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부산 포교·복지 새 지평 연 혜총 스님

뇌성마비자 보며 복지·포교 발심
용호종합사회 복지관·어린이집
양정 재가노인 복지센터 등
16개 시설… 직원 1000여 명
“출가 장려·포교회관 건립,
다시 한번 뛰고 싶습니다”

前 조계종 포교원장이자 부산 감로사 주지 혜총 스님을 만나는 자리는 항상 웃음꽃이 핀다. 자그마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스님의 걸걸한 입담과 위트, 재미있게 풀어주는 부처님 이야기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수 밖에 없는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천진하게 웃는 스님의 모습은 만나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준다.

실제 포교원장 재직 당시에도 스님의 집무실 문턱은 매우 낮았다. 누가 찾아와도 물리는 법이 없었다. 도리어 손수 집무실 냉장고 문을 열어 박카스 한 병을 손에 쥐어주고 들길 청했다. 그래서 지자(知者)들 사이에서는 스님을 ‘박카스 원장 스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늦가을, 주석처인 부산 감로사를 찾았을 때에도 스님은 신도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겸연쩍었지만 그 이야기 꽃밭에 함께 앉았다. 묻지 않아도 스님의 이야기는 법문이 돼 흘렀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가장 먼저 스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물었다. 출가의 인연이 궁금해서다. 스님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며 말문을 열었다.

“하루는 탁발 오신 스님이 나를 보고 출가를 하지 않으면 서른을 넘기기 어렵다고 하더라구요. 그 길로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통도사로 찾아가 출가를 시켜달라고 했는데 바로 시켜주지 않더라구요.”

출가를 결심하고 통도사에서 만난 스님이 당대 최고 율사였던 자운 스님이었다. 자운 스님은 어린 혜총에게 3천배를 할 것을 주문했다. 어린 혜총은 의아했다. 잘못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운 스님은 어린 혜총에게 “오늘의 공덕이 무궁한 복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만 말했다. 이 한 마디에 어린 혜총은 9시간 동안 밤새 부처님 앞에서 3000배를 했다.

“스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었어요. 복이 있을 것이라고 했으니까. 당시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니 알겠더군요. 모든 것은 ‘업 놀음’임을. 업이 있어 우리는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업을 없애는 것이만이 생사에서 벗어나 해탈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하루를 거르지 않고 참회하고 있습니다.”

▲ 불기 2504년 4월 16일 통도사 결제 기념사진. 사진 오른쪽 제일 아래 동자승이 혜총 스님이다.
출가부터 이어지는 3000배 원력
혜총 스님이 출가하며 세운 3000배의 원력은 지금도 주석처인 감로사에서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매년 2000여명의 재가불자들과 함께 ‘3000배 참회기도법회’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감로사를 ‘삼천불 삼천배 기도 도량’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감로사 3000배 참회기도법회는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부터 시작됐습니다. 부처님 출가일에 앞서 자운 스님을 비롯한 성철, 향곡, 석암, 월하, 지관, 일타, 월산, 청담, 운허, 영암, 벽암, 법전 스님 등 당대 최고 고승들이 이곳 감로사에 모여 국난극복 위해 참회법회를 봉행했죠. 모든 것이 우리 잘못이라는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이것을 자운 스님께 허락을 받고 80년대부터 제 출가 원력인 ‘3000배 참회’를 합쳐 참회 기도를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혜총 스님은 당대 최고 율사였던 자운 스님을 40년을 시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고될 만도 하지만 혜총 스님은 단박에 고개를 저으며 ‘인생난득(人生難得), 불법난득(佛法難得)’이라는 구절을 소개했다.

“‘인간의 목숨으로 세상에 나오기 어렵고, 불법을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이 ‘정법난득(正法難得)’, 정법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행복한 사람이죠. 자운 스님을 비롯해 성철, 향곡, 구하 스님 등 최고 선지식들을 두루 만나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요. 당시에는 모든 사미를 자신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성철 스님과 향곡 스님은 어린 저와 씨름 시합을 벌일 정도로 친근히 대해 주셨습니다. 시봉이라기보다 제가 은혜를 받았지요.”

자운 스님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란 만큼 스님을 시봉하는 데 어려움보다는 환희심이 컸다는 말이다. 자운 스님의 임종 순간을 지킨 것도 혜총 스님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운 스님의 마지막 당부에 혜총 스님은 재발심하게 됐다고 술회했다.

“평소에 자운 스님께 저에게 해외를 나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한국도 좋은데 굳이 해외까지 나가야 하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스님께서는 임종 전 ‘금생도 좋지만 내생도 좋다’고 했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깨달음이 왔습니다.”

혜총 스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알겠다’고 답하고 견문을 넓히며 수행애 매진했다. ‘아난다가 부처님 입멸 후 개족산 벼랑에서 정진하듯’ 공부했다고 스님은 당시를 회상했다. 이 같은 깨달음과 재발심이 ‘포교’라는 원력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부산 용호종합사회복지관에서 지난해 진행한 청소년자원봉사학교의 길거리 캠페인 모습. 이 복지센터는 혜총 스님이 대표 이사로 있는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산하 단체다.
쓰린 과거가 복지·포교 원력으로
사실 혜총 스님에게 붙는 수식어는 ‘포교’와 ‘복지’다. 1986년 사단법인 ‘동련’이 출범하면서 혜총 스님의 본격적인 포교 발걸음이 시작됐다. 이후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를 맡은 혜총 스님은 1994년 사단법인 불국토까지 이끌며 부산 지역의 새로운 포교지평을 열었다.

2004년 북한의 용천참사 사건이 발생하자 부산 참여불교운동본부를 통해 ‘통일신발’ 보내기에도 적극 나서며 북한동포 돕기에도 남다른 노력을 쏟아 부었다.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대학에 불교문화학과를 개설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혜총 스님이 정관 스님을 이사장으로 추대하며 시작한 사단법인 불국토는 부산지역 복지뿐만 아니라 한국불교 복지사를 새로 쓴 단체였다. 1994년 부산지역 불교 단체로는 처음으로 부산 진구청으로부터 개금사회복지관 위탁 운영권자로 선정됐고, 1995년에는 더 많은 포교, 복지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사회복지법인 불국토를 부산시로부터 승인받았다.

현재 불국토는 사단법인, 사회복지법인, 청소년법인으로 세분화됐으며, 혜총 스님이 대표 이사로 있는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산하에는 용호종합사회복지관, 양정재가노인복지센터, 수영구노인복지관, 용호어린이집 등 총16개의 시설이 있다. 

혜총 스님이 이 같은 복지와 포교에 원력을 세운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일화가 있다. 스님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당시를 술회했다.

“1980년대 초 뇌성마비복지회 이사를 지냈습니다. 당시 열심히 뇌성마비 복지시설들을 위문하러 다녔습니다. 설날 즈음 뇌성마비 장애우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먹던 것을 전부 게워냈습니다. 그날 저녁 혼자 앉아 ‘좋은 일을 한다고 우쭐대며 돌아다니지만 결국 너는 위선자다. 네가 장가를 가 저런 아이를 낳았다면 토했겠는가, 너는 아비도 못되고 당사자인 장애우도 될 수 없구나’라며 자책했습니다. 정말 중생들을 위한 포교와 복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그때부터 였습니다.”

1990년대 부산 지역 포교와 복지를 이끌어오며 부침은 한 번도 없었을까? 스님은 어려웠지만 스스로 가진 신심과 원력, 행원이 있어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세상 일이 어디 쉬운 게 있습니까? 모든 일에는 부침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만 부처님 법을 따르는 신심과 제가 세운 원력, 꾸준한 행원을 되새기며 살았습니다.”

스님이 말하는 신심과 원력, 행원은 혼탁한 세상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속인들이 귀담아 들을만 하다. 올바른 선지식과 도반을 만나 신심을 갖고, 부처님과 보살처럼 장대한 원력을  가진 후 이를 꾸준히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심과 원력으로 포교원장 활동
이 같은 ‘신심·원력·행원’은 포교원장 재직 당시에서도 그대로 발현됐다. 2006년 11월 제5대 조계종 포교원장으로 부임한 혜총 스님은 어린이ㆍ청소년포교 3개년 계획 수립해 기존 어리인청소년포교위원회를 상설 위원회로 전환하고 어린이 전법도량 선정을 추진하는 등 현재 어린이 청소년 포교의 기반을 닦았다. 또한 ▷신도 품계 도입 ▷종단 사상 첫 전법단 구성 ▷지역별 포교결집대회 등의 각종 포교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체육인 불자 육성 등 계층 포교 기반도 마련한 것도 큰 성과였다. 체육인 불자들의 신행을 독려하고 지도할 수 있는 매개가 없는 것이 항상 아쉬웠던 스님은 2007년 8월 창립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뒤 발기인총회를 거쳐 10월 체육인불자회를 탄생시켰다. 2008년에는 선수촌에 법당도 개원했으며,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는 현장을 직접 방문해 불자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포교 환경 발전의 토대를 만든 스님은 2011년 11월 여법하게 임기를 마무리했다.

이 같이 포교와 복지에 평생에 원력 받친 스님에게 이 두 가지 원력은 곧 수행과 같았다. 그래서 스님은 수행과 포교는 둘이 아니라고 항상 강조한다. 

“불교를 깊이깊이 들여다보면 수행과 포교, 두 가지 뿐입니다. 이는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포교원장 재직 당시 슬로건을 ‘포교가 수행, 수행이 곧 포교’라고 정한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포교는 중생들이 부처님의 진리를 알게 하고 이를 실천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전도 선언에서 ‘모든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수행과 포교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 제자가 수행하고 포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 포교원장 재직시절인 2009년 당시 개최한 포교원장배 축구대회에서 혜총 스님이 시축하고 있다.
저는 아직도 꿈꾸고 있습니다
혜총 스님은 지금도 한국불교 포교 발전 방안을 구상 중이다. 스님이 계획하는 발전 계획은 총 세 가지다. 먼저 포교를 위해서는 눈 밝은 선지식을 배출하기 위한 출가 장려 운동이 필요하다고 스님은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재가자들이 자녀를 많이 낳아 출가를 시켜야 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출가자 감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를 여법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준 높은 스님들을 길러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재가불자들에게 아이를 셋 이상 낳아 한 명을 출가 시키는 방안을 권합니다. 종단도 승가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등 각급 승가학교를 만들어 동진 출가를 장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의 불교 인재들을 길러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스님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포교와 전국 각지 포교회관 건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재가자들이 먹고 쓸 수 있는 것을 생산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제가 대표이사로 있는 ‘사회복지법인 불국토’만 직원이 1000명이 넘습니다. 이들의 생활을 불교가 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화될 수 있는 사업을 찾아 지역사회와 경제에 회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포교회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쁜 현대인들은 한 곳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곳에 불교 백화점, 영화관, 사찰음식점, 대규모 법당 등을 조성해 지역불자들이 먹고 즐기고 신행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수행과 포교는 세상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세운 3대 지표를 실현시킬 수 있다면 총무원장도 해보고 싶습니다. 현생에서 안된다면 내생에 다시 스님으로 태어나 포교할 것입니다.”

감로사를 나서는 길, 마지막으로 스님에게 가는 해를 맞는 불자들에게 덕담 한 마디를 청했다. 스님은 ‘무상함을 알라’고 즉답했다.

“가는 해는 늘 가고, 오는 해는 늘 오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는 이 표피만 보고 있어요. 모든 것은 변합니다. 몸도 이 해가 갈수록 늙고 병들지 않습니까? 이 이치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무상함을 알라면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우리에게 ‘새벽같이 깨어있으라’고 설했습니다. 이를 알면 두 번 화살을 맞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알고 깨어있으십시오.”

감로사를 나오니 저녁해가 남해 바다로 넘어가고 있다. 촘촘히 밝혀진 가로등 불빛은 애처롭다. 다시 한번 혜총 스님의 법문이 곱씹어졌다. “항상 새벽처럼 깨어 있으십시오.” 

혜총 스님은 … 1943년 경남 충무에서 태어나 1953년 통도사에 입산. 보경 스님을 은사로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계. 해인사와 범어사 승가대학 졸업.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수료. 1964년 지효 스님에게서 건당(建幢). 당대 율사 자운 스님을 40여년 모셨다. 2011년 11월까지 제5대 조계종 포교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부산 감로사 주지,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대표이사 등의 소임을 맡고 있다. 저서로 〈꽃도 너를 사랑하느냐〉, 〈새벽처럼 깨어 있으라〉, 〈공양하는 마음〉 등이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