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성곽 둘레길 그리고 봉녕사, 수원사, 용주사

동남각루에서 창룡문 방향으로 나있는 화성 성곽 둘레길. 성곽 틈틈이 보이는 수원 시내의 모습과 선조들이 남긴 유적들이 조화를 이뤄 즐거움을 선사한다.
사도세자의 릉인 융릉이 위치한 수원 화성에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수원을 조성한 정조의 효심이 깃들여 있다. 화성 성곽을 따라 있는 둘레길에는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정조로부터 수원성 축성의 명을 받은 이는 불교계와도 교우가 깊었던 젊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었다. 당시 다산의 나이는 31세 였다. 젊은 학자의 젊은 사상은 이상적인 성곽을 만들어냈다.

당시 수원 화성의 조성은 사도세자 묘 이장을 주장한 보경 스님 등 불교계와 신진 사상가들의 힘이 모아졌다. 다산은 정조 18년인 1794년 성을 쌓기 시작해 2년 뒤인 1796년 이를 완성했다. 성곽 둘레는 5.7km로 성인 걸음으로 한 바퀴 도는데 2시간가량이 소요된다.

옛 멋과 현대미 깃든 도심 속 성곽길
수원 화성 성곽을 따라 만들어진 둘레길은 평일에도 많은 시민들이 성곽을 도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성 안팎으로의 출입은 4대문과 암문 다섯 곳을 통해 이뤄진다. 창룡·장안·화서·팔달문 등 4대문과 북암문·동암문·서암문·서남암문·남암문 등이 그것이다.

수원 화성이 한양 도성의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문인 장안문이 사실상 정문이다. 장안(長安)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나라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국보1호인 숭례문보다도 크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자리한 동문인 창룡문까지는 1km거리. 도보로 15분가량이 소요된다. 창룡문 인근에는 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봉녕사가 있다.

봉녕사는 조계종 제 2 교구 용주사의 말사로서 수원 동쪽 광교산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 120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해 성창사라 했다가, 1400년경 봉덕사라 개칭, 1469년 중수하여 봉녕사라 불렸다. 고려시대 불상인 석조 삼존불과 약사전의 신중탱화, 현왕탱화가 유명하다.

속세의 부질없는 잡념과 근심은 일주문을 넘기 전에 다 내려놓게 된다. 부처의 진리를 향한 일심으로 일주문을 조심스럽게 넘어간다. 대웅전 앞뜰에 800년 된 향나무가 길손을 맞이한다.

봉녕사는 1971년 비구니 묘전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며 폐사 직전의 사찰을 요사와 선원을 신축해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었고, 1974년 대웅전을 신축하면서 확장했다. 그 해에 비구니 묘엄 스님을 강사로 승가학원을 설립하고 세계 최초의 비구니 율원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수원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지만 사찰은 낡고 퇴색한 모습보다 섬세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잘 가꿔진 숲과 마당 등 비구니사찰 특유의 깨끗함이 인상 깊다.

다시금 봉녕사를 나와 창룡문을 출발해 수원 남문이자 번화가인 팔달문으로 향한다. 팔달문으로 향하는 길목에선 수원 화성을 가로지르는 수원천을 만난다.

도심문화 포교의 선구적 입지를 다져온 수원사
성 안쪽으로 수원천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동남각루와 함께 전국 3대 포교당 중 하나로 꼽히는 수원사(水原寺)에 도착한다. 수원사는 한국 최초의 포교당 각황사(현재 조계사), 강릉포교당과 함께 전국 3대 포교당으로 불리며 근대불교 도심포교의 상징이었다.

1912년 용주사 수원포교당으로 건립된 이 곳은 일제강점기 도심포교를 진행했다. 1957년 화광사(華光寺)로 이름을 바꿨다가 지금은 수원사로 불리고 있다.

수원사의 본 법당인 극락대원전(極樂大願殿)은 1912년 창건 당시에 지어진 건물로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습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다. 극락대원전 월대의 좌측에는 사자모양의 동상이, 우측에는 용 형상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

수원사는 도심포교 뿐만 아니라 근대문화 산실의 역할도 했는데 1929년 9월 한국 최초 여성화가인 나혜석 전시회가 수원사에서 열기도 했다.

수원사를 나서 수원천을 건너면 사통팔달이란 이름을 낳게 한 팔달문을 만나게 된다. 그 이름 답게 인근에는 시장이 조성돼 있다. 수원 성곽의 남문인 팔달문은 현재 보수공사 중으로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다소 아쉬웠다.

팔달문에서 성곽을 따라가지 않고 도로를 따라 성 안쪽으로 10분가량 걸으면 화성행궁이 모습을 드러낸다.
행궁 뒤편으로는 수원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서장대에 오르는 길이 마련돼 있다. 서장대는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곳으로 이곳에 오르면 성안의 행궁은 물론이고 성 밖 어느 방향도 모두 막힘없이 보인다.

성곽에 기대 도심을 내려다 보는 것은 숲길을 걷는 것과는 다른 맛이다. 마치 조선시대 장수가 된 기분이 든다.

서쪽으로 향하면 서문인 화서문이 나타난다. 이 화서문 서북쪽이 바로 정조가 한양으로 돌아갈 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뒤돌아보며 눈물 흘렸다는 지지대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융릉에 행차할 때 묵었던 왕궁이다.
효도길 걸으며 정조 효심 느껴
지지대에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한 비(碑)가 세워져 있다. 정조 사후인 순조 7년(1807)에 건립된 비석의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있다.

‘조선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 능인 화성의 현륭원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화산의 능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능을 뒤돌아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기 때문에,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해졌다고 해서 한자의 느릴 지(遲)자 두 개를 붙여 지지대라 붙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지지대비에서 융건릉까지는 18.7km 거리다. 수원 화성을 관통하는 능행차로는 대부분 차가 다니는 도로로 사용하고 있다. 성곽 둘레길과 별개로 이 길을 따라 융건릉으로 다시 향했다.

원래 사도세자의 묘는 양주 배봉산에 있었으나 수원 화산으로 묘를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수원 화성 이름도 화산에서 따온 것이다.

1899년 고종 때 사도세자를 왕인 장조로 추존하면서 묘가 원에서 능으로 격상되었고 이름도 융릉(隆陵)으로 바뀌었다.

융릉에는 한 울타리 안에 건릉(健陵)이 있다. 정조와 정조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합장한 무덤으로 융릉과 함께 1970년 사적 제206호로 지정됐다.

이 사적을 관리하는 사찰이 바로 용주사(龍珠寺)다.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정조가 융릉의 원찰로 중창했다.

용주사에 들어서면 일주문과 다른 낯선 문(門) 앞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 보통 향교나 궁, 능, 묘에 세우는 홍살문이다. 융릉의 원찰인 이유로 사찰 내 사도세자의 제각을 지으면서,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는 곳에 세우는 홍살문도 함께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정조의 효심은 용주사 곳곳에서 묻어난다. 일반적인 사찰엔 부처나 보살을 모시는 전각이 대부분이지만, 용주사엔 사도세자의 제사를 지내는 제각인 ‘효성전’이 있다. 다른 전각들에 비해 작고 소박하지만 단정하다.

용주사 홍살문은 효행본찰로서의 상징이다.
현재 이곳엔 사도세자를 비롯해 부인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정조, 정조의 비 효의왕후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그 앞에는 ‘부모은중경’이 기록된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큰 은혜에 대해 내용을 담은 경전이다.

정조는 ‘부모은중경’을 접하고는 백성들도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한문목판본, 한글본을 만들어 사찰에 내렸다.

용주사에 오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 바로 이탑이다.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이곳에 서면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용주사는 부모은중경 탑을 마지막으로 자연스럽게 절 밖으로 나가게 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용주사를 지나간다. 한겨울 짧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세월이 빠름을 느낀다. 부모님에게 효도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정조의 효심과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며 용주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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