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난초 이야기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사는 존재

내 기분이 꽃의 웃음 만들어

▲ 법관 스님의 ‘난초’
굴원은 고대 중국 전국시대 당시에 초나라의 시인이다. 동정호의 원류인 멱라(汨羅)에 돌을 안고 뛰어들어 자결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를 기념해서 단오절이 생겼다는 일화가 있는 것을 보면, 한국과 중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임이 분명하다. 굴원은 난초를 주체로 시를 쓴 최초의 시인이라고 한다. 그가 쓴 최고의 명문인 ‘이소’를 보면, 굴원이 사군자 중에 여름을 상징하는 식물인 난초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알 수 있다.

“여기자란지구원혜(余旣滋蘭之九?兮)-나는 이미 구원의 밭에 난초를 키우고 / 우수혜지백무(又樹蕙之百畝)-또 백무의 밭에 혜초도 심었다”라고 한 부분을 읽어보자. 백무라 하면 만평 정도의 밭이고, 9원일 경우 1원을 12무라 치면, 108무니까 만팔백평의 밭이라고 볼 수 있다. 그토록 넓은 밭에 한 줄기에 한 꽃이 피는 난초를 키우고, 또 한 줄기에 여러 꽃이 피는 혜초를 심었다고 하니 얼마나 난초를 좋아하는 지 알 수 있다.

난초는 예전부터 수행의 일환으로 동양 삼국의 많은 스님들이 즐겨 그려온 기품 있는 그림이다. 근래의 우리나라에서도 송광사 방장이셨던 석사자 구산 큰스님이나 동국대 총장을 지내신 퇴경 권상로도 즐겨 그리셨다고 한다.

그런데 난초를 그리되 웃는 난초꽃을 그리기는 무척 어렵다. 난초가 웃는지 우는지를 알기도 어려울뿐더러 이 꽃이 확실히 웃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는 더욱 어렵다. 새가 울고, 꽃이 지는 것을 듣고 보기는 쉽지만 웃는 꽃이나 우는 새의 눈물을 보기는 실로 어렵다.

옛날 학동들이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공부하는 〈추구집(推句集)〉이라는 책에 보면, 재미있는 글귀들이 많이 나온다. 〈추구집〉은 주로 옛날 오언시 중에 적절한 구절들을 뽑아 한시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책인데, 한시는 대립개념을 묘사한 대구법이 그 생명이고 그 대구법이 문학적인 흥취를 느끼게 하는 묘수이다. 〈추구집〉은 말 그대로 시구 안에 그림이 보일 정도로 예술적인 글들이다.

그 〈추구집〉 안에 ‘화소성미청(花笑聲未聽)-꽃의 웃음소리는 들을 수 없고, 조제루난간(鳥啼淚難看)-새의 울음소리는 보기 어렵다’는 재미있는 글귀가 있다. 꽃이라는 것은 워낙 예쁘고 향기가 좋은 것이니 내가 기분이 좋으면 웃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일은 이 시의 원작자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그 중 작자로 추정되는 한 명은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인데 세살 때 지은 시라는 기록이 있고, 다른 한 명은 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은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 1168년∼1241년)인데 6살 때 이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두 명 다 어릴 적부터 신동이자 천재로 이름난 분들이니 누가 지었던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두 분의 후손들더러 누가 원작자인지 결정하라고 하면 문중 간에 싸움이 일어날 수 도 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사실 육체라는 동굴에 갇혀 사는 우리는 모르고 살지만 꽃들과 나무들에는 화정이라는 요정들과 목신이라는 존재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들이 핀 정원에는 수많은 꽃요정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목신들이 나무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한다. 〈담마빠다〉의 일화를 보면 목신들이 많이 나오고, 중국의 사대기서인 〈요재지이〉에 보면 모란의 요정이 사람과 함께 생활한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이 그림은 강릉 능가사의 법관 스님이 그린 난초그림인데, 정식으로 화가수업을 받지 않은 분임에도 환한 난초꽃의 미소를 그려서 깜짝 놀랐다. 수행과 더불어 계행을 잘 지키시면서 사시는 스님이시라 그런지 항상 뵐 때마다 존경의 염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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