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고에서 벗어나겠습니까

 

▲ 그림 최주현

오늘 점안식을 하고 여러분과 이렇게 한자리 하게 되었습니다. 창건주 되시는 윤 선생님께서 불심이 강하고 또 마음의 불씨가 너그러우셔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은 설법을 한다기보다는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알기 위해 모르는 것은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오늘 부처님을 참되게 모시고 이렇게 점안식을 거행했는데, 여러분이 부처님을 모셨다고 해서 그 모습을 딴 몸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의 몸이 있기에, 또 마음이 있기에 그 마음으로 부처님이 계시다는 걸 아셨습니다. 여러분이 몸이 없다면 마음을 낼 수가 없습니다. 즉 말하자면 지수화풍으로 뭉쳐진 사륜 소생이 아니라면 우리 몸속에 사생(四生)이 들어 있지 않고, 사생이 들어 있지 않다면 우리가 이렇게 움죽거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을 모셔 놓으면 우리 마음에 부처님을 모셔 놨다는 그런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에게 한마음이 있고, 한생각을 일으킬 수 있고, 한생각 일으킨 그 자체가 결정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는 뜻을 확신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이는 만날 저런 말만 해!’ 이러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여러분이 항상 끄달리니까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이 뜻을 항상 얘기하는 거죠. 이렇게 편리하게, 살림살이 그대로가 부처님의 법이며 부처님 법이 우리들의 생활인데도 불구하고 항상 끄달리니까 하는 소리 아닙니까! 저 부처님의 몸과 내 몸이 둘이 아님으로써 마음도 둘이 아니요 생명도 둘이 아닙니다. 어떤 거든지 생명 없는 게 있다면 말씀해 보세요. 하다못해 이런 법상도 움죽거리고 있다는 얘깁니다. 어떠한 거든지 살아 있지 않은 것이 없고 돌아가지 않는 게 없습니다. 우리는 찰나찰나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륜이 그냥 돌아가고 있는 거죠. 그것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생이 있기 때문에 우리 자체에 수십억 마리가 지금 꿈틀거리면서, 은하계의 별성이 돌아가듯 우리 몸뚱이 속에는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한생각을 잘못 낸다면 이 동네가 망합니다. 이 몸도 한 집이자 한 동네이자 한 우주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벌써 이 세상에 나와서 우주가 있다는 걸 알고 지구가 있다는 걸 알고, 부처님이 계시다는 걸 알고 부처님이 49년 설해 주신 걸 알고, 이렇게 돌아가는 지금 세상을 알고 있는데 어찌 그것이 내 마음속에 없겠습니까. 우주보다 내 마음이 더 크다고 봐야 옳겠습니다. 크다기보다는, 작다고 할 수도 없고 크다고 할 수 없는 그 자체가 너무도 광대무변하니 여러분은 마음을 좁게 쓰면 안 된다는 얘기죠.
어저께도 비행기를 타고 오다 보니까 말이에요, 집들이 전부 성냥갑 같고 쓰레기통 같아요. 쓰레기장 같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길을 내고 보수를 하고 그러는 걸 가만히 볼 때, 개미 역사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그러면 그 콩나물 시루의 콩나물 하나와 같은 내 몸뚱이가 ‘나만의 나’인 것입니까? 내 몸이 공하고 내 사생이 다 공해서 모두가, 사대 오온(四大五蘊)이 다 공해서 돌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타의에 끄달리거나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하거나 이런다면 어떻게 나를 내가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그렇게 좁다면 고독하고 편안치 못하고 끄달리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오늘 부처님 모셨다는 걸 알듯이 그렇게 하나를 알면 열 가지 백 가지 천 가지, 끝간 데 없이 알 수 있어요. 부처님을 모셔 놨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바로 부처님은 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아침마다 무슨 주문을 외우고 염불을 하고 또 삼천 배를 하고 백팔 배를 하고…,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왜 그렇게 해야만 됩니까? 한생각만 잘하면, 한 번 손을 합장하고 한 번만 마음을 잘 먹으면 삼천 배를 할 수도 있고 삼만 배를 할 수도 있고, 우주 전체를 들 수도 있고 덮을 수도 있고 굴릴 수도 있건만 어째서 여러분은 믿음을 가져도 그렇게 복잡하게 갖습니까?

바깥으로 찾다 보니 이름 찾아야지, 또 일일이 높은 사람 찾아야지 낮은 사람 찾아야지….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눈 따로 찾고 귀 따로 찾고, 코 따로 찾고 입 따로 찾고, 바른팔 왼팔 모든 걸 따로따로 찾는 격입니다. 여러분의 머리카락을 보십시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여러분 각각이라면 그 헤아릴 수 없는 수효대로 그걸 곳곳이 찾아야 하니 그걸 어떻게 다 찾습니까? 그러니 그냥 ‘머리’ 하면 전체가 들어가지만 ‘머리카락’ 해 보십시오, 헤아릴 수가 있나. 마음은 하나지만 마음내는 거는 천차만별로 냅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기를, 여러분의 잠재의식 카세트로부터 그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얽히고설킨 그 자체가 바로 각본대로 나오는데, 그 나오는 대로 거기에다 그저 맡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담아지면 없어지고 없어지면 채워지면서 우리 지금 실생활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오실 때에도 과거는 지나갔으니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없습니다. 현실의 여러분은 잠재의식 카세트를 짊어지고 나왔어요. 그게 바로 종 문서예요. 종 문서를 짊어지고 나오셨으면 그 종 문서를 태워 버려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유스럽게 살아야죠. 여러분이 먹고 싸고 잠자고 가고 오고, 이것이 그대로 자연스럽고 그대로 법이에요.

여러분은 ‘고가 있다.’ 또 ‘업보가 있다. 뭐가 있다 뭐가 있다. 죄가 있다. 얼마나 죄가 많기에 이런가.’ 하시는데, 이런 생각 자체가 바로 죄인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무한의 진리를 가지고 있고 끝간 데 없는 그 법의, 바로 법음과 더불어 자력, 광력, 전력의 에너지가 충만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수만 가지로 닥치는 것을 못이나 쇠 부스러기에 비유한다면, 자석에 가까이 오면 가까이 오는 대로 자석이 돼 버리고 마는 그런 형국이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한생각을 잘하신다면, 그대로 시대를 잘 검토한다면 그대로 견성이에요. 여러분은 너무 고집하고 있어요. 죄가 있다는 거, 업이 있다는 거, 지옥이 있다는 거, 공부하기가 어렵다는 거…, 내가 공했는데도 불구하고 화두를 또 들어야만 한다고 하니까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는 거죠. 내가 공했는데 들고 있을 건 뭐 있습니까? 내 나무에서 내 실과를 무르익혀야 제 맛이 나고, 바로 내 나무 속에서 생산처가 만들어져야 하는 거죠. 그럼으로써 거기에서 수만 가지 생산을 해낼 수 있고, 수만 가지 생산을 해낼 수 있다면 수만 가지 맛을 낼 수가 있는, 그러한 생산처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한번 실행을 해 보기보다는 부처님이 바깥에 있는 줄 알고 마음으로써 항상 끄달린다 이겁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노스님을 모시고 사는데 그 노스님이 몸이 약해지고 너무나 들피가 나서 쓰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하시더랍니다. 그런데 한 제자는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바둥바둥하고, 한 제자는 ‘내가 계율을 못 지켜서 만약에 벌레가 된다 하더라도 스님은 살려야겠다.’ 하고 가서 지렁이를 캤습니다. 지렁이를 캐고 캐서 말갛게 씻어서 폭폭 고아서는 그걸 꼭 짜서 스님을 봉양을 했더니 스님이 건강하게 일어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는 모든 것을 자기한테 그냥 놔 버렸습니다. 자기가 죽든 살든 어떻게 되든 그걸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 얘기를 여러분이 생각해 볼 때, 무(無)의 법으로써 유(有)의 법을 똑바로 보고 똑바로 행할 수 있는, 영체와 유체를 따로 보지 않고 같이 합쳐서 중용을 할 수 있는 그게 올바른 계율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물질로만 계율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그런 물질 본위로만 나가야겠습니까?

내가 공해서 없는데
고라는 것이 어디 붙을 데가 있겠습니까.
나를 진화시킬 수 있고 성숙시킬 수 있고
해탈시킬 수 있는 과정이 바로 고란 말입니다.
고가 없으니 집착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 놓고 돌아가니까.
집착이 없는데 멸이 어디 있으며 도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니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사람이 마음 하나를 잘 먹어서 세상을 올바르게 해 놓을 수도 있고 마음을 잘못 먹어서 세상을 올바르지 못하게 해 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내 몸으로부터 ‘나’를 이끌어 가지 못하기 때문에 내 몸을, 내 집을 망가뜨리는 이치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내 몸이 있고 내 몸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겁니다. ‘내가’라는 것이 부처라면, 바로 부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거지 어째서 따로따로 있겠습니까? 상구보리(上求菩提) 하면 하화중생(下化衆生)이고 하화중생 하면 상구보리이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의 한생각에 의해 바로 몸속에 있는 그 생명체, 모습들이 다 한마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음을 넓고 건강하게 쓰면 바로 이 몸속에 있는 생명들도 중생들도 다 같이 건져집니다. 내 한생각을 잘하면 수십억 마리가 그냥 건져지지만 내 한생각을 잘못하면 수십억 마리가 건져지지 못하는 거죠. 깨 하나를 심으면 그것이 수천 알의 깨가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에게 사생이 들었다고 하는 것은 알로 낳거나 태로 낳거나 습한 데서 낳거나 화(化)해서 낳는 것이 다 내 몸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부나 외부나, 사생은 항상 지수화풍으로 뭉쳐 있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아마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들이 여기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천이 안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죄가 많고 왜 그렇게 못하는 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중생이 돼서 못한다구요? 중생이라고 자기가 이름지어 놓고 자기가 중생 노릇을 하는 거지, 누가 중생 노릇을 하랬나요? 부처 노릇을 하랬나요?

옛날에도 그런 점이 있었죠.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신라, 고려 때는 불교 문화가 발전이 되었었는데 조선에 이르고부터 불도를 배척했습니다. 불도를 배척한 것이 불자를 배척한 것이고, 불자를 배척한 게 자기 마음을 배척한 겁니다. 자기 마음을 배척하고야 어찌…. 물질 본위로 살면서 항상 쫓고 쫓기고, 낮은 놈은 찌들리고 높은 놈은 누르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역사가 역사다웠습니까, 어디? 이렇게 해서 우리 자체가 어떤 역사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거예요. 부처님을 모셔 놓은 법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어요. 누가 가는 걸 보면 붙들어다가 볼기를 때렸단 말입니다. 그리고 뺏고 부수고…. 보고 듣는 게 이런 거였으니 이렇게 해 가지고야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깨닫고 마음을 숭상하고 계발하고 물리가 트이게 해서, 즉 물질과학과 정신과학을 한데 합쳐서 우리 역사를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할 여지가 없었거든요.

여러분은 마음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걸 가만히 생각하면 요새도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앞뒤를 생각 안 하고 그냥 뛰는 거 있죠? 요새도 가만히 보면 위태위태합니다. 왜 위태위태한가? 사람이 첫째, 세계를 보면서 우리 분단된 반쪽 조국을 한번 생각해 봐야 하고, 둘째는 요새 이렇게 모두 날뛰고 있는데 아버지나 어머니가 될 사람이라면 그 사상이 어떤가를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으로 정해서 찍으면 그뿐인 것을, 그렇지 않아도 분단되고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를 왜 부수고 때리고 난동을 부리느냐 말입니다. 싫으면 싫은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찍으면 되지 도대체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누구 손해냐 이겁니다, 네? 도대체 이게 사람이 하는 노릇입니까? 이게 지식층들이 하는 얘깁니까, 어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향내가 나고 발 한 번 한 번 떼 놓는 그 움죽거림이 모두 향내가 나야죠. 그런데 얼마나 몰상식한지 몰라요. 그러면서 어떻게 ‘민주화 민주화’ 이렇게 말로만 합니까?

“스님은 어째서 정치 얘기를 합니까?” 이러시겠지만 이건 정치가 아닙니다. 우리 국민의 한자리입니다, 부처님 자리고. 세계적으로 보거나 우주적으로나 보거나 생명 없는 게 없어요. 생명 빼놓고 마음 빼놓은 게 어딨어요? 그러니 전체가 부처님 자리죠. 그러니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다 있어요. 중이라고 왜 할 말을 못해요? 중은 목탁만 두들겨야 중인가? 여러분과 다 같이, 우리가 일요일에는 쉬면서 마음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월요일에는 생각을 내서 일을 나갑니다. 화요일에는 행동으로 옮깁니다. 우리가 한마음, 한뜻, 한 행을 하고 있는 이 생활이 바로 부처님 법이에요. 그런데 말할 게 없어요?
월남전 때 어떤 사람이 월남에 싸우러 갔는데 편지를 보냈어요. “스님, 여기 와서 보니까 외국에서 들어온 무기들을 이 지역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이튿날이면 그 무기들이 다 없어집니다. 왜 없어지는지를 검토해 보니까 그냥 전부 저쪽에 갖다 주는 겁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싸우는 겁니까? 이건 역성을 들어 줘도 한계가 있지 이렇게는 더 이상 못합니다. 틀림없이 우리는 돌아서야 될 지경입니다. 그러니 스님, 전 인제 얼마 안 있으면 돌아갈 것 같습니다. 저는 죽는 걸 가리지 않으니까 그저 지뢰도 밟지 않고 그냥 그 사이사이로 통과했고, 거기를 넘어갔다 왔는데도 모가지 안 잘리고 살아왔습니다. 아주 죽을 각오 하고 머리카락 베어 놓고 손톱 잘라 놓고선 그냥 악수하고 울면서 헤어졌는데, 이렇게 와서 싸우다 보니까 외려 몸을 아끼는 사람은 죽고, 그냥 이때 죽으나 저때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저는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죽을 각오를 하니까 오히려 죽지 않았다는 그런 말을 합디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내 마음 가운데서 내 마음을 발견할 수 있나? 이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왜 필연적으로 이것을 알아야 하느냐. 우리가 살아서 이 도리를 모른다면, 육체를 가지고 이 도리를 모른다면 거듭거듭 이런 고난에서 허덕이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세요. 육체가 죽는 것이 열반이 아니죠. 육체를 살려 놓고 저승에 왔다 갔다 할 수 있고, 이승 저승이 없이 회전을 할 수 있어야만 그걸 이름해서 열반경지라고 그럽니다.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사제법 중에서 고가 고인 줄 아시지 마세요. 여러분은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진화돼서 이렇게 인간으로까지 형성된 겁니다. 그러니 그 습이 많기 때문에 수없이 인연에 따라서 지금 여기 한데 모인 거거든요, 수십억 마리가 인연 따라서. 사생이 인연 따라서 여기 다 있어요. 그렇다면 그 인연 따라서 온 나 자체의 그 마음이 꽁지에 꽁지를 물고 자꾸 나오는 걸 나오는 데에다가 다시 놓는다면 좋은데, 고가 고인 줄 안단 말입니다. 내가 공해서 없는데 고라는 것이 어디에 붙을 자리가 있느냐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그건 뭐냐. ‘나를 성숙시킬 수 있는 수행 과정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나를 성숙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고(苦)가 고가 아니죠. 거짓이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진화시킬 수 있고 성숙시킬 수 있고 나를 해탈시킬 수 있는 과정이 고란 말입니다. 그러면 고가 고가 아니고 그게 수련 과정이요 수행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내가 그렇게 다지고 다지면서 수행을 시키니 이 감사함을 어쩌나!’ 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고가 없으니 집도 없죠? 집착도 없을 거란 말입니다, 고가 없으니까. 모두 놓고 돌아가니까. 집착이 없는데 멸이 어디 있습니까? 멸이 없는데 도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니 내가 나를 믿지 않고는 안 되죠. 여러분은 지금 한 군데만 움죽거리지 않게 해도, (다리를 짚으시며) 여기를 한 치만 뻣뻣하게 해도 걸음을 못 걸을 겁니다. 그렇게 움죽거려 주는 내 속의 내 중생, 이 자체가 소중한 줄 알아야 여러분은 성한 다리로 성한 몸으로 다니실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몸뚱이 속의 생명체들을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그건 한 마음 한 몸이지 두 몸이 아니에요. 그 수십억 마리가 한 몸이에요. 한 몸!

그러니 거기에서 다 들이고 내니까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잘되는 것도 감사하고 안되는 것도, 고가 고가 아니기 때문에 감사하고요. 그렇게 들어가다 보면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때서부터 공부입니다, 인제. 말을 하자면 그때부터 이승 저승을 마음대로 회전하면서, 왕래하면서 진짜 공부를 하는 겁니다. 체험하면서 숙달시키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모두, 당장 앞에 닥치기만 하면 그저 팔자 타령을 합니다. 애들이 공부를 안 해도 “아이고, 내 팔자야!” 또, 남편이 속을 좀 썩여도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래?” 몸이 조금만 아파도 “무슨 죄가 많아서 내가 이러냐.” 이러거든요. 아니, 그건 자기 생각이지 부처님이 그렇게 하라고 그랬나요? 여러분이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그렇게 고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고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하시고 싶은 분들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또 질문하실 분이 있으면 질문도 해 보시고요. 우리가 서로 토론하는 데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데서부터 있는 것이지 큰 데서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내 조그마한 마음속에서부터 큰 우주를 덮기도 하고 들기도 하고 굴리기도 하는 것이지….

질문자1(남): 스님,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큰스님: 예.
질문자1(남): 스님께서 말씀하신 한마음이, 그리 좋은 게 어째서 있을 수 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어째서 그런 게 있습니까?
큰스님: 지금 저분이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런 일이 어디서 그렇게 생길까요?
질문자1(남): 글쎄 말입니다.
큰스님: 네, 그렇죠! ‘어디서 생길까요?’ 하는 그 말 나오기 전에, 우리는 지금 모두가 수십억 마리가 한데 합쳐져서 인연이 돼서 몸뚱이 하나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마음을 내놓으려 해도 내놓을 수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무한의 진리라고 합니다. 끝간 데가 없습니다, 그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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