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자기 안에 다 놓는 것이 바로 그릇을 탕탕 비우는 공부[918호 12월 12일]

▲ 그림 최주현



어떻게 마음을 비워야 하는 건지요
문)
저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식구들을 편안하게 살게 해 주고 싶은데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경제적으로 좀 궁핍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되는 일이면 이것저것 다 해 보려고 하지만 워낙에 밑천이 없다 보니 나아지는 게 없습니다. 모두들 마음을 비우라 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비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 여러분은 지금 이 마음을 비우라 하기 이전에 아주 탕탕 비어 있습니다. 그런 걸 왜 모르십니까? 본래 비어져 있습니다. 돈을 억만 금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건 가진 게 아닙니다. 비었습니다. 자기의 추에 의해서 그냥 돌아갈 뿐입니다, 재산도 모두가. 여여하게 쓰십시오. 여여하게 사랑하고 여여하게 쓰시고 여여하게, 그냥 하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처가 되어 봤어야, 그것도 이름해섭니다. 부처가 되어 봐야 보살이 될 줄 알고 보살이 될 줄 알아야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참사람이요, 이름해서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신도 자기요 보살도 자기요, 부처도 자기요 중생도 자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기의 태초의 모습이, 자기 이 오장 육부의 세포를 타고 자기의 참 그 태초의 모습들이 지금 자기 속에 우글우글하고 있습니다, 갖은 각색으로. 그런데 자기가 선장으로서 한생각을 내면서 드립다 지금 여여하게 뱃놀이를 하고 가는데 흥! 소리를 못 지르나마, 노래는 하지 못하나마 왜 여여하게 가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이 그 놔라 하기 이전에 놔져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놓지 않고 있다면 지금 자기 생각에 의해서 그냥 잔뜩 끼고 있어서 그렇지, 그건 여러분의 탓이에요. 그냥 돼 있는 건, 여러분이 걸어다니실 때에도 그 발자취가 없는 겁니다. 그 발자취는 금이 아니고 보석이 아니고 돈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무심하고 왔기 때문에 그냥 없는 거지, 아마 발짝 하나 딛는 데 금은보화가 10억씩 붙어 있다고 그런다면은 ‘아휴! 한 걸음에 10억씩 붙어 있는데 내가 이거를….’ 네? 이럴 겁니다. 그러나 이거는 뭐 하나도 돈 내는 것도 없고 돈 붙는 것도 없고 뭐 하나도 이익이 없으니까 그냥 태연하게 그냥 걸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아나가는 것도 태연하게 그렇게 가십시오. 여러분이 집에 들어가실 때 신발을 내가 벗고 들어간다는 생각이 있이 들어가십니까, 신발을 벗는다는 생각이 없이 들어가시는 겁니까? 똥 누러 갈 때 똥을 누러 간다고 생각을 하고 갑니까, 그렇지 않으면 똥만 마려우면 그냥 뛰어 들어갑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똥 버리는 건 아깝지 않고 금 버리는 건 아깝거든요. 네? 마음이 이렇게 괴상망측합니다.

나를 한번 봐도요, 돈이 백만 원이 들어왔든 천 원이 있든 그것은 한 개도 없습니다. 누구한테 한 개도 받은 예도 없고 준 예도 없습니다. 주고 받은 게 없어요. 그건 왜 그러냐? 절이 있어도 이게 바로 내 것만이 아니고 여러분과 동시에 나와 같이 여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여래의 집이기 때문에 나는 욕심부릴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이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이 가정을 가지고 있고 자식과 아내와 다 같이 이렇게 있으면서도 그것은 바로 동시에 식구들 거기 때문에 내 거라고만 할 수 없으니 그냥 놓으시고 사셔야 합니다, 그냥 그대로.

아이 글쎄, 여러분이 아버지로서 아버지의 몸이 자기 몸입니까? 왜 자기 겁니까? 자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부인의 바로 남편이고 그 자식들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아버지가 될 때 자기라고 하겠습니까, 남편이 될 때 자기라고 하겠습니까. 어떤 거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거라고 할 것도 없고 남의 거라고 할 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내가 여여하게 그냥, 벌게 되면 벌고 못 벌게 되면 못 벌고 이러는 반면에 내가 그대로 버는 것도 못 버는 것도 그냥 그대로, 그대로입니다.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쓸 때 쓰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 우주천하가 다 내 거라면은 무엇 때문에 그걸 짊어지고 다닙니까? 짊어지고 안 다녀도 그냥 허허지 늘어진 게 바로 나고 내 생명이고 내 것이고 나 아님이 없고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도리를 꼭 하십시오 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자아내려면 자기 주인공을 믿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왜 자기를 낮게 생각을 합니까. 낮게 생각도 말고 높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석존께서도 어느 신도가 아프다고 누웠는데 그 신도가 그 석존을 뵙고 싶어서 무척 아프면서도 앨 썼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도가 스님한테 가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 밑의 제자들더러요. “야, 우리 고을에 아무데에 사는 아무개는 이렇게 죽을 날이 며칠 안 남게 아파서 누웠으면서도 한 번만 뵙고선 갔으면은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이렇게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까 “그러면 가야지.” 하고서 일어나서 가셨습니다. 가셨는데 이 아픈 사람이 석존이 들어오시는데 어떻게 누워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어나려고 하니까 드러누우라고 했습니다. 이 육신은 드러누웠으나 앉았으나 일어나나 그것은 상관이 없다. 단, 네 마음이 그토록 그렇다면 벌써 일어나서 그렇게 반겨 줄 수 있는 그 진정한 진실한 마음이 있노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고 절을 삼 배 했느니라 하거든요. 그 뜻이 뭐겠습니까? 우리네 마음이 말입니다,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네 마음이 자기를 구덩이에다 넣을 수도 있고 구덩이에서 나오게 할 수도 있는 묘법을 가지고 있답니다.

여러분은 이론으로 정말이지 저보다도 이 세상에 모두들 유명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말로 이론으로서 무불통지 하셔서 말을 참 잘하신다 하더라도 못하는 나만 못한 겁니다. 그 뜻을 아십시오. 열 번 백 번 만 번 말을 잘한다 해도, 또 이 물질적으로나 우리 이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율법을 지킨다 해도, 이 무의 세계의 두루 법은 이건 따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의 두루 법은, 두루 모습은 무궁무진한 겁니다. 한 번 행하기가 어려운 거지, 한 번 행할 때는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행할 때에 한 주장자를 탁, 주장자가 동그랗게 말려서 아주 가지고 다니는 사이 없이 가지고 다닐 때 주장자가 한 번 탁, 이렇게 용도에 따라서 딱 들었다 하면 쭉 펴지면서 소리가 요란하게 날 때에는 우주간 법계에서 다 그 소리를 듣고 다 같이 호응을 해 준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이 몰라서는 아니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 법이.

지금 우리 조그마한 반쪽 된 나라에서도 그렇게 무슨 가난하게 이렇게 살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이 부자라면, 허허 웃으면서 나물 먹고도 그 요지로 이빨 쑤시듯 반쪽 나라에서 살면서도 이렇게 여여하고 좋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그 능력입니다.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갈 수 있고, 손 없는 손이 두루 할 수 있고, 발 없는 발이 길 없는 길을 두루 할 수가 있는 이 묘법을 가지고 있다면 구태여 무슨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 우리가 지금 현재에 물질적인 생활로서, 물질적인 과학으로서, 물질적인 모든 공업으로서 이 세상 모두 살아나가는 문제, 경제 이런 문제, 이런 것도 모두가 포함해서 한 추에 모두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거짓말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철두철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 도리를 아신다면은 이렇게 자비하고 묘하고 이렇게 당당한 이 도리가 어디 있을까 하고 이 세상을 다 바꾼대도 바꿀 수 없는 이런 도리가 바로 여기에 나한테 있구나 하는 걸 아실 겁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마음, 이론적인 아는 게 있다 하더라도 다 자기는 그 참자기 안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한 문으로 들었다가 한 문에서 나오는 거니 모든 것은 그 나오는 대로에 거기에 다시 놓으십시오. 그러면 빈 카세트가 될 겁니다. 바로 이것이 비우는 공부며 아주 탕탕 그릇을 비우는 공부입니다. 비워야 바로 우리는 항상 집어먹을 수 있고 그저 닥치는 대로 놓을 수 있어요, 항상 비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도 다 아실 테지만 말입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요
문)
스님, 저는 참 외롭습니다. 회사에서도 어느 정도 직위는 있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요. 친구도 그렇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제 성격이 좀 직선적이라 돌려서 말하질 못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제 뜻과는 상관없이 상대방은 상처를 입게 되더라고요. 공부한다 하는데도 이 습이 잘 안 녹아져서 부끄럽습니다.

답) 우리가 이 생각을 평탄하고 둥글고 겸손하게 가져야 합니다. 누구에게 겸손하게 하라는 것보다도 자기 스스로 마음이 겸손해야 돼요. 항상 뾰죽하게 폭 뚫는 것보다도 스르르 돌려서 남 맘 상하지 않게, 이렇게 할 수 있는 그 마음, 그 마음이 모두를 이익하게 할 수 있는 자비요, 지혜죠. 남이 잘못한다고 해서 “넌 왜 그렇게 잘못하니?” 하고 하기보다 “얘, 이럭하면 이렇게 잘못되는구나.” 하는 거하고는 다르죠. 앞의 거는 감정이 생기고 뒤의 거는 감정이 안 생기죠. “아휴, 그런가요? 그렇겠군요.” 하고 외려 미안해합니다. 그럴 때 “미안할 거 없어. 사람이 살다 보면 말이야, 이거보다도 더 잘못하는 일도 있고, 이거보다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수도 있고 그런데 아이, 사람이 죽고 살고 이거 뭐, 다 떨쳐버린 거를 뭐 이거 가지고 그래? 내가 지금 죽는대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하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이 세상에 내가 잘났다고 하려고 이 공부 하는 거 아니거든요. 못났대도 좋고 잘났대도 좋고. 모든 게 나, 과거의 난데, 그것이 다 내 모습이요, 내 마음이요, 내가 미생물에서부터 거쳐온 걸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다 바로 나 아님이 없는 것이고, 내 형제 아님이 없는 겁니다. 어디 송장이 수북하게 쌓였다 하더라도 그것도 바로 내 친척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송장 아님이 없는 거예요. 나도 만약에 내 이 근본이 아니라 분별심만 딱 떨어진다면 금방 송장이 돼 버리죠. 혼백이라고도 하고 모두 죽는다고도 하고 영이라고도 하고 뭐 별 소리 다 합니다마는. 우리가 성품으로 인해서 만법을 응용하고 지금 살아나가는 게 그대로가 여여하다 이러지마는 그 성품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그것을 똑바로 우리는 실감해야 됩니다. 실감치 않고는 안 돼요.

그러니까 내 몸이 없어지면 부딪침이 없어서 그 무진 그 업도, 습이라고 하죠. 그 인연의 습이, 인연줄이 끊어지질 않아요, 끊으려고 한다면. 끊는 게 아니라 녹이는 겁니다. 망상을 끊어라 끊어라 하는데 끊는다면 끊어지나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그냥 생기는 대로 자연적으로 놓는 겁니다. 맡겨 놓는 거예요.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다 다시, 아주 막말로 “네 자리에서 나온 거 네 자리에다 쑤셔넣어라.” 이러죠. 우리가 이 습을 놓으려면, 그러지 않아도 습이 자꾸 생기는데, 나는 대로 습을 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살아나가는 대로, 이게 모두 누가 하는 겁니까? 원동력인 이 주처에서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 주처에서 나오는 것 주처에다 다시 맡겨 놓고, ‘들이고 내는 것은 거기밖엔 없다.’ 하고 진실히 믿어 보세요. 그 믿고 가는 길에서 모두 타파가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어차피 한번 이렇게 왔다 이렇게 가는 거
한번 칼을 뺐으면 끼지 말고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앞으로 어떠한 고비가 닥친다 하더라도
그거를 관여 않고 그냥 걷는다.
무찌르고 걷는다.
흙 속에 빠지면 어떻고 물 속에 빠지면 어떻고
불 속에 빠지면 어떻습니까.
나 하나를 놓는다면
모든 것이 붙을 데가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너무 물질에만 얽매여 살았어요
문)
지금까지 저의 삶을 돌아보니 사는 데만 급급하고 너무 물질에만 얽매여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마음의 능력을 키워서 좀더 지혜롭게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한 말씀 일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불교라는 이 자체가 마음 깨닫는 불교입니다. 불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십니까. 이 불씨 하나가, 마음이 근본이라면 이 불씨 하나가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도 있고 엄청난 일을 해낼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묘법을, 우리 자체가 그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활력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개발이 안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개발을 못하고 그러니까 결국은 들이고 내는 그 마음의 능력이 서질 않죠. 껍데기로만 그냥 빙빙 돌아가니까 말이에요.

항상 물질에 매이고 사는 데 매이고 그 습을 놓지 못해서 항상 애착에 끄달리거든요.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살 놈의 거, 그렇다면 깨달음에 의해서 갈 수 있는 그 길을 택해야죠. 그렇다고 해서 살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지금 현재의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가정이나 그런 걸, 모든 걸 버리라는 게 아닙니다. 버리지 않으면서도 굳건히 생각하고 착을 두지 말고 모든 거를 근본자리에 맡겨 놓고 그대로 빈 배가 물 위에 떠서 그냥 둥실둥실 떠가듯이 이렇게 순리적으로 떠 가라는 얘기죠.

어차피 인생은 이렇게 왔다 이렇게 가는 거, 한번 칼을 뺐으면 끼지 말고 가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 앞으로 어떠한 고비가 닥친다 하더라도 그것을 관여 않고 그냥 걷는다. 무찌르고 걷는다, 그냥. 흙 속에 빠지면 어떻고 물 속에 빠지면 어떻고 불 속에 빠지면 어떤가. 나 하나를 놓는다면 모든 것이 갖다 붙일 데가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자기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거죠. 사랑도 자기가 있기 때문에 사랑이 있고 바로 괄시도 자기가 있기 땜에 괄시를 받는 거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즐거움도 있고 또는 슬픔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 원리를 알아야지, 그걸 모른다면 얼마나 방황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라면 좀 똑똑하고 톡톡하고 좀 지능 있고 지혜 있고, 이런 길로 택해서 온 우주를 한 주먹 안에 넣고 용을 할 수 있는, 스스로서 용이 될 수 있는 그런 개발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는
문)
최근에 천안함 사태 및 연평도 포격 사건에 이어 김정은의 대남공세 강화 등으로 인한 북한의 위협으로 우리의 군부는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때에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요.

답) 우리가 내 국토에 어떠한 문제가 크게 벌어진다면 우리는 한 배 안에 탔는데 그 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가는 거 잡지 말고 오는 거 막지 말랬는데, 그 자리에서 여러분도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즉 말하자면 무람선을 타고 지금 같이 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 현재에도 가고 있는 거예요. 간단히 비유하자면, 미국이다 할지라도 바로 앉은 자리고, 저 다른 달나라라고 할지라도 앉은 자리고, 멀고 가까운 게 없어요. 대천세계다 할지라도 앉은 자리예요 몇 억겁 광년이 된다 할지라도 앉은 자리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손살피 말하자면 지금 국내의 문제라든가 가정 문제라든가 사회 문제라든가 이 발판이 제대로 완고히 틀이 잡혀서 서 있는 그런 형편이 못 된다고도 볼 수 있어요. 되긴 됐으나 우리가 정돈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 정돈이 되지 않는다면 모두가 정돈이 되지 않아요. 마음이 한데 뭉치지 않는다면 모두가 정돈이 되지 않는 폭이죠. 물론 많이 마음들을 참 계발하고 뭉치려고 앨 쓰는 그런 그 모습들이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한생각이, 여러 명이 그렇게 몸들이 일어나서 한데 뭉친다고 앨 쓰기보다 한 사람이 한생각을 하는 데 의의가 있다는 얘깁니다. 몸으로도 그렇게 해야 하지만은 생각이, 한생각이, 석존이 꽃 한 송이 드는 데 우주 전체가 들린다고 했죠?

그런데 그러한 한생각에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주인공에 들이고 내고 들이고 내고 하는 그 덩어리를 몽땅 하나로 들 때에, 결국은 어떠한 군사적인 문제라든가 어떠한 무기라는 문제 또는 거기에서 활용하는 그러한 양면, 사면, 삼면 이렇게 둘러싸이고 있는 이 지금 우리의 조그마한 땅덩어리 반 덩어리가, 여러분이 편안하다 그러면 편안한 것이고 시급하다 그러면 시급한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걱정할 게 없다 하는 것은 그래도 실낱 같은 고 한 티의 불씨라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 불씨로 하여금 모든 것을 정돈하고 나가는 겁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데에 나가 있고 보이는 데 나가 있는 거예요. 보이는 데에, 나는 이 육신을 보고 상대를 맞추어서 살아나가고, 연쇄적으로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주고 저 사람이 또 나를 주고 이렇게 해서 같이 동체로서 살아나가지마는, 무루의 그 나 아닌 참나가, 그거는 체가 없기 때문에 수만 수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움죽거릴 수 없는 돌덩어리다 할지라도 근본에서 바로 내가 그 돌덩어리를 보는 순간 벌써 이 돌은 살아 있는 겁니다. 저 나무 이파리 하나하나가 바로 법신이 돼 버리고, 화신이 돼 버려요. 양식이 없을 땐 양식으로 돼 버리고 군사가 없을 땐 군사로 돼 버리고, 이 모두가. 무기가 없을 땐 수많은 갖은 각색의 무기가 될 수도 있고 갖은 각색의 신장이 될 수도 있고 장군이 될 수도 있고, 군사가 될 수도 있고, 바람을 일으키려면 바람을 일으키고 자게 하려면 자게 하고, 급하면 급한 대로 되는 겁니다.

그 무기는 바로 여러분 가슴에 있어요. 그건 미사일보다도 더 무서운 거예요. 무섭다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만 능사는 아니거든요. 죽이지 않고 덜 죽이고 또는 사람 마음을 곱게 만들어서 잘 리드해 나가는 것도 역시 방편이자 진실입니다. 급하면 급한 대로 다루는 법이죠. 급하면 급한 대로 드르르 한번 치는 건 치는 거지, 어떡합니까?

우리의 이 보배 하나 가지고 우리 국내의 사람들만 그 정신력이 투철하게 한생각 넣어서 에너지가 돌아간다면, 그렇게 연구하는 데도, 연구하는 사람들도 잘 연구가 되게끔 돼 있거든요. 그러니 모두가 이익이죠. 여하튼 이 도리를 알아야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눈 깜짝 안 하고선 턱턱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아직 난 공부가 안됐으니깐 이거 안되지.’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급하면 급한 대로 하는 거예요. 이가 없는 사람 고기 못 먹는다 그러죠? 잇몸으로도 잘 먹습디다, 급하니까. 급하면 급한 대로 사는 거고, 모두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 심이라는 그 불씨가 그렇게도 어마어마하고 광대무변한 거를 스스로서 알아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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