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9층 목탑

자장율사 탑 조성으로

국가 통일과 안녕 염원

 

▲ 법화경 변상도 사천왕 호위 9층탑

한반도의 불교사를 통틀어 가장 큰 탑은 무엇인가? 그 탑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소재했던 황룡사 9층목탑이다. 신라왕실의 권위와 호국을 상징하는 세 가지 보물은 진흥왕 때 만들어졌다는 장육존상(丈六尊像),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천사옥대(天賜玉帶), 그리고 선덕여왕 때에 만들어진 황룡사 9층목탑이다.

이 세 가지는 통일신라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보물들일뿐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지금까지 흔적이나마 전해지고 있는 유일한 보물이 황룡사지에 있는 구층목탑의 유적이다.

기록에 의하면 2만5천평에 달하는 습지를 메워서 탑을 지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얼마나 웅장했을지 상상을 초월한다. 탑의 높이 또한 9층까지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다. 또한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한다.

그러면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엄청난 국가예산을 들여서 왜 선덕여왕은 세웠던 것일까? 삼국유사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온다. 자장율사께서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타나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 물었다.

신인인 태화지의 용왕은 자장율사가 말갈과 왜국, 고구려와 백제의 침범으로 어려운 신라의 사정을 말하자, 충고의 간언을 전한다. 신라의 왕은 여자이기에 덕은 있으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나라가 침략을 계속하고 있으므로 빨리 돌아가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자장율사가 어찌해야 하는가를 묻자, 황룡사의 호법용이 그의 아들임을 밝히고,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세울 것을 조언한다. 그리하면 구한(九韓, 고구려, 백제, 말갈, 일본을 비롯한 9개 나라)이 항복하고 조공할 것이며, 왕업이 길이 편안하다고 충고한다.

또 탑을 세운 후 팔관회를 열어 죄인을 용서하고 풀어주면, 외적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충고하곤 사라진다. 그리하여 서기 643년 자장율사는 귀국하자마자 선덕여왕을 설득해서 황룡사 9층탑을 완성한다.

그리곤 지은 지 600여년 만에 황룡사 9층목탑은 고종 25년 무술(1238년) 겨울에 몽고의 침략으로 탑과 장육존상과 절의 전각들이 모두 불에 타버린다. 그렇다면,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황룡사 9층 목탑은 한반도 불교사에서 가장 많이 출간되었던 묘법연화경에 삽화 변상도로 항상 그려져 왔다. 물론 법화경의 제11품 견보탑품(見寶塔品)이 불탑숭배사상을 반영하고, 석가탑과 다보탑의 조성에 모태가 되기도 한다는 설도 있다.

이 법화경 목판본 변상도를 보면, 사대천왕이 불탑을 수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라는 여왕이 통치하는 나라로, 황룡사 9층탑의 법력으로 국가를 안정시키고 번영케 했으며 민족을 지켰던 것이다.

이제 겨울은 가고, 매화가 꽃피는 봄이 오려 하고 있다. 푸른 기와집에 여인의 향기가 가득하더라도 한반도에 부처님의 가피와 가르침이 여전하리라 믿고 싶다. 그리고 신라시대처럼 온 국민이 불자였던 시대가 다시 한 번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마지않는다.

지난 2년간 학문과 지식이 변변치 않고, 재주가 없음에도 무리하게 글을 짓고, 부끄러운 글들을 강호(江湖)의 제현(諸賢)들에게 읽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불보살님들께 참회진언을 외우며, 그간 잘못의 용서를 빌며 마지막 기고를 보낸다.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마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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