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마음으로 주인공에 모든 것 놓아야

▲ 그림 최주현

믿음이 중요한데…
문)
마음공부를 하는 데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공부한다 하면서도 막상 어떤 큰일에 부닥칠 때는 내가 할 수 있을지 겁부터 먹게 됩니다. 정말 믿는다면 그러지 않겠지요?

답) 여러분이 좀더 이 공부를 하게 되면은 깨닫고 안 깨닫고 그걸 떠나서 자기를 자기가 진실로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옛날에 약초를 캐는 어느 착한 나무꾼이 하나 있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약초를 캐면서도 항상 그 어머니를 잊지 못한 채, 나오면 며칠이 걸리니까, 한 달도 걸리고 그러니까 그 어머니를 위해서 항상 마음의 기도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약초를 캐다가 고만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져서 아주 몹시 다쳤습니다. 산골에서 다쳐 가지고 내려올 수도 없고 그러니깐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어느 대선사가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 하는 소리가 “너 낳기 이전 너의 아비는 지금 네가 다친 꼴을 보고 울고 있구나. 아비는 울고 있고 아들은 아파하는구나.”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하고 울다가 말고 그렇게 여쭈니 “바로 네가 생기기 이전 너는 지금 울고 있는 그 마음이니라. 네 몸이 아파하면 네 마음이 의욕이 없어지는 것도 네 아비가 자식을 위해서 의욕이 없어지느니라. 네가 의욕을 잃지 않는다면 그 아비도 의욕을 잃지 않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아비는 더하고 덜함이 없기 때문에 너 하는 대로 따라가기 때문이니라.” 이렇게 말을 해 줬습니다. 그러고는 간 곳이 없어졌으니, 그러자마자 다리가 일어나도 안 아프더랍니다.

그래서 나무를 하러 다니든 약초를 캐든, 어떠한 짐승이 있든, 불쌍한 걸 보든 항상 이 창문을 통해서, 이 두 눈을 가지고 말하는 겁니다. ‘창문을 통해서 아버지가 똑똑히 보시고 이것 좀 살려 주셔야 되겠습니다.’ 했습니다. 창문을 통해서 본다고 했습니다. 이 눈은 창문에 지나질 않아요. 눈이 아니에요. 창문에 지나지 않고 그 창문 속에는 진짜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비의 눈이라고 했어요. 그 아들은 자기의 눈이 눈이 아니고 창틀이고, 그 창틀 속에는 바로 아비의 눈이 시퍼렇게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항상 그러던 중 어느 날 부랴사랴 이 약초를 또 캐러 가다 보니까 덫에, 이렇게 깊이 흙을 파고선 그 덫을 놓지 않습니까? 고만 그 풀을 딛고 가다가 고만 산돼지가 그 덫에 걸렸단 말입니다. 그래 빠졌겠죠? 빠졌는데 이 나무꾼이 가다 하는 소리가 그걸 보고 “아버지!” 하고, 대답이 있겠습니까? “아버지!” 그러니까 “왜 그러느냐?” 자기가 그런 겁니다. “저 돼지가 덫에 걸려서 저렇게…. 저 생명도 생명이거늘 어찌 그냥 보고 가겠습니까, 보지 못했다면 모르지마는.” 하니까 “그럼 네 맘대로 살려 주려무나.” 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이렇게 자기가 또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고선 그 떨어진 나뭇가지 아주 기다란 걸 가지고 가서 거기다가 이렇게 넣어 놨습니다. 그러니까 돼지는 거기에서 그만 그걸 밟고 나왔습니다.
예전의 산돼지는 사람도 잡아먹고 그랬답니다. 그러나 산돼지더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비가 너를 살려줬거늘 앞으로 네 모습을 벗고 사람이 되려면은 사람을 해치지 말라.” 그랬습니다. 돼지가 고개를 끄덕끄덕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그 돼지는 산에서 으뜸가는 맹수가 됐습니다. 그 사자라는 맹수가 됐는데도 글쎄, 돼지는 그때의 그 나무꾼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몸, 모습을 바꿔서 맹수가 됐는데도 그게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무진 노력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기 몸까지 그 나무꾼에게 바쳤다는 얘깁니다. 그건 뭐냐. 그 나무꾼의 못 잊은 그 마음과 이 맹수의 마음은 항시 둘이 아니어서 고만 이 모습도 벗으니까 아주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대인이 됐다는 얘깁니다. 대인이 돼서 참 어진 정승으로서 많은 중생들을 제도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이 얘기를 했냐 하면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이 몸이 아프거나 또는 어딜 다치거나, 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이런다면 아예, 참 살 의욕이 없어지는 듯합니다. 여러분을 볼 때 참 내 가슴이 아플 때도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만 고치는 게 부처님 법인가?” 이러지마는 그게 아닙니다. 보석이나 뭐나 다 가지고 있어도 자기가 죽게 된다면 아무 의욕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 얼마나 묘합니까? 그러니 자기 몸을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는 겁니까? 야, 몸뚱이가 좀 아프다고 해서 그 마음은 얼마나 의욕이 없어지고 참 그냥 슬프고 눈물이 나고 이러거든요. 아이, 생각 한번 해 보세요, 얼마나 자기를 자기가 사랑하나.

그런데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자기가 아프면은 서로 같이 아파 주고 울면 같이 울어 주고 의욕이 없어하면 같이 의욕이 없어하는데도 불구해 놓고 자기를 자기가 업신여기고 못 믿어서 저 먼 데 부처님이 계시다 하면은 그냥 ‘부처님, 날 좀 도와주시오. 이 몸 아픈 것 좀 낫게 해 주시오’ 하고 빌곤 합니다. ‘우리 남편 낫게 해 주십시오. 우리 남편 잘되게 해 주시오. 자식 잘되게 해 주시오. 나 몸 좀 안 아프게 해 주시오.’ 하고선 빌고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얼마나 멉니까, 그게?

바로 사랑하는 나에게 내 자부처가, 자신(自神)이 계신데도 불구해 놓고, 일체 신이, 바로 한마음에 계신 거를 알면서도 그것을 못 믿고 그렇게 빙빙빙빙 돌아간다면 앞으로 어떻게 내 몸과 내 국가, 가정 이런 거를, 내 자식을 어떻게 길러 나가면서 어떻게 그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것입니까? 네? 지금 현재뿐만 아닙니다. 세세생생에 끝간 데 없이 말입니다. 우리 끝간 데 없이 수억겁 광년이라 할지라도 일 초에 달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마음의 도리를 의심치 말고 믿으십시오. 자기의 자신의 주인공을 믿으시면서 거기다가 일체를 다, 들이고 내는 건 다 거기서 하는 겁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닫을 때 저 빗장을 쥐지 않는다면 열고 닫을 수 없습니다. 뭐 길게 말한다고 해서 공불 잘하고, 또 짧게 말한다고 해서 공불 못하는 게 아니니 심사숙고하셔서 앞으로 조그만 것, 가정에서나 또는 회사에서도 그렇고 실험을 통해서, 가고 오면서도 그걸 한번 침착하게 생각해 보실 그런 여건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답답해서 부적을 받아오긴 했는데

문) 요즘 하도 되는 일도 없고 너무너무 답답해서 얼마 전에 점을 보러 갔다가 부적을 몇 개 받아 왔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받아오긴 했는데 스님 말씀이 생각나서 불살라 버렸습니다. 공부한다 하면서도 너무 힘들 때는 자꾸 마음이 약해지면서 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정신 차릴 수 있게 따끔하게 일침을 좀 가해 주십시오.

답) 우리가 수없는 억겁을 거듭거듭 거쳐 나오면서, 내 몸의 모습을 바꿔 가면서 얼마나 아팠던가. 얼마나 쓰렸던가. 얼마나 고에 휘달렸던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그 습을 놓지 못하고, 그 노비 문서를 놓지 못하고, 그 종문서를 쥐고 다니는 이러한 여러분의 그 답답함을 나는 도대체 알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나처럼 눈 달리고 코 달리고 예전 부처님들도, 역대 조사들도 다 눈 달리고 코 달렸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 절 저 절 다니면서 이 부처 저 부처, 용왕이 날 돌봐 준다 해서 방생한다고 고기 잡으러 가 가지고들 다니는 거. 밥 내려 가지고 물에 넣는 거. 이게 뭡니까? 도대체 이게 떳떳하고 광대무변한 한 인간으로서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 항상 노예로서 거지, 또는 귀신, 이런 짓들만 하고 다니니 이게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똑똑한 사람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똑똑한 사람을 기를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내 앞에 좋은 물건이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그 물건을 쓸 줄 모르면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을 다 주고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보배가 앞에 있다 하더라도 쓸 줄 모르면 그건 허탕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그 보배를 가지고도 당신네들이 쓰지 못하는 관계상, 그 보물이 쓸모없이 됐단 말입니다, 모두.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쯤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또 살아가면서도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이렇게 묘한 법이 나와서 내가 움죽거리고 있는지
그거를 모른다면
내 몸 하나 이끌어가기도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사는 게 모두 힘이 있으면 빨아당겨서 자기 거를 만들고 힘이 없으면 거기에 들어가서 종노릇을 하는 것이 보통이거든요. 우주의 섭류도 역시, 힘이 있으면 탁 쳐선 그냥 버리거나 쫙 빨아들여서 자기 걸 만들거나, 이런 문제들이 숱하게 많으니까요. 지금 이 지구 안에서 살아나가는 여러분도 다 같이 살아가면서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데도 마음들을 그렇게 쓰니 어찌 뺏기지 않고 살겠습니까. 무당한테 마음을 뺏기고 살지 않나, 부적한테 뺏기고 살질 않나, 장승한테 뺏기고 살질 않나. 남이 용왕이 있다니까 용왕한테 뺏기고 살질 않나. 이름에게, 전부 이름을 해 놓고는 그 이름한테 전부 뺏기고 살아요.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내 정신 내가 가지고 사는 거지, 왜 자꾸 정신들을 뺏기고 사십니까.

어떤 사람이 이랬대요. 부적을 해다가 베개에다 넣고, 일곱 장을 사야 그 달에 뭐 괜찮다고 그래 가지고선 그걸 다 사다가 여기도 놓고 저기도 놓고 그랬답니다. 그러다가 선원엘 오게 됐답니다. 그랬는데 며칠 다니면서 설법도 듣고 그러다 보니까 어느 날 밤 꿈에 스님이 오셨답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러니까 “너희들이 여기 저기 감춰 놓은 거 좀 내놔 봐라.” 그러더랍니다. “감춰 놓은 게 없습니다.” 하니까 “이것도 없어? 여기에 매달려서 너희가 잘되려고 하느냐?” 하면서 그 베개에 있는 거, 뭐 있는 거 다 내놓으라 그래서 다 몰아서 놓는데 벌써 그냥 확 불이 붙어 가지곤 그냥 흔적도 없더랍니다. “그런 꿈을 꿨습니다. 이게 무슨 꿈입니까? 이거 해로울 꿈 아닙니까?” “아휴, 저러니 할 수 없지. 마음 쓰는 게 저렇게 가난하니 어찌 살기가 가난치 않을까.” 이런 말을 했지요. 그러면서 처음에는 그렇게 말을 해 놓고선 또 ‘에이, 저 모습이 내 모습이요, 저것이 바로 나인데.’ 하고선 잘 다독거려서 “그게 아니라 그릇이 다 타버렸으니 얼마나 좋아. 모든 것을 주인에게 맡기고 살면 편안치 않아?” 이렇게 처음부터 달래 가지고 나가야지 별수 없거든요, 그놈의 거, 그 습을 다 떼어 버리려면.

모든 게 여러분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이게 마음이 얼마나 기묘하고 광대무변한지 여러분이 체험을 안 해 보셔서 그렇지 체험을 해 보세요. 여직껏 나를 끌고 다니는 거, 오늘도 부지런히 육신을 놀려서 밥해 먹이고, 빨래하게 하고, 똥 눌 사람은 똥 누게 하고, 걸음을 걷게 하는 그 장본인이 누굽니까. 바로 여러분의 성품에 의해서. 따라서 환경을 자기가 조성해 나가고 화합을 시키고 조화를 이루고 이렇게 살아나가는 것도 여러분이지, 딴 데서 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고, 이거는 영 안되니, 이놈의 걸 노릇을 어떡하나 하고 안된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안되는 거고, 된다고 생각을 하니까 되는 거고. 내가 새 달에 무당이 나쁘게 된다니까는 그냥 나쁜 줄 알고 쩔쩔 매는데, 내 주인, 이 주장자의 주인이 없으니깐 그런 소리를 듣고 말리는 겁니다. 오히려 귀신한테 말리는 거죠. 내가 귀신이 되는 거예요.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이사 갈 때 되면 가고,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떡 해 먹고 싶으면 떡 해 먹고 이러는 거지 아이, 누구에 의해서 해요? 지금 안 그래도 살기가 고달픈데 아니, 여기에 끄달리고 저기에 끄달리고, 어떻게 편안하게 살 때를 바랍니까.

일심에서 일체 만법이 나고, 일체 만법이 일심으로 드는 것인데 이걸 무시하고서 방황하니까 모든 문제가 틀어지는 겁니다. ‘응, 네가 그렇게 나를 믿지 않고 그렇게 돌아치니까 너 좀 돌아봐라.’ 그러지들 뭐, 어떻게 하겠어요. 여직껏 자기가 자기를 끌고 나오는 자기 주인의 그 공도 모르니 어떡합니까, 그거? 이제부터는 그러지 말고 철저하게 자기의 주장자, 자기의 주인공, 그 자체를 철저하게 믿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물러서지 않도록 하세요.

자식만큼은 뜻대로 안됩니다
문)
제가 욕심이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자식만큼은 참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니 괴롭습니다. 어떻게 아이를 이끌어가야 할지 난감합니다.

답) 여러분이 공부하면서 가정에서 어떠한 불화가 일어나도, 어떠한 속이 상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가정이 화목해야 됩니다. 어느 분이 이런 분이 있었습니다. 재밌게 애들 낳고 잘 살았는데 여잘 얻어 가지고는 나가서 영 돌아본 첼 안 합니다. 그래서 돈도 다 까불리지 아주 그냥 매기단을 칩니다. 그래서 “얘야, 주인공에 맡겨 버리고 가만 둬라. 저 하고 싶은 대로 이 줄을 늦춰 줘라, 늦춰 줘. 가는 대로 늦춰 줘라. 이 마음과 마음의 줄은 남편이라는 거하고 아내라는 거하고 줄이 있다. 이 줄을 그냥 늦춰 줘라. 그러고 자비로서 그냥 놔둬라. 주인공에 맡기고 놔둬, 그냥.” 그랬더니 한참 가다가, 이 줄은 쥐고 있으니까, 근본에 같이 가설이 돼 있으니까, 돌아다니다 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싫증이 났어요, 고만. 고생만 되고. 이게 그냥 버린 것도 아깝고 싫증이 나 버리니까 슬슬 그 줄이 인제 그냥 늦춰진단 말입니다, 돌아오느라고.

그러니깐 돌아오는 대로 줄이 느슨하게 되니깐 그냥 고것만 느슨한 대로만 잡아당기는 거죠. 아, 그러니깐 집으로 쏙 들어왔는데 바짝 쥐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너무도 사랑하거든요. 가서 경험을 하고 보니까 “야, 이렇더라. 세상에, 손이 들이굽지 내굽지 않더라. 세상에 다니면서 봐도 너 같은 아내가 없고, 너같이 예쁜 아내가 없고, 마음씨 그렇게 착한 아내가 없더라.” 이러고서는 그냥 전자에 없던 애정도 솟아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남자든 여자든 우리가 지혜로운 마음으로 이 주인공 줄에다가 모든 것을 놓게 되면 아무리 나쁜 사람도 참 착해지게 돼요. 그러고 사랑을 받게 되고요. 아무리 아들이 나쁘고 도둑질을 하고 그래도 전자의 인연줄로 인해서 그런 거니까 그 인연줄을 녹여 주기 위해서는 그저 줄만 딱 쥐고선 다 그냥 놔두면, 그렇게 믿고 놔두면은 그냥 저절로 녹아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걸 붙들고 바들바들 뛰니까 가 보질 못하는 거죠. 좀 느긋하게 두면 그냥 갔다가 한번 휘 돌아서 ‘아, 이런 게 이런 거로구나.’ 그러고선 아예 그냥 싫증이 난다구요. 그럴 때 줄을 딱 잡아 제치는 겁니다. 그래야지 이것이 하고 싶어서 ‘내가 이걸 꼭 해 봐야지.’ 하고 할 때에 이걸 탁 막으면 그건 부작용이 나는 겁니다. 해 보고 싶은데 해 보질 못하게 딱 쥐고서는 늘어지니깐 그냥 신경질을 내고 그냥 온통 야단이 나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탁 던져요.

세 살 먹은 어린애나 네 살 먹은 어린애나, 또는 두 살 먹은 어린애, 한 살 먹은 어린애를 만약에 잘못한다고, 이거 울고 뭐 그런다고 자꾸 때려 보십시오. 그럼 더 웁니다. 그럼 저만 손해죠. 어른만 손해예요. 애가 병나고 그러면 더 손해잖아요. 그런데 죄가 있다면 모르는 죄뿐이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바로 죄가 있다면 모르는 죄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니까 어린애로 생각하고 그 어린애를 때리면 뭘 하나 했습니다. 때리면 더 울기나 하지. 이걸 잘 깊이 새겨들으십시오. 그러니까는 아무 데서나 모른다고, 밉다고 또 그러고 아무 데서나 때리지 않았습니다. 때리지 않고 항상 과거의 자기가 어린애로 돼 있었을 때에 자기라는 걸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비하시고 얼마나 도량이 크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그 뜻을 판단하고 그 뜻을 따르라는 거지, 그 뜻을 따르지 않고 만날 물질로만, 색으로만 쫓아다니다가 보면은 그 부처님의 뜻을 하나도 알지 못해요. 뭐, 이 스님은 만날 무슨 한 말 되하고 한 말 되하고 한다 하더라도, 천 번을 하더라도 잘 새겨들어 보십시오. 그런다면 거기에서 바로, 그 진흙, 더러운 그 물에서 아주 예쁜 연꽃이라는 그 향기 내음이 거기서 나오게 되고, 열쇠도 거기서 나오게 되고, 온 누리에 자기가, 참자기가 꽉 차 있을 수 있고, 자기의 사리가 온 누리 우주에 꽉 찰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부처님은 왜 이프셨던 것인지요.
문)
우매한 질문이겠지만, 저희 같은 중생들이야 벗어날 수 없는 일이라지만 아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는 왜 아프셨던 것인지요.

답) 부처님께서는 잠시 모든 것을 이렇게 ‘이 육신은 바로 내 주인의 거고 내 주인의 시자고, 내 주인으로 하여금 형성됐으니까 주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고, 모든 일체 만물이 다 이렇게 변질되고 바숴지고 이러는 것이니라.’ 하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방편을 잠깐씩 이렇게 쓰셨던 것입니다. 그건 방편으로 쓰신 거지 자기가 아파서 그런 건 아니다 이겁니다.

여러분도 몇 년씩 아프다가 그 고통을 받고 만약에 옷을 벗는다면 그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평화롭고 티끌 하나 묻지 않게, 발란하고 생동력 있게, 삶을 보람 있게 그렇게 살면서도 후떡 옷 벗어 버리려면 잠시 잠깐 좀, 그것도 아프지 않게 아팠더라면 상대방들도 고통을 받게 하지 않고 나도 고통받지 않고, 그건 양념으로, 이렇게 진리가 이러하다 하는 것만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처님 법은 그대로 우리가 아픈 것도 법 안 아픈 것도 법, 죽는 것도 법 사는 것도 법이라고 해서 ‘이것이 진리다’라고 얘기를 했지만 우리가 왜, 이런 게 있지 않습니까. 모든 거에서 깊숙하게 자기 주관을 세워서 지혜가 넓은 사람들은 좀 유유하게 살아나가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아주 마음이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남한테 항상 이렇게 밟히고 또는 거절당하고 또 화목지 못하게 되고 또 상대방하고도 내가 거리가 생기고, 이렇게 함으로써 적합하게 가정을 이끌어 나갈 수가 없는 그런 형편에 의해서 자꾸 싸움이 생기고 가정 파탄이 생기고 이런 문제들이 많이 생긴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그러한 문제들이 생기는원인도 바로 자기예요, 누구의 탓이 아니라.

우리가 공부를, 공부라기보다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아,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쯤은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또 살아가면서도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이렇게 묘한 법이 나와서 내가 움죽거리고 있는지 그거를 모른다면 내 몸 하나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없는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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