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가운데서 여여하게 사십시오

▲ 그림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말이 좋고 이론이 좋고 학식이 좋고 지식이 좋고 이러지마는, 그것은 안으로 구겨넣을 건 넣고 바깥으로 내놓을 건 내놓고 할 수 있게, 중용을 할 수 있게끔 50%의 내면 정신세계 그거를 알아야만이 걸림이 없이 돌아갑니다. 우리 보이는 세계의 50%만이 안다면 보이지 않는 데 50%가 걸립니다.

예를 들어서 차를 타고만 간다면 그 무슨 재미입니까? 그리고 삶에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데는 차를 타면은 내리려고 타고, 내리면 타려고 내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유통돼서 걸림 없이 우리가 차를 타고 내리고 타고 내리고 할 수 있어야지 정상적인 삶이 아닐까요? 그런데 타기만 하고 내릴 적에는 ‘아이구, 왜 타는 거는 알았는데 내리는 게 그렇게 그 안되는 게 많습니까?’ 이러거든요. 되는 것은 됐는데, 얼마쯤 가다 보니까 되는 건 되는데 왜 안되는 게 있습니까 이러거든. 그건 정상이죠.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니깐요. 안되는 건 되기 위해서 안되는 거니까 그것을 재료로 삼아야지 항상 그것을 업으로 삼고 또는 병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항상 병고에서, 애고(哀苦)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겁니다.

생각이 그러하니까, 그 관습에 의해서, 항상 살아오던 습성, 남한테 들은 습성, 본 습성, 습성에 의해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땐 한생각이면은 그냥 다 벗고 턱턱 털고 일어나건만도 아이구! 깐죽깐죽하고 붙들고 늘어집니다. 자기 걸어온 발자취를 왜 붙들고 늘어집니까? 그냥 걸어왔으면 걸어왔을 뿐이지 왜 걸어온 발자취, 걸어온 자체를 쥐고 늘어지느냐 이겁니다. 모든 여러분이 하루살이의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삼천년 전을 바로 일 초로 축소할 수도 있고, 일 초를 삼천년으로 늘일 수도 있다 이 소립니다.

이 모두가 그러하니 우리는 이 껍데기를 벗기 전에 우린 자생중생들을 화(化)하게 해서, 즉 말하자면 보현(普賢)으로 해서 응신(應身)이 돼서 뭇 중생들의 마음을 통해서 응해주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할 줄을 모르는 말이지마는 현재의 우리가 알고 듣고 감지하고 갈 수는 있습니다. 과거에는 부처님께서 수없는 말씀을, 좋은 말씀을 해놓으셨지만은 그때 용어로 그때 삶의 방편으로 모두 말씀을 해놓으셨기 때문에 지금 현실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그 용어를 잘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내 마음에 감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불교가 발전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거 부처님의 말씀을 다 감지하고 감응이 될 수 있게끔 현실의 용어로다 바꿔놓을 수만 있다면 이 불교의 발전에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 한 가지는 모두 여러분이 불교라면은 목탁을 두들기고 머리 깎은 사람만이 불교를 하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불(佛)이라는 거는 일체 만중생들의 바로 생명의 근본이 불(佛)입니다. 그러니 풀 한 포기의 생명도 곤충의 생명도 전부 불입니다. 불 아닌 게 없기 때문에 불이라고 했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해서, 말과 말로 통해서 통신으로 통하고 해서, 통해서 (원을 그려 보이시며) 돌아가는 그 자체가 교(敎)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영원한 것이며 바로 끝간 데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종교의 이름이라 할지라도 불교 안에 안 들은 게 없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셔서 과학자든지 의학 계통의 의학자든지 공업자든지 정치가든지 막론해 놓고, 이 도리를 완전히 습득한다면 심성천체물리학이 되고 심성의학이 되고, 심성천문학이 되고 심성철학이 되고, 모두가 일체 하나도 버릴 게 없이 되는 까닭에 하나도 가질 게 없이 되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광대하고 무변하고 아주 참, 말로는 행할 수 없는, 말로는 수요를 말할 수 없는 이런 평등공법(平等空法)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 알아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듯이, 우리가 평등공법이라 하는 것은 그대로 마음이 연결이 돼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그 뜻의 그릇을 말하고, 한 찰나에 만났다 한 찰나에 떨어지고 하는 그 자체를 볼 때에 우리는 한 찰나에 붙으면 바로 부(父)가 되고 한 찰나에 떨어지면 자(子)가 되듯이 한 찰나에 붙었다 떨어지면은, 이렇게 말할 수 있죠.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느니라.’ 성철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자체가 법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법이 한데 공(空)한 것을 말할 때는 바로 둘이 아닌 까닭에 법은 법대로 있고 바로 행은 행대로 있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찰나에 붙었다 찰나에 떨어집니다. 여러분도 그러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여보!” 하고 부르면 “그래.” 그러곤 대답을 하고 한 찰나에 그 마음이, 소켓이 딱 끼어지니까 둘이 아니게 불이 일어나서 마음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딱 떨어지면 소켓이 싹 빠져서 딱 떨어져서 또 나는 나, 너는 너예요. 나는 나, 너는 너. 이렇게 떨어졌다가 또 한 사람하고 또 딱 붙으면, “아버지!” 하고 붙으면 또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돼서 딱 붙어서 또 소켓이 싹 들어가서 “아버지, 뭐 어쩌구….” “응, 응….” 이러곤 한데 붙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수없이 끝없이 돌아갑니다, 이 세상만사가.

그러는 것을 어떻게 나 하나가 개별적으로 ‘아이구, 잘했다. 내가 설법을 했다. 내가 잘 안다.’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여기 와서 수없는 사람들이 좋아지고 모두 깨쳐지고 또는 병도 낫고 여러 가지 각색으로 성취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지만 나는 내가 낫게 해주고 내가 말을 해줘서 여러분이 깨쳤단 말 안 합니다. 왜? 내가 없기 때문이죠. 내가 따로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여러분이 있듯이 또는 내 몸도 공(空)해서 내가 혼자 한 게 없기 때문에 내세울 게 없다는 사실이죠.
그러니 여러분도 그 뜻을 아시고 그저 자유스럽게 살 수만 있다면,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모든 그 오신통(五神通)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오신통도 벗어나야 하니깐요. 벗어날 수 있다면 정말 자유스런 자유인으로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세세생생에 남의 모든 마음을 집어넣어서 굴려내도 손색이 없고 굴려서 내보내도 손색이 없는 그런 자유인이 돼야죠. 그것이 바로 구경(究竟)에 이르고 열반(涅槃)에 이르는 그런 길입니다. 여러분이 잘 생각하고 다스리시리라고 믿고 질문 있걸랑은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남): 스님, 반갑습니다. 오늘도 마음의 양식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수행 중에 헷갈리는 것이 있어 몇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스님께서 관(觀)의 정의를 안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하여 주인공을 믿는 것이 아니고, 되고 안되고를 맡겨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뜻이 되고 산은 산같이 살라 하고 꽃은 꽃같이 살라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뜻을 세간법으로 정치에 비유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정치란 모든 국민의 뜻을 종합해서 민의에 따라 해야지 억지로 하면 언젠가는 불만이 터지게 되고 불만을 갖고 있는 민중에 의해서 사회가 혼란한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국민의 뜻을 읽는 것이 관이라고 하면 그 뜻을 하나로 모아서 인연 따라 행하는 것이 무심(無心)으로, 업식에 따르지 않는 좌선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단이 생기는 것은 스님께서 안될 때는 ‘너는 할 수 있다.’ 하고 마음을 내라고 하시고 간혹 저도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돌려내다 보면 무심관(無心觀)에서 일보 후퇴하는 일심관(一心觀)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되며 억지로 익힌 감과 저절로 익은 감의 맛이 다르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이가 생기는 것 같아 수행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구하고자 합니다.

큰스님: 여러분이 이렇게 있지만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겠죠. 하나는 내 마음을, 즉 말하자면 과거 부(父)와 현재 자(子)가 상봉을 해가지고 둘로 보지 않는 관찰을 하는 거 다르고, 지금 무지에서 관찰하는 게 다릅니다. 무지에서 관찰하는 것은 겉면만 보고 나쁘다 좋다 하는 거고, 바로 상봉한 사람이 관찰하는 것은 둘로 보지 않는 까닭에 안팎이 다 동시에 관찰이 됩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의 요약이 여러분의…, 여러분은 더 잘 아시겠죠? 그러니 둘 아닌 관찰이라면 자기가 봐서 둘 아닌 관찰이니까, 봐서 딱 한생각 했다고 할 수도 없는 그 순간 바로 손 없는 손이 눈 없는 눈이, 귀 없는 귀가 바로 한 찰나에, 찰나에 왕림이 되니깐요. 그래서 그것은 법으로 행해진다. 그건 즉 말하자면 한 부처님의 마음에 의해서 정해진다 이런 거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가운데서 여여하게 사십시오
‘네가 다 하는 건데,
네 시자를 먹이는 것도 네가 먹일 거고
끌고 다니는 것도 네가 끌고 다닐 거고
굶어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네가 할 것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하고
부지런히 안을 다스리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두고 뛰게 되면
영원한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질문자1(남): 다음 또 있습니다. 이 공부를 하면서 백 원 걱정이 생겨 백 원을 던져버리면 천 원을 주워 천 원 걱정을 만들고 또 천 원을 던져버리면 남의 돈이라도 몇 억을 빌리게 해서 더 큰 걱정을 만들어, 던질 수도 버릴 수도 없도록 만들어 코를 죽이고 귀를 죽이는 공부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스님의 가르침대로 무심 수행을 하노라면 권속이, 식구가 살림살이 투정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면 ‘방심을 했었나?’ 하고 생각을 하면 번뇌가 찾아들어 무심을 흩어버립니다.

이때 걱정을 하면 걱정을 한 것만큼, 마음을 옆 돌린 것만큼 야단을 맞습니다. 이럴 때 그 한생각을 찾아서 거슬러 다시 되바꿔놓으면 시원해짐을 느끼면서 한생각이 법이 됨을 깊이 되새기곤 합니다. 스님의 표현 방법을 빌리자면 무심이 눈을 뜨고 푹 쉬는 것이라면 방심은 눈을 감고 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눈 감고 쉬면 길잡이 야단을 듣고 눈 뜨고 쉬면 권속이 빤히 쳐다보니 이렇게 꽉 막힌 곳에 방귀씨 털 먹이는 도리가 있는 것 같아 수행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구하고자 합니다.
 

큰스님: 그것은 이것도 저것도 다 놔야 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 가운데서 그대로 여여하게 사십시오. 왜냐하면 한 푼이고 두 푼이고 열 푼이고 이거고 저거고 따지게 되면 아주 산란합니다. 더 갖고자 해서 산란하고 덜 가지면 못 가져서 산란하고 이러니까 모든 것을 양면을 다 놓으십시오. 다 놓고….

왜 놔라 이러느냐 하면, 그 모습을 가지고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리고 고정됨이 없이 공(空)해서 돌아가는데 이게 우리가 간단하게 생각하면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는 건데, 자는 걸 버릴 수도 없고 깨는 걸 버릴 수도 없어요. 그러니 한꺼번에 그냥 다 놓구 ‘으응, 그렇게 너는 그렇게 작용을 하는구나.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해!’ 하고 다 놓아버리세요. 그런다면은 ‘너는 네가 다, 네가 하는 건데, 먹이는 것도, 네 시자를 먹이는 것도 네가 먹일 거고, 끌고 다니는 것도 네가 끌고 다닐 거고, 다 굶어죽이는 것도 네가 할 거고 살리는 것도 네가 할 것이니까 너 알아서 해.’ 하고 부지런히 안을 다스리면서 뛰게 되면, 마음을 편안하게 두고 뛰게 되면 영원한 양식을 얻을 겁니다.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화두는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교라고 생각됩니다. 큰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주인공을 잡아라.’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선방에서는 ‘이 뭣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도의 어떤 선지식은 ‘내가 누구인가?’ 했고 또 어떤 이는 ‘내가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선경에는 ‘내 것 보다’고 했습니다. 또 큰스님께서는 ‘아빠’라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많은 화두 중에 내면에 잡히는 것이 있고 잡히지 않는 것이 있는 걸 볼 때 이는 자기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깨치신 분들마다 화두의 표현이 다른 것을 볼 때 이는 무슨 도리가 숨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리는 하나인 것 같은데 표어가 다른 것은 시대나 법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 이 점에 대하여 여쭈고자 합니다.

큰스님: 그 이름의 말이 다 필요 없습니다. 그 이름은 이름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을 벗어나서 그대로 믿고 (정면을 찔러 보이시며) 들어가야 된다 이겁니다. 그 이름을 ‘이게 뭣고?’ 하는 건 수박을 놓고 ‘이게 뭣고?’ 하고 굴리는 거나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가르치는 건 ‘그대로 수박을 잘라서 먹어라.’ 이겁니다. 그대로 수박을 잘라서 먹는다면 바로 영원히 먹일 씨도 나오고 또는 맛도 알고 그럴 테니까 ‘잘라서 먹어라.’ 이런 겁니다.

그 이름을 다, 그 많은 이름을, 그 많은 공안을 다 놓고, 그냥 못 믿지 말고 믿고, 무조건 믿어라. 무조건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깐 상대성도 생겼고 세상도 벌어졌고 부처가 있는 줄도 알았지 내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없는 거 아닙니까? 무효니까. 내가 있으니까 나를 무조건 믿어라. 무조건 믿고 잘라 먹어봐라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주인공’ 하면은 전체 한데 합쳐진 주인공입니다. 개별적인 주인공이 아닙니다. 내면으로나 외부로나 모든 게 한마음으로 뭉쳐진 자체가 바로 주인공입니다. 공(空)해서 돌아가니까.
그러니까 그 주인공은 틀림없이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그냥 전체 뿌리를, ‘나무는 전체 뿌리를 믿어라. 네 나무는 전체 뿌리에서만이 너 나무가 살 수 있다.’ 이런 겁니다. 그래 살 수 있다. 너만이, 너가 있으니까 내가 지금 형성돼서 심부름꾼으로 있지 않은가. 이런 걸 믿고 무조건 놓아라. 무조건 믿고 거기에 맡겨놓아라 이런 겁니다. 맡겨 굴려라 이러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름이 있기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지금. ‘이게 뭣고?’ (손수건과 컵받침을 함께 들어 보이시고) 하고서 굴리다 보면은 십년이 가도 그만, 이십년이 가도 그만, 삼십년이 가도 그만입니다. 먹어봐야 맛을 알죠. 안 그렇습니까?

질문자1(남): 예.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난 주 법회 때 스스로 마음으로 정한 보시금을 바쁜 곳에 대용해 쓰고 다음에 보시하겠다는 것은 즉, 돈에 돈 섞기니까 급한 곳에 먼저 쓰고 형편 되면 다음에 보시하면 되지 하는 생각은, 물건 값을 주고 그 돈을 다시 뺏어오는 경우와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저는 이를 대통령도 자기가 만든 법은 지켜야 되는 것과 같은 도리로 비유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경우를 저질렀을 때 되돌려놓는 방법을 알고자 합니다.

큰스님: 물론 둘이 아닌 까닭을 알 수 있고 관찰할 수 있고 무명에서 벗어나서 여여하게 다스리고 참, 구족(具足)한 사람들은 그것을 따질 필요도 없죠. 허나 지금 배우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꼭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왜냐하면은 가정에서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때에 따라서는 어려워도 우리가 이건 참 감사하니깐 시주를 해야겠다 이러고 떼놓지 않습니까? 떼놓고 있다가 그 이튿날이고 언제고 어이구, 이거 돈이 급해서 그냥 뭐 쩔쩔매다가 아이구, 어디 가서 꿀 데도 없고 그러니까 부처님한테서 꾸어 쓴다 이런 생각으로 쓸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됩니다.

왜냐하면은, 그래서 생각을 잘 해라 이겁니다. 왜냐하면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물건을 산 값입니다. 이 돈을 시주를 하면 누구를 위해서 한 게 아니라 자기 물건 산 겁니다. 그럼 물건은 가져오고 이게 물건 값은 도로 빼앗아 온다면 그건 그 물건 사왔던 걸 도로 뺏깁니다. 그러니까 이건 안 된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미리 아예 내 가정이나 내 삶, 이 모든 것을 생각해서 또 부처님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잘 알아서 정성껏 새 돈으로 바꿔서, 이건 정성이니까 이렇게 떼어놔라 이래야지, 무턱대놓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그냥 막 집어서 이렇게 해놓고 도로 갖다 쓰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건.

그것을 왜 그렇게 내가 일러주느냐 하면 몇 해 전입니다. 몇 해 전에, 여기 아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등포에 사는 사람인데 공업을 새로 시작을 한 사람인데 그저 요만한 하꼬방처럼 해놓고서 그거를 지금 사글세를 들어서 있으면서 그거를 먹고 살 양으로 뭐 물건을 만들려고 그러는데 야, 그 물건이 영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에이그, 그냥 시주를 부처님 앞에 해봐야겠다.’ 그러곤 시주를 그때에 오만 원인가? 잊어버려서 모르겠어요, 얼만지. 그래서 시주를 하려고 그거를 이불 갈피 속에다 넣어놓고는 턱 나왔는데 아, 그 물건을 하는데 돈이 모자라서 쩔쩔매다 보니까 그걸 도로 갖다 썼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그 물건을 되찾아가더라는 얘기예요. 그 물건을 그냥 다 가져가더라는 거예요. 돈 낸 것 그냥 다 줘버리고요. 그렇게 되더라는 얘기죠.

그래가지곤 와가지고는 울고불고 야단났어요.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왜 시주는 했다 도로 빼앗아 갔어?” 하하하. 이랬더니 “아이구, 애들 학교에 뭘 내는데 그걸 낼 게 없어서 그냥 쩔쩔매고 물건도 하는데 모자라서 그랬습니다. 그거 되면 바로 또 넣어놓으려고 그랬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이거야, 절대로. 이거는 부처님 법 이 자체가 그대로, 그대로 법이지 절대로 이거는 이렇다 저렇다 이게 이유가 거기 붙지 않는다 그런 말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에 그런 경험을 나도 했거든요. 그래서 일러드리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분들이 많이 있죠.

질문자1(남): 그럼 일단 법이니까 한번 당해야 된다는 그런 결론이네요?

큰스님:
네?

질문자1(남):
일단 법이니까, 법은 법이니까 자기가 그걸 되돌려받는 방법은 결국 당하는 길밖에 없다는 그런 결론이 나옵니까?

큰스님: 그런데 이 둘 아닌 관찰을 할 수 있고 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라면, 즉 혜향(慧香), 마음의 혜향이라면 해탈향(解脫香)도 할 수 있고,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이게 마음 그대로인데 그대로 그 도리를 알았더라면…. 이거 해가지고 사는 것만 알았지 그 사람들이 뭘 압니까? 그러니깐 알지 못하는 사람 앞에 또 앞으로 그런 일이 생기면 큰일나거든요, 어려운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렇게 일러줬던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그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그 무명 속에서 벗어날 줄 안다면 결국은 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고 그 도리를 아주 완벽하게 알 수 있다면 아무 지장이 없을 테죠? 또 그렇게도 하지 않을 거구요.

질문자1(남): 예. 대단히 감사합니다. 가르침대로 수행 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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