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짝 떼놓을 수 없는 창살없는 감옥에서 벗어나야 [916호 11월 28일]

▲ 그림 최주현

집이 부족해서 쌀쌀하고 추운 날도 이렇게 여러분들을 바깥에 서 계시게 해서 죄송한 마음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한자리를 하게 됐고 이렇게 더불어 같이 한 찰나에 한자리를 하고 한 찰나에 떨어지고 한 찰나에 한마음이 되고, 이렇게 묘한 법을 우리가 한자리에 도반으로서 같이 공부하게 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으로 태어나서 우리가 이 도리를 모르고 간다면 세세생생에 이 자리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를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면은 걸어온 발자취가 없듯이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가는 것이 듣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또 보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말하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먹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만나는 것도 혼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같이 더불어 돌아가는 이치죠. 그렇기 때문에 상ㆍ하, 즉 사방이 총 합해서 우리가 평등공법(平等空法)이라고 하는데, 우리 그 모두를 합해서 공했다, 색(色)이다, 공(空)이다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말하듯이 하나도 혼자 하는 게 없고 혼자 걸어온 게 없어요.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걸어왔지만, 내가 걸어왔다고 하지만 내가 걸어왔다고 내세울 게 없어요.

내가 항상 말씀드리죠? 몸속에 내 자생중생들이 많은 것이 다 나이기 때문에 내가 혼자 걸어온 게 없노라 하는 겁니다. 혼자 보는 것도 없고 혼자 듣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그러니 내세울 게 어디 하나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외부의 모든 생활 자체가 혼자 사는 게 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이 세상 만사가 다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그 자체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원칙은 영원한 것을 우리 자체가 모르기 때문에 즉, 50% 반쪽만 알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다 산다’ 여기에도 무척 걸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걸릴 게 하나도 없는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일체 만물만생이, 즉 말하자면 가다가 만나고 가다가 보고 가다가 듣고 할 때마다, 이런 게 있죠. 밥을 지을 텐데 소켓트가, 이건 비유하는 겁니다. 소켓트가 맞지 않으면, 거기다 끼워도 맞지 않으면 불이 들어오질 못해서 밥을 못 지어 먹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모든 내 자생중생들을 다스리면서 화(化)하게 만들어야 바로 그게 화한 부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항상 소켓트가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신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과 직결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즉 말하자면은 주장자라고 하죠. 그런데 그걸 안테나라고 해도 됩니다. 내 마음의 안테나를 세워 놔야 일체제불의 마음이 내 마음을 통해서 불이 들어올 수가 있고, 즉 말하자면은 만약에 소켓트가 맞지 않는다면 불이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밥을 지어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꼭 내면의 나부터 알아야 한다.’ 하는 것은 뭐냐? 내 자생중생들을 남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과거로부터 자기가 악업 선업을 지은 자체, 근본의 표시입니다. 내 몸뚱이 속에 지금 악업 선업이, 과거의 악업 선업이 다 들어 있고 또 지금 살 때에 짓는 것은 미래의 선업 악업이, 미래에 올 것이 입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거는 지금 나오고 미래에 현실에 올 것은 자꾸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입력된 게 연방 나오면서 연방 미래로 또 입력이 됩니다. 그러면 과거에서 오는 그 자체의 업식이 어디서 일어나느냐. 내 마음속의 그 악업 선업의 중생들의 의식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게 인연을 지은 거니까. 그래서 나오는 대로 거기다 놓으면 즉, 미래의 그 업을 지을 것도 없어지고 과거의 업 지은 것도 없어지는 까닭에 거기다, 모든 것은 한 구녁에서 나오는 거 한 구녁에다가 놓아라 이런 소립니다.

내가 이런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은, 여러분이 큰 나무가 있으면 딱따구리가 그냥 덮어놓고 쪼죠. 쪼아서 나무가 뚫어지죠. 그렇듯이 여러분은 덮어놓고 무조건 내 큰 나무라고 해도 됩니다. 내 나무에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딱따구리가 쪼듯 그렇게 자문자답하면서 생활하면서 해나가야 그대로 생활이 참선이며 생활선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편안해지면 바로 좌선입니다. 이 모두가 이렇게 참선을 할 때에 생활이 없는데 부처가 어딨겠습니까? 우리들이 없는데 또 부처가 어딨겠습니까? 우리들이 있으니까 부처가 있고 부처가 있으니까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걸 주장자라고도 하고
안테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안테나를 세워놔야
일체제불의 마음이 내 마음을 통해서
불이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그 마음의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현실로 나오는 거니까 그 나오는 데다가 직접, 딴 데 바깥에다가 허우적거리지 말고 안에다가, 모든 것은 거기다가 놓고 맡기고 ‘너만이 이끌 수 있다, 너만이 아픈 거를 낫게 할 수 있다, 너만이 화목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깨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다.’ 육신과 정신과 둘입니까? 둘이 아닌 까닭에 너와 나와는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그 믿음! ‘해주시오’가 아닙니다. ‘할 수 있다’지.

그렇게 놓고 갈 때 비로소 그 통은 딱따구리가 쪼아서 뚫어지듯, 뚫어서 그 나무의 속이 탕 비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 속에 들어가서 집을 삼아서 차고 앉는다 이겁니다. 거기 앉았으면은 알을 까서 또 생산시키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죠. 그럼으로써 우리가 깨달으면 알을 깔 수 있고, 생산을 해낼 수가 있고 깨닫지 못하면 생산을 못합니다.

그래서 이 깨달은 마음은 마음과 마음이 위에서부터 직결이 돼 있고, 아래서부터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항상 마음과 마음이 한데 찰나에 합쳤다가 찰나에 떨어지고 찰나에 합쳤다 찰나에 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과 마음이 항상 둘이 아님을 뜻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법좌(法座)를 낼 수가 있고 생산을 해낼 수가 있는 까닭에 바로 진짜 부처님이 되시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할 때는 이 과거의 나와 현실의 나가 둘이 아니게 상봉이 돼야만이 되지 과거의 나가, 즉 전의 조사(祖師)들은 부(父)라고 그랬습니다. 과거의 나가 바로 나의 조상이니까 ‘부’고, 현실의 나가 ‘자(子)’가 됩니다. 그래서 부와 자가 둘이 아니게 상봉할 때, 깨달을 때에 비로소 그 둘이 아닌 도리의 섭리를 알 수 있느니라.

그래서 그렇게 상봉함으로써 마음과 마음이 전체 주장자와 주장자가 둘이 아니게끔 찰나찰나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면 말로 이론으로 법이 떨어지니까 될 수가 없고 법설이 될 수가 없고 한데 떨어지는 거죠. 그 음파가 한데 떨어지니까, 통신이 될 수가 없으니까, 성자가 날 수가 없죠. 그걸 성자가 날 수 있게끔 하는 건 생산해 내는 생산처가 돼야 된다는 얘깁니다. 내 마음, 마음 자체가 생산처가 되어서 바로 생산을 해낼 수 있는 그런 법좌가 돼야 된다 이런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러하듯이 길을 가다가도, 예를 들어서 소 한 마리가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소가 여러 마리가 끌려간다 이럴 때 ‘내가 그 당시에 봤다.’ 이럴 때, 한순간에 한 찰나에 볼 때 한 찰나에 이 자생중생들과 더불어 한마음이 된 주장자 자체는 바로 안테나가 돼서 일체제불의 마음이 찰나에 듭니다. 그래서 한마음이 되어서 불이 들어오게 되니 그 소들은 무명을 벗고 인도환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도리를 모르고 만약에 옷을 벗는다면 한 치도 발을 떼 놓을 수가 없다 이 소립니다.

엊그저께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어항 속에서 한 발짝도 떼 놓을 수 없는 그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기주머니에 있는 것이 어항 속에서 고기가 살듯 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그 어항 속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며, 내 자생중생들 그 자체 악업 선업에서, 그 업 굴레에서 벗어나야 될 것이다. 첫째는 내 업 속에서 벗어나야 그 어항, 업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벗어나야 구경경지(究景境地)에 이르게 되어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인! 즉, 자유인이란 부처를 뜻하는데 여래(如來)라고도 할 수 있죠. 여래라는 뜻은 우리가 한데 합쳐서 전체 돌아가면서 나투고 화(化)해서 돌아가는 그 평등공법(平等空法)이 즉 여래의 집이라고 합니다, 여래의 부처라고도 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생활선(生活禪)이자 여래선(如來禪)으로서 지금 공부하는 것입니다, 여래선!

전체 우리가 하나하나가 이렇게 가다가 보면은 꽃이 예쁘게 피었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찰나에 꽃과 나와 둘이 아니게 그 소켓트가 맞기 때문에 딱 맞아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꽃은 화(化)합니다. 꽃이 화해서 내가 됨으로써 바로 나는 수많은 거를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여기서 수없이 꺼내도 줄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렇게 알아야만이 되겠다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선도리(禪道理)에서는 여자 남자가 따로 없고, 길고 짧은 게 따로 없고, 더럽고 깨끗한 게 따로 없고, 부자고 가난하고가 따로 없고, 또 부처 중생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부처님을, 엊그저께도 그렇게 묻는 분이 있었는데 부처를 어떻게…, 개라면 뭐, 뭐라면 집어 죽여서 먹겠다고 했다고 그렇게 질문을 했는데, 우리가 알고 보면 모두가 내 마음속에 한마음으로 돌아가니 내면의 자생중생들과 외부의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으로 항상 통해서 돌기 때문에, 항상 둘이 아닌 까닭에 부처도 집어먹고 중생도 집어먹고, 하다못해 풀 한 포기도 집어먹고 저 곤충에 이르기까지 집어먹고 다 집어먹고 갖춘 그런 것이 장엄(莊嚴)이라고 합니다. 장엄을 갖춘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모든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그냥 넘어갈 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또 우연히도 없습니다, 절대적이지.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서 물건 값을 주고 물건을 사 왔다면 돈을 준 사이도 없고 물건을 준 사이도 없이 우리는 여여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모두가 다 우리 생활 속에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니깐요. 그래서 여러분은 아프다든가 괴롭다든가 애고(哀苦)가 닥친다든가, 항상 이런 얘기를 자꾸 합니다마는 유전성이라든가 영계성, 업보성 또는 세균성, 이 모두가 바로 내 마음의 한생각에서 그것을 다 녹일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그거를 녹이지 못한다면은 항상 그것이 뭐 에누리없이 나오는 것이니까 나오는 데다가 되놓는다면 카세트에 넣은 모든 것이 다 없어짐으로써 다시 녹음을 해넣는 관계상 그 업보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상ㆍ하, 사방 모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그 세상이 또는 삼세(三世), 삼심(三心)이 일심(一心)이 돼서 우리가 일심도 공(空)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너무나 좋은 공부입니다. 이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조건과 권리를 가졌죠. 그런데 여러분이 딱 막혀서 나라고만 생각을 하니까, 내가 했다고 생각이 되고 내가 속상해서 죽겠다고 하고 이거는 내가 이렇게 했는데 저놈이 왜 저런가 하고 그렇게 원망을 하게 되고 증오를 하게 되고 이렇게 하니까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죠. 증오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죠.

알고 보면 저 나무 뿌리에 의해서 나무가 살고 있는데 그 옆의 나무가 스쳤다고 해서 가지가 부러지는 게 아니거든요. 가지 부러진 거는 내가 이 세상에 난 탓이지 어째서 옆의 나무의 잘못입니까? 옆의 나무의 잘못을 생각한다면 원망이 돌아가고 증오가 돌아가고 이럼으로써 항상 악업에 말리게 됩니다. 선업 짓는 것은 몇 알캥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모두 악업에 속하죠.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악업을 짓지 말라고 하되 선업도 짓지 말라 이랬습니다. 그건 왜냐하면은 선업을 짓게 되면 악업이 또 좇고 악업을 짓게 되면 선업이 좇으니 이거는 평생에, 아니 세세생생에 벗어날 수가 없느니라. 그러니 악업도 놓고 선업도 놓아라. 가는 거 잡지도 말고 오는 거 마다하지도 말라. 이 모두가 우리가 선업을 잘했다고 그래서 내가 공덕이 많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선행을 잘했다고 해서 내가 잘했다고 아무리 꼬나들고 내세워 봤자 절대로 그거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행입니다. 그거는 공덕이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바로 한 나무가, 전체가 살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뿌리로 인해서 살고 돌아간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무는 누구를 원망하기 이전에 모두가, 나는 뿌리로 인해서 살고 있으니까 ‘뿌리에서만이 내 지금 몸뚱이, 가지, 잎새 모두를 살리고 있구나!’ 하고 살아야만이 마음이 안정되고 내 방석을 내 방석대로 그대로 안정하게 찾고 바로 누구의 원망도 없이 아주 그 선법(禪法)을 그대로 잘해 나가시는 겁니다.

우리 자체가 나무라면은 나무의 잎새와 가지와 나무가 공기와 태양빛을 흡수하면서 뿌리에서는 수분과 에너지를 흡수해서 올리면서 또는 위에서는 그런 거를 흡수해서 또 아래로 내려보내면서, 정맥 동맥이 오르고 내리고 하듯이 그렇게 여러분이 나무와 같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다 텔레비전을 보시고 잘 아시겠지만 일체 만물만생이 우리들 살림살이와 우리들 생명과 우리들 그 작용하는 작용법과뭣이 다릅니까? 차원이 낮고 높고 그것뿐이죠.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업신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가 있다고 세울 수가 있습니까? 모두 과거의 수억겁 광년 전부터 우리는 미생물에서부터 화(化)해서 진화되고 진화돼서 이렇게 나투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은 안 돼 봤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업신여기기 이전에, 벌레 하나를 봤을 때도 업신여기기 이전에 내 몸속을 한번 들여다보시길 바랍니다. 내 몸속을 볼 때 천차만별의 모습과 천차만별의 의식과, 그 생명들이 오죽이나 많습니까? 그 많은 자체가 바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수억겁 광년 전서부터 이렇게 모습을 해 가지고 진화됐기 때문에 그놈들을, 그 자생중생 놈들을 안고 우리는 집합소가 돼서 집이 돼 주고 있다. 심부름꾼이 돼 주고 있다. 역시 관리인이 돼 주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다못해 밥 한 그릇을 먹는다 하더라도 혼자 먹는 게 아니구나. 바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의식을 다스리면서 밥 한 그릇을 먹되 너희는 전부 공(空)해서 한마음이니까 바로 둘이 아니다. 너는 내 마음에 의해서 모두가 작용하고 돌아가는 바로 나인 것이다. 이럴 때 바로 그 속에서 의식들도 ‘나를 내가 죽일 수는 없어.’ 하는 생각이, 의식이 듭니다. 그거는 의식들이기 때문에 이 촉각으로 인해서 더 잘 압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보다도 더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이 두뇌는 둔하지만 그 자생중생들이 한마음이 돼 주면은 아주 촉각의 두뇌가 아주 성숙해집니다, 물리가 터지고. 그래서 우주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만사는 모두가 가설이 돼 있다. 가설이 돼 있어서 우리 이 마음에 그렇게 통하면 직결이 된다.

자생중생들이, 즉 말하자면은 유마힐거사가 문수보살이 병문안을 왔을 때 중생들의 병이 다 나아야 내 병이 낫노라고 말을 했을 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자생중생들을 다스리면서, 내 자생중생들이 병이 났으니까 내가 병이 나는 거지, 자생중생들이 건강한데 내가 왜 병이 납니까? 자생중생들이 다 병이 나아야 내 몸이 낫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마음이 아니라 모두가 한마음인 줄 알고 다스려야 합니다. 제각기 나는 나 너는 너, 이렇게 된다면 그게 아수라장이지 다른 게 아수라장이 아닙니다. 그러니 바깥으로도 아수라장을 만드는 거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세포 하나하나의 생명들의 의식이 바로 지금 지구의 레이다망 역할을 합니다. 이것도 우주의 법계입니다, 이 세포 하나하나가. 우주의 법계처럼 이 레이더망처럼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 나가는 것을 관리하고 대기권에서 모든 것을 작용합니다. 그리고 안으로 통신할 건 통신하고 이렇게 작용을 합니다. 그럼 안에서 통신을 받아서 또 작용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 대기권에서 의식들이 나가서 마음을 조절하는가 하면 모든 것을 완화시킬 수도 있고 모든 거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한마음이 그렇게도 중요합니다. 내 한마음이 안으로 그 뭇 중생들을 다스리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이거는 생활 속에서 그대로 생활을 하면서 내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하려고 쫓아가려고 애쓰지 말고 버리려고 애쓰지도 말고, 그대로 생활 속에서 오는 것대로 마다하지 말고 그거를 공부하는 데 생활을 재료로 삼는다면 아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하는 말 되하고 하는 말 되하고 하는 거같이 들을지 모르지만 너무도,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얘기가 너무도 많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그릇이 요만한 데다가 들이부으면 그게 담겨 있습니까? 또 요만한 도라무통에다가 우주 같은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을 한데 쓸어붓는다고 해서 그게 담겨지겠습니까? 다 흘러 버리지. 여러분이 차원이 높을수록 아마 그릇은 크고 담기는 거는 여여하게 많을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자리에서 생기는 그 그릇이 크고 작은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깨쳐서 부처님이 됐다 할지라도 한 그릇의 부처님이지 두 그릇의 부처님이 아닙니다. 물론 한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그랬지 부처님이 있다고 했다면 부처님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부처님이 개개인으로 돼 있다면 여래(如來)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들이 제각기 모두 돌아간다면 여래선(如來禪)이라는 말을 안 했을 겁니다. 우리가 개개인이, 외부의 모든 것이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사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면도 내 개개인으로 사는 게 하나도 없구요.

그래서 부처님들은 “아이구!” 예전에 선지식의 제자들께서 “나는 아주 시끄럽고 공부를 못하겠으니까 산으로 토굴을 묻고 올라가야겠습니다.” 고 하니까 “너 그러면 땅도 딛지 말고 옷도 입지 말고 먹지도 말고…, 하하하, 남의 꽃을 보고 좋아하지도 말고 아예 물도 마시지 말고, 그렇게 해라. 아이, 토굴을 짓더라도 남의 나무를 꺾어다가 지어야 하니까 그것도 남의 거를 왜 갖다가 짓고서 공부를 하려고 그러느냐?” 그런 말씀에 홀연히 깨쳐서 토굴을 묻고 산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3년 11월 21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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