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둘레길 그리고 망월사 장경사
‘남한산성 둘레길’이다. 사적 57호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최초로 토성이 구축됐다. 오늘날의 성곽 모습은 조선 인조 때 만들어졌다. 청량산(해발 500m)의 험준한 지형을 따라 쌓아올린 성곽의 둘레는 11km에 이른다. 이 가운데 본성은 9km이고, 나머지 2km는 옹성(甕城)이다. 성곽을 따라 걷는 둘레길은 5개의 구간으로 나눠져 있다. 성벽을 따라 걷는 남한산성 둘레길은 구간마다 길의 모양과 주변 환경이 변화무쌍해서 잔잔한 걷기와 다소 힘든 걷기까지 다양한 ‘걷기’를 즐길 수 있다.
동문에서 시작해서 동장대터까지 걷는 2구간을 걸었다. 길이는 약 1.4km로 걷는 데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남한산성 둘레길은 보통 남문에서 시작해서 성곽을 따라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남문으로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한산성 안에는 9개의 절이 있었는데 현재는 4개의 절만이 전해온다. 2구간에 망월사와 장경사가 있다.
“청의 유군들이 남한산성을 멀리서 둘러싸고 좁혀왔다. 산세가 가파른 서문 쪽으로는 보병이 다가왔고, 물이 흘러서 들에 잇닿은 동문 쪽으로는 기병이 다가왔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보면, 조선의 임금 인조는 “그 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고,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고 했다고 썼다. 동문(좌익문) 앞에 섰다. 성문은 며칠 전 내린 눈을 이고 꽁꽁 얼어 있었다.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추운 겨울이 그 해 겨울과 비슷하다.
망월사는 일제강점기에 폐사됐다가 1990년부터 중창불사를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망월사와 함께 장경사, 국청사, 개원사가 복원됐다. 망월사를 나와 동문에서 다시 둘레길을 시작했다. 성문에 이어진 성벽 위로 잔설이 길게 얹혀있다.
2구간에는 비교적 가파른 길이 많다. 시작부터 가파르다. 성벽 밖으로는 무례한 발자국에 짓밟혔던 조선의 슬픈 산하가 펼쳐져 있고, 성벽 안쪽으로는 조선의 임금과 신하와 군사가 초조하게 걸었던 숲이 길을 따라왔다. 겪지도 않은 역사가 먼 조상으로부터 전해진 무의식의 형질처럼 현장을 보는 것만으로 유추되고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일 뿐이고 성벽으로 나뉜 산성의 안과 밖은 ‘안’과 ‘밖’일 뿐이었다. 성 밖의 지난날이 어떠했든 먼 하늘엔 구름이 떠 있고, 성 안의 남겨진 것이 무엇이든 숲에선 새들이 지저귀고 있다.
장경사를 나와 다시 성벽을 따라 길을 걸으면 완만하던 성벽길은 모퉁이 하나를 돌면서 돌변한다. 동장대(지휘와 관측을 위한 누각)터로 오르는 약 300m 길은 급경사 길이다. 한바탕 땀을 쏟으며 길을 오르면 동장대터가 있는 산성의 꼭대기다. 성 밖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요하기만 한 성 밖의 설경은 고단했던 역사의 실존을 의심케 하고 측은한 마음을 일으켰다. 어찌 조선의 임금은 이곳까지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들고 와야 했을까. 남한산성 둘레길은 개인적인 사색만을 허락하는 길은 아니었다. 겪지 않았지만 영혼이 물려받은 역사의 유산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벽을 따라 걷는 남한산성 둘레길은 지난날과 함께 걷는 길이다. 성벽 위로 한바탕 칼바람이 지나간다. 김훈이 <남한산성>에서 다시 적는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