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묘적사 계곡길 그리고 묘적사(妙寂寺)

‘묘적사 계곡길’. 마을버스에서 내리자 표지판이 보였다. 집배원의 빨간 오토바이가 묘적사 계곡으로 향한다. 보낸 사람의 이름과 그 이름이 부탁한 누군가의 주소를 싣고 오토바이가 길을 오른다. 오토바이가 사라진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 길엔 이름처럼 묘적사가 있었다. 11월 20일 걸었다.

경기도 남양주의 묘적사 계곡길은 둘레길로 명명된 ‘걷기’ 길은 아니다. 약 1km 정도 계곡을 따라 오르면 묘적사가 나오는데, 본격적인 묘적사 계곡은 묘적사부터다. 중앙선 덕소역에서 60번 마을버스를 타면 묘적사 계곡길 입구에서 내릴 수 있다. 종점이다. 묘적사까지는 거의 포장된 길이다.

경사가 있지만 힘들지 않다. 갈색의 잔엽(殘葉)을 달고 햇살 쪽으로 기운 메타세쿼이아들이 길을 안내한다. 그 숲에서 태어난 바람을 맞고, 그 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길을 걷다보면 희미하게 풍경(風磬)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묘적사다. 멀리서 빨간 오토바이 한 대가 보였다. 빈 오토바이가 집배원을 싣고 내려왔다. 혼자 살 수 없음이다.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집배원의 손에 ‘나’의 이름과 ‘너’의 이름이 들려 있다. 빨간 오토바이가 다시 멀어졌다.

▲ 묘적사 대웅전과 칠층석탑
묘적사도 추웠다. 노란 은행잎이 모두 땅에 내려와 있다. 얼마 전 가수 이효리가 템플스테이를 하고나서 더욱 알려진 묘적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고려 때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세종 때 학열 스님이 중창한다.

1486년 성종 17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절 이름이 나온다. 일설에 따르면 국왕 직속의 군사들이 군사훈련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유정이 승군을 훈련하는 장소로 썼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는 스님들이 무과 시험을 준비하는 훈련장으로 썼다.

절 앞 동쪽 공터에서 오래 된 화살촉이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활터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는 일반인이 경내에 무덤을 썼을 만큼 폐사되었다가 1895년 고종 32년 규오 스님이 산신각을 중건했고, 1969년에 화재로 소실된 도량을 다시 규오 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전각은 대웅전과 선원, 요사 2채 정도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남양주시 향토유적 제1호인 팔각칠층석탑이 있다. 전각 지붕마다 낙엽이 쌓여 있고, 석탑에도 층층이 노란 은행잎이 쌓여 있다. 마당 한 켠에는 소금에 절인 배추들이 쌓여 있다. 쌓인 배추 옆에서 주지 해송 스님이 장작을 패고 있다. 퍽~퍽 장작이 쪼개지는 소리가 도량에 퍼진다.

묘적사 템플스테이에는 다른 사찰과 다른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도량에 찜질방이 있는데, 장작은 찜질방 뗄감으로 쓴다. 그 장작을 주지 스님이 손수 팬다고 한다. 장작을 패고 있는 주지 스님 곁으로 멀리서 도반이 찾아왔다. 도반을 알아 본 해송 스님이 말없이 도끼를 건넨다. 인사다. 도끼를 건네받은 도반 스님이 단번에 장작을 쪼개낸다.

인사다. 한 동안 해송 스님과 도반 스님은 도끼를 번갈아 들며 장작을 팼다. 주지 스님이 도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차 한 잔 합시다.” 기자도 따라 들어갔다. “이제 날이 좀 춥네. 오늘 김장하는 모양이지?” 도반 스님은 양수리 세종사의 주지 윤성 스님이다. “도량이 템플스테이 하기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도심서 가깝고 금방 자연 속으로 들어올 수 있어 좋습니다.”

기자도 인사 겸해서 한마디 했다. 주지 스님이 찻잔을 다시 채워주며 말했다. “도량이 다 좋지요. 따로 좋을 게 있습니까?” 도반을 찾은 윤성 스님이 안부를 물었고, 해송 스님도 윤성 스님의 안부를 물었다. “뭐, 날 추워지니까 장작 패고… 그러고 살지 뭐.” 주지 스님이 새 물로 다시 차를 우렸다.

내 기사 쓰자고 이것저것 묻기가 뭐해서 차 석 잔 마시고 일어섰다. 오랜만에 만난 두 스님에게 기자는 불청객이었다. 말씀들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다음에 우리 절도 한 번 오세요?” 일어서는 기자에게 윤성 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네 꼭 가겠습니다.” 오라는 곳이 있고 찾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 싶다. 그곳에 도반이 있다면 더욱 그렇지 싶다.

▲ 묘적사 주지 해송 스님〈사진 왼쪽〉과 멀리서 찾아온 도반 윤성 스님이 번갈아 도끼를 잡고 장작을 패고 있다.
대웅전 옆으로 조금 걸으면 백봉산 정상으로 가는 묘적사 계곡길이 이어진다. 묘적사 옆으로 이어진 길은 절밑에서 걸어온 길과 만나는데, 그 지점부터는 사유지다. ‘출입금지’ 표시가 된 철문이 굳게 닫혀있다. 하지만 절을 통하면 자연스럽게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주지 스님도 사유지이긴 하지만 길은 걸어도 괜찮다고 했다. 개울을 하나 건너면 된다.

여름엔 계곡 바위에 앉아 템플스테이를 진행한다고 한다. 묘적사 계곡은 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겨울 문턱이지만 계곡물 소리가 한여름 계곡 같다. 차가운 개울물 옆에는 갈대들이 지나간 바람의 모습을 하고 서있다. 잎새 없는 나무들은 앙상한 서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를 사는 듯 했고, 무성했던 숲을 잃어버린 새들은 자꾸만 울었다.

겨울 숲이다. 모두 가난해 보였다. 가난한 시간이다. 겨울 숲은 가난한 나를 돌아보게 했다. 절 밑에 두고 온 나의 가난. 길은 나의 가난을 물었다.

백봉산 정상까지는 약 2시간 정도 걸린다. 걷고 싶은 만큼 걷고 돌아오면 된다. 어디서 오는 것인지 백구 두 마리가 내려온다. 거기까지 걷고 백구를 따라 산을 내려갔다. 백구는 묘적사 식구였다. 백구를 따라 다시 묘적사로 들어갔다.

마당 한켠에서 다시 장작 패는 소리가 들려 왔다. 묘적사엔 뜨거운 장작이 쌓이고 있었고, 겨울 숲은 가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백봉산 정상으로 오르는 묘적사 계곡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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