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천안제일(天眼第一) 아나율 <하>진정한 천안

▲ 거조암 아나율 나한상
천안제일도 유마의 점검 받아
진정한 수행자의 길 깨달아
지옥까지 볼 수 있는 천안 열려
‘정진’은 가장 뛰어난 수행자 사유
 

아나율은 실명을 불사하고 정진을 거듭한 끝에 비록 육신의 눈을 잃고 앞을 볼 수 없게 되지만 대신 지혜의 눈을 가지게 되어 마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는 천안을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천안을 얻은 아나율도 배움의 길은 끝이 없었다.

유마의 충고
아나율의 ‘천안’을 가장 여법하게 점검해준 이는 유마였다. 유마경에서 전한다. 유마가 아플 때였다. 부처님께서 아나율에게 이르셨다. “아나율 존자여, 그대가 유마의 병문안을 다녀오지 않겠는가?” 아나율이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유마를 뵐 자신이 없습니다. 언젠가 그에게 들었던 설법이 생각나서입니다.” 아나율은 부처님께 고백했다. “언젠가 엄정(嚴淨)이라는 이름의 범천왕이 1만 명의 범천을 이끌고 와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나율 존자여, 그대를 천안제일이라 부른다 들었습니다. 그대는 과연 얼마나 멀리, 어떤 것들을 볼 수 있습니까?” / “벗들이여, 마치 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국토인 삼천대천세계를 한 눈에 봅니다.” 그 때 지나던 유마가 아나율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나율 존자가 천안으로 보는 것들은 작상(作相)입니까? 아닙니까? 만약 작상을 본다면 5신통과 다를 게 없는 것이고, 작상이 아니라면 ‘본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인데, 존자께서 ‘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나율은 그 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작상이란 색(色)을 의미한 것으로, 진정한 부처님 법으로 생각한다면 색은 곧 공(空)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유마의 지적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아나율은 그에 아무말도 못했던 것이다. 범천왕도 유마의 말을 듣고 놀라워하며 그에게 예를 올리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 진정한 천안을 지닌 이는 누구입니까?” 유마가 대답했다. 부처님만이 참다운 천안을 가지고 계신데, 항상 삼매에 들어 모든 부처님의 나라를 빠짐없이 보면서 정작 아무런 분별심도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한다. 1만의 범천이 유마의 설법에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깊은 발심을 하게 됐고, 아나율과 유마에게 예를 올리고 돌아간다. 아나율은 부처님의 청에 유마를 뵐 자신이 없음을 위와 같이 이야기 했다. 아나율 존자는 또 한 번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게 됐고, 다시 초심을 붙잡아 정진한다.

▲ 그림. 김흥인
최상의 여덟 가지 사유(思惟)
아나율의 수행은 다른 제자들과 비교할 때, 좀 더 치열하고, 열정적이었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쉬운 것이 아니지만 그의 수행은 남달랐다. 멈추지 않는 원력이었다. 〈증일아함경〉 37권 팔난품에서 전한다. 아나율 존자가 네 부처님이 머물렀던 곳을 유행하고 있었다. 아나율은 생각했다. 부처님의 여러 제자 중에서 계덕과 지혜를 성취한 사람은 모두 계율을 의지하여 이 바른 법 안에서 자라난다. 여러 성문들 중 계율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바른 법을 떠나고 계율과 상응하지도 못한다. 계율과 지식, 두 가지 법에서 무엇이 더 훌륭할까?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이 법은 만족할 줄 아는 이가 행할 바로서 만족할 줄 모르는 이가 행할 바가 아니다. 이 법은 욕심이 적은 이가 행할 바로서 욕심이 많은 이가 행할 바가 아니다. 이 법은 한거(閑居)하는 이가 행할 바로서 번잡한 곳에서 행할 바가 아니다. 이 법은 계율을 지키는 이가 행할 바로서 계율을 범한 이가 행할 바가 아니며, 삼매에 든 이가 행할 바로서 어지러운 이가 행할 바가 아니고, 지혜로운 이가 행할 바로서 어리석은 이가 행할 바가 아닌 것이고, 많이 아는 이가 행할 바로서 아는 것이 적은 이가 행할 바가 아니다.” 아나율은 이렇게 일곱 가지가 수행자가 지녀야 할 사유라고 생각하고, 부처님께 여쭙기로 한다.
부처님은 기원정사에 계셨다. 아나율이 부처님게 여쭈었다. “저는 계율과 지식, 이 두 가지 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훌륭한가에 대해서 사유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나율아, 알아야 한다. 만일 비구가 계율을 성취하면 선정을 얻을 것이요. 선정을 얻으면 지혜를 얻을 것이며, 지혜를 얻으면 지식을 얻을 것이며, 지식을 얻으면 해탈을 얻을 것이며, 해탈은 얻으면 무여열반에서 열반하게 될 것이니, 이로써 계율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느니라.” 부처님의 법을 들은 아나율은 다시 자신이 품었던 수행자의 일곱 가지 사유에 대해 여쭈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아나율아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수행자의 사유’다. 욕심을 적게 가져야만 만족할 줄 알고, 한적한 곳에서 지내며, 계율을 성취하고, 삼매를 성취하며, 지혜를 성취하고, 해탈을 성취하며, 지식을 성취하라. 아나율 존자여, 그대는 이런 뜻을 세워 내가 설하는 여덟 번째를 더한 ‘여덟 가지 수행자의 사유’를 깊이 간직하라. 그 여덟 번째 법은 정진하는 이가 행할 바로서 게으른 이가 행할 바가 아닌 것이다.” 부처님이 마지막 여덟 번째 법을 더해 법을 완성한다. “왜냐하면 미륵보살은 30겁 동안 정진하여 위없이 바르고 참되며 평등한 바른 깨달음을 이룰 것이요. 나도 정진의 힘으로 부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아나율아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는 모두 똑같은 유(類)로서 그 계율과 해탈과 지혜가 같아 조금의 차이도 없으며, 또 공(空)이고 상(相)이 없고, 원(願)이 없는 것도 같으며, 32상과 80종호로 그 몸을 장엄하여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고 모두 같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정진만큼은 같지 않으니,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 중에서 정진으로는 내가 제일이니라. 그러므로 이 여덟 번째 수행자의 사유가 가장 뛰어나고 높고 귀한 것으로서 가히 비유할 바가 없느니라. 그 여덟 가지 수행자의 사유 중에서 정진이 가장 뛰어나 더 이상 견줄 것이 없으니 그 여덟 가지 대인의 사유를 대중에게 설해주어라. 그 법이 세상에 널리 퍼진다면 나의 제자들은 모든 도를 성취하리라.” 이 때 아나율이 깨달은 깨달음은 아나율의 수행 과정에서 가장 수승한 깨달음을 얻은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아나율은 깨달음으로 가는 구체적인 길을 깨달았던 것이다. 잡아함경 19권에 의하면, 목건련 존자는 그에게 깨달음으로 향하는 여러 덕목인 37각지(三十七覺支)와 사념처(四念處)에 대해서 물어볼 정도였으며, 비구들은 그에 대해 아나율에게 설법을 청했는데, 이 37각지에는 사념처를 비롯하여 팔정도, 사무량심 등 부처님 당시 수행의 전 체계가 망라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불법의 정수 중에 정수라 할 수 있다.

지옥을 보다
아나율의 천안은 점점 깊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옥까지 보게 된다. 지옥을 본 그는 궁금했다.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왜 저토록 지옥이 넘치는가? 어떤 이들이 지옥으로 가는가.” 아나율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탐욕의 마음을 거두지 못해서 인색하고, 분노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시기하고, 어리석은 마음을 보지 못해서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지옥이 넘치는 것이다.” 이 때 부처님은 지옥이 넘치는 것을 탐ㆍ진ㆍ치(貪ㆍ瞋ㆍ癡) 삼독(三毒)을 버리지 못함에서 온 것이라며, 중생들이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마음이 탐욕에 물들었고, 성냄에 물들었고, 어리석음에 물들었기 때문에 오온(五蘊)에 대한 애착과 갈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윤회하는 것이라고 설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기둥에 묶인 개가 기둥을 벗어나려면 기둥에 묶인 끈을 풀어야 하듯이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삼독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하시며, 내 마음이 번거러우면 세상이 번거롭고, 내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세상이 또한 맑고 깨끗해진다.”고 설했다.

부처님의 열반을 지키다
부처님의 육신도 많이 쇠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이제 무거운 짐과 같았던 몸과 마음조차 소멸하는 열반에 드는 일만 남았다.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인 수밧다가 구족계를 받던 날 밤이었다. 수밧다가 구족계를 받고 물러가자 부처님은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부처님의 곁엔 아난다와 아나율이 있었다. 아난다와 아나율은 알고 있었다. 부처님의 열반이 다가오고 있음을. 비구들이 하나 둘 부처님 곁에 들었다. 5백비구가 모이자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물으셨다. “비구들이여, 부처와 법과 승가에 대해 의심이 있는 사람은 없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빨리 물어라. 때를 놓치고 후회하지 말라. 내 살아 있을 때 그대들을 위해 설해주리라.”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자 부처님이 거듭 물으셨다. 그래도 답하는 이가 없자. 아난다가 여쭈었다. “이 자리의 대중은 모두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에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과 승가에 대해 의심이 있는 이는 없습니다.”
부처님은 오백 비구의 청정한 눈빛을 하나하나 마주한 후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변하고 무너지나니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나는 게으르지 않았으므로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부처님이 눈을 감았다. 깊은 어둠 속에서 흐느낌이 들려왔다. 부처님의 곁을 지키던 아나율이 대중에게 조용히 말했다. “부처님의 선정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멸수상정(滅受想定ㆍ열반의 또 다른 말로, 마음의 모든 작용이 끊어진 상태)에 들어계십니다. 부처님께서는 곧 열반에 드실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슬퍼하지 마십시오. 인연 맺은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라고 부처님께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인내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들을 어찌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까.” 아나율은 대중에게 부처님의 열반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며 게송을 읊었다.
“무위에 머무시는 부처님 / 나고 드는 숨결 멈추시도다 / 본래 적멸에서 오신 부처님 / 신비로운 광채 이곳에서 거두시도다” 아나율과 아난다는 부처님 곁에서 법담을 나누며 밤을 지새운다.

결집에 참여하다
부처님의 육신은 비록 인연을 다해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지금까지 계속 전해오고 있다. 수행자의 가르침이 실제 수행으로 열반을 증득한 제자들을 통해 계승됐다면, 교학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며 합송하는 결집을 통해 계승됐다. 여섯 번의 결집이 있었는데, 아나율도 결집에 참여한다. 칠엽굴에서의 1차 결집에서 먼저 계율의 결집이 끝나고, 경장의 결집이 있었는데, 아나율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앙굿따라 니까야-증아함〉을 계승했다. 지금 우리 손 위에 놓인 〈증아함〉은 아나율과 그의 제자들의 음성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까지 1250의 제자들이 있었다. 출가 후 수마에 굴복해 부처님께 엄한 경책을 받았지만, 강한 발심의지와 서원의 힘으로 자신의 과오를 극복해낸 아나율은 많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힘겨운 길을 걸었던 제자 중 한 분이라고 이야기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결집에 참여한 제자들의 마음이 모두 한 마음이었겠지만 아나율은 남다른 마음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육안을 잃고 난 후부터 아나율은 부처님의 육신을 보지 못했다. 늘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해내며 마음의 눈으로 그의 가르침을 읽어냈다. 아나율이야말로 문자의 세계를 떠난 수행자였던 것이다. 모든 것을 눈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과 함께 그의 이름은 기억되고 있다. 천안제일 아나율 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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