

“빛 광 자는 지혜가 빛나라는 뜻이고 비 우 자는 만물을 키워주는 자비로운 비가 되라는 뜻입니다. 지혜와 자비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으니 출가하라는 것이지요. 이런 사연을 아신 은사 스님도 당신이 지어준 태우는 그냥 갖고 있고, 광우가 더 좋은 법명이니 그대로 살면 훌륭한 중이 될 것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지난 70여 년을 돌아보면 법명처럼 살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광우 스님은 비구니 최초 강원인 남장사 관음강원에서 수학하고 선방으로 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들어가 한국 최초의 비구니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선원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1958년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정각사를 창건했다.

광우 스님은 도심포교를 결심했다. 54년 전 포교 여건이 좋지 않은 시절, 빈 터에 절을 지은 광우 스님은 〈법화경〉에 나오는 ‘일체중생 희견여래’를 포교사의 모델로 삼았다.

전법서원 정각사 창건

“희견보살은 자기 몸을 소신공양해서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힙니다. 그리고 법화경 ‘권지품’에서는 부처님이 마하파자파티 비구니에게 일체중생 희견여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지요. 그건 아마도 이런 마음으로 포교하는 법사가 돼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나는 바로 마하파자파티 같은 비구니 대법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나의 자질과 능력은 차치하고 서원만은 그렇게 세웠지요. 그래서 정각사를 짓고 포교의 길에 나섰습니다.”

정각사(正覺寺)는 ‘바른 깨달음을 이뤄가는 절’이란 뜻이다. 절 이름은 김동화(金東華) 박사가 지었다. 포교를 하되 불법을 올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바르게 믿으라고 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조직한 것이 정기법회입니다. 어린이, 중고등학생법회, 대학생법회, 일반신도법회를 개설하고 매주 법회를 열었습니다.”

스님은 정각운동을 그렇게 시작했다.

정각사 법회는 저절로 소문이 났다. 당대 최고의 불교학자들이 설법하고 강의한 일요정기법회에는 서울시내 유수한 대학의 학생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황성기, 원의범, 홍정식, 김동화 박사의 강의를 듣기위해 서울대, 고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동국대 학생들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던 윤호균 씨(한국심리학회 회장· 가톨릭대 교수), 성대 박상길 씨, 역사학자 이이화 씨, 교회목사, 통일교회 책임자 등이 강의를 듣기 위해 정각사에 왔다. 훗날 정각사에서 공부한 분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지식인으로 중추적 역할을 했다.

지금은 사찰마다 정기법회를 여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해야할 일이지만 몇 십년 전에는 손꼽을 정도였다.

“어떤 사람은 정기법회가 기독교의 주일예배를 본 뜬 것이라고 하는데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출가 수행자는 재가불자를 위해 정기적으로 설법하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재가 불자도 재계를 닦고 정기적으로 법회에 참석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정각사 정기법회에는 법당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자랑을 모르고 늘 당신을 낮추는 광우 스님도 “정각사가 정기법회를 정착 시킨 것은 정말 자랑할 만한 불사였다”고 자인했다.

사보 ‘신행불교’ 27년간 발행

정각사 포교활동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27년간 매월 펴낸 사보 ‘신행불교’ 발간이다. 처음에는 ‘신행회보’라고 하다가 ‘신행불교’로 이름을 바꿔 통권 324호까지 간행한 이 잡지는 문서포교에 큰 몫을 했다. 군부대, 교도소, 해외까지 널리 법을 전했다.

‘신행불교’의 모토는 정신(正信) 정행(正行), ‘바로 믿고 바로 행해 참사람 되자’ 였다.

정각사가 어떤 신행을 가르치고자 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지표였다.

서윤길 교수, 맹란자 선생, 박선영 교수, 스님의 상좌 정현 스님 등이 이 잡지를 만드는데 관여했다. 특히 맹란자 선생은 ‘10년 발원’으로 이 잡지를 만들기에 열과 성을 다했다. 스님은 이 잡지의 공덕을 그분들에게 돌렸다.

스님의 전법은 정각사에 국한되지 않았다. 서울시립 목동청소년회관 관장을 맡아 불교사회복지사업의 초석을 다졌다. 1989년부터 6년간 관장을 역임하면서 서울 목동신도시 청소년 교화모범시설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전국비구니회를 반석에

광우 스님을 빼고는 전국비구니회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스님은 전국비구니회 전신인 ‘대한불교 비구니 우담바라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67년 발의하고 68년 창립총회를 갖고 우여곡절을 겪었던 전국비구니회가 1985년 9월 재건되고 2003년 8월 지금의 비구니회관 낙성법회를 갖기까지 스님은 ‘비구니회를 반석에 올려놓은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5년 전국비구니회 회장으로 선출돼 8년간 비구니회를 이끌면서 120억원의 불사비가 투입된 비구니회관 건립을 완공했다. 임원들과 전국사찰을 순회하며 모금운동을 펼치는 등 전력을 다했다.

“비구니 회관 건립을 위해 열심히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스님이 원력을 모은 결과입니다. 1996년과 1997년은 좀 과장하면 길에서 보낸 시간이 절에서 보낸 시간보다 더 많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말 고마웠던 분은 진관사 진관 스님입니다. 1968년 비구니회 발기때부터 저와 같이 일을 하고 그때도 전국을 순회했는데 이번에도 부회장을 맡아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한마음선원 대행 스님이 아니었으면 이 불사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120억원 불사비 중 85억원을 한마음선원에서 쾌척했습니다. 조계종 7천 비구니 스님들의 원력불사는 그렇게 회향됐습니다. 한마음선원에 감사하는 마음을 죽을때 까지 소중한 빚으로 가져갈 생각입니다.”

광우 스님은 2003년 8월 19일 비구니회관 낙성법회를 마치고 며칠간을 멍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그 불사에 혼신을 다했다.

정각사 살림을 뒤로 미루면서 한국 비구니 스님들의 위상을 높이고 긍지를 심어줄 비구니회관 건립 불사를 마무리한 스님은 그해 10월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광우 스님은 긴 염주 천주를 돌리며 매일 독경과 염송을 한다.

법화행자의 길 70년

광우 스님은 평생 〈법화경〉 공부를 남달리 해 온 법화행자다. 포교활동도 주로 법화경 강설로 했다. 1986년 〈묘법연화경〉을 번역출간하며 대학 도서관까지 법공양했다. 이 책의 특징은 독송할 때 운율이 잘 맞고 뜻이 명료하게 번역된 점이다. 그리고 스님은 법화경 6만 9천 84자를 매일 기도하듯 사경했다.

“절에 처음들어왔을 때 혜봉 큰 스님이 〈법화경〉 실상서를 주면서 외워오면 큰 상을 주겠다고 하셨어요. 실상서란 송나라 때 계환 스님이 붙인 해제입니다. 제법 긴 글인데 하루만에 외워 스님께 갔더니 칭찬을 하시면서 큰 붓 한자루를 주셨어요. 저와 〈법화경〉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정각사를 창건하고는 조석예불을 마친뒤 반드시 〈법화경〉을 한품씩 읽기를 수행의 정업으로 삼았다. 1956년부터 10년간 부산 소림사에서 〈법화경〉 산림을 했다. 사숙인 금룡 스님의 당부로 매년 열흘씩 법화경 강설을 했다.

“법화경의 일불승 사상의 핵심은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는 것입니다. 어떤 중생도 외면의 대상은 없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것은 불교의 대자대비입니다. 우리가 법회 때마다 외우는 사홍서원도 〈법화경〉 약초유품에 나오는 가르침이 원형입니다. 이 가르침을 다 이해하고 실천하여 온 세상이 그대로 한송이 아름다운 연꽃같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광우 스님이 법화행자 70년 수행의 길을 걸어온 뜻이 여기에 있다.

혜봉 스님과 김동화 박사

“혜봉 큰 스님은 저에게 가장 엄한 스승이자 가장 자애롭고 고마운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스님의 부친 혜봉 스님(1874~1956)은 고종 28년 18세의 나이로 출사해 궁내부 주서(종4품)로 12년간 관직에 있었다. 세상의 무상을 느낀 스님은 30세(1904)에 상주 남장사 영봉 화상 문하로 출가했다. 노장 유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불교경전과 어록을 읽고 참선을 한 스님은 때로는 강설을 펴고 때로는 선리를 참구, 당대의 선지식으로 제방에 그 명성이 자자했다. 상주 남장사 조실로 20여년간 주석하면서 고봉 스님, 관응 스님 등 훌륭한 제자를 많이 길러낸 큰 스승이었다.

광우 스님이 혜봉 스님의 일기와 게송을 묶은 〈혜봉선사 유집〉을 2007년에 펴내 혜봉 선사의 행장이 알려졌다.

혜봉 스님의 법제자로서 현대불교학계의 태두인 뇌허(雷虛) 김동화 박사(1902~1980)도 광우 스님에게 큰 스승이었다. 김 박사는 광우 스님이 동국대학에 가도록 권유했다. 정각사를 창건하여 정법불교운동을 펴고 ‘신행불교’를 창간하고, 비구니회를 설립하도록 아이디어를 준 분이 김동화 박사다.

광우 스님의 김동화 박사에 대한 존경은 남다르다. 스님은 김 박사 타계 후 1982년 ‘뇌허 불교학술상’을 제정하고 매년 발표된 가장 우수한 논문이나 저서를 대상으로 시상했다. 14회까지 시상하고 중단됐다. 2002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뇌허 김동화 전집〉(전 14권)을 간행, 해외 도서관까지 배포했다.

김동화 박사의 학문적 업적을 기릴뿐 아니라 불교학 발전을 도모하는 불사였다.

정각사를 제자 정목 스님에게

신도들이 불사금이나 또는 스님 용돈 쓰시라고 봉투를 가져오면 그걸 모아 장학금으로 썼다. 큰 성금을 가져온 불자의 법명을 장학금 이름으로 정하기도 했다.

매년 겨울, 스님 생신이면 어려운 마을 어른들을 초대해 식사와 용돈봉투를 선물했다.

2009년 7월 22일 스님은 상좌 정목 스님에게 정각사 주지직을 넘겼다. 스승과 제자는 10년 간이나 “주지직을 맡아라, 아닙니다”를 반복하다 결국 정목 스님은 은사 스님의 당부를 받아들였다. 광우 스님은 그날 〈신행불교〉 권두언에 쓴 글을 모은 책 〈회향〉 출판기념회도 아울러 가졌다. 일체를 회향하신 듯 스님은 모든 걸 내려놓았다. 늘 만족하고 모든 것에 감사한다. 유머 감각이 더 늘었다.

병원에 가시자고 하면 “얼마나 오래 살려고 병원에 가느냐. 남들이 욕한다”며 안가실려고 한다고 정목 스님이 귀뜸한다.

지난 여름에는 중국 보타낙가산 성지순례를 손상좌 현산 스님과 신도들이 모시고 다녀왔다. 천불탑전에서 부처님 한분 한분께 절을 하셨다.

정각사는 대웅전만 그대로두고 요사채 등을 현대식 통유리집으로 새로 짓고 있다. 그 현대식 건물 불이정사 1층에 혜봉 스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조선조 아미타여래 탱화와 작은 불단이 있다. 스님은 매일 그 앞에서 긴 염주 천주를 돌리며 독경과 암송을 한다. 무릎을 구부리고 1시간 40분씩. 무얼 기원하시느냐고 여쭈어보면 “내가 할 것이 하나밖에 더 있나. 내가 갈 꽃밭은 내가 가꾸지.”

폭우가 쏟아져도 스님은 큰법당 조석예불을 거르지 않는다. 현산 스님이 법의를 비에 젖을까 보자기에 싸서 법당에 갖고간다. 12월 20일 기자를 만난 스님은 “찾아줘서 고맙긴 한데, 나는 별게 아니야. 사진도 찍지말고 쓰지도 말아”라며 극구 사양하셨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의 모습이다. 스님의 말씀, 움직임이 모두 법향으로 피어난다.

글=최정희 편집이사·사진=박재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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