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논의제일(論議第一) 가전연 존자 <하>쉼없는 전법

▲ 〈거조암 가전연 나한상〉
대중들 “모르면 가전연에게 묻자”
고국 아반티국의 왕부터 교화
설법에 감동한 국왕 불법에 귀의
‘염부나제금광여래’ 수기 받아
 

부처님의 가르침은 점점 많은 곳으로 전파되어 갔다. 당시 인도를 구성하고 있던 강대국들이 불법을 받아들였고, 부처님과 십대제자를 포함한 제자들의 노력으로 전법의 미래는 밝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영원할 수 없는 것. 교단의 중심이었던 사리불과 목련이 열반하고, 곧이어 부처님의 열반이 있으면서 교단 내부의 변화와 흔들림은 불가피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가전연의 존재는 대단히 중요했다.

‘논의’의 창시
가전연의 설법은 ‘새로움’이었다. 그 새로움을 바탕으로 한 가전연의 전법은 눈부신 불사였다. 가전연이 부처님과 함께 사위성 남쪽 타포타정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사밋디라는 비구에게 천인이 찾아와 ‘한밤 현자의 게송’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게송을 알지 못했던 사밋디는 바로 부처님을 찾아갔다. 부처님께서 게송을 읊으셨다. 잡아함경(131ㆍ일야현자경 一夜賢者經)에서 전한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떠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현재는 일어나는 현상들(法)을 바로 거기서 통찰한다. 정복당할 수 없고 흔들림이 없는 그것을 지혜 있는 자 증장시킬지라. 오늘 정진하라. 내일 죽을지 누가 알리오. 죽음의 무리와 더불어 타협하지 말라. 이렇게 노력하여 밤낮으로 성성하게 머물면, 그를 일러 ‘지복한 하룻밤을 보내는 고요한 현자’라 하리.” 사밋디는 부처님의 게송을 외우고 또 외웠다. 하지만 게송의 깊은 뜻을 잘 알 수 없었다. 사밋디는 다른 비구들과 함께 가전연을 찾아간다. ‘일야현자’란 ‘위빠사나를 증장시키는 수행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가전연이 사밋다와 대중에게 설한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과거를 돌아봅니까? ‘과거의 나의 눈은 이러했고 형색들은 이러했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대한 의식은 열망과 욕망에 묶이고 의식이 열망과 욕망에 묶이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즐길 때 과거를 돌아봅니다.” 가전연은 게송의 문장 하나하나를 설명해 나갔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지금 처해 있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집중하는 것이 현자의 길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가전연의 설법을 듣고 난 사밋디와 비구들은 기뻐하며 돌아갔다.

귀향
가전연 존자가 국왕의 명으로 부처님을 뵈러 갈 당시, 아반티국 안에서는 부처님을 모시는 것에 대한 반발이 컸다. 이미 바라문의 나라인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에서 부처님의 교단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역시 바라문의 나라였던 아반티국의 바라문들은 부처님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아반티 국왕은 국가의 중심이었던 바라문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가전연을 기원정사로 보내기로 했고, 가전연 역시 목숨을 건 길을 떠났던 것이었다. 아반티국 왕이 자신의 나라가 바라문의 나라임을 알면서도 부처님을 모시고자 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바라문이 무너지고 부처님 교단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 마가다국, 코살라국과의 관계 등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처님을 모시겠다는 국왕의 결정과 그 명을 따라야 했던 가전연의 길은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던 일이었다. ‘논의’라는 새로운 설법체계를 창시한 가전연의 명성은 하루하루 높아갔다. 어느 때부터인가 가전연은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고국의 백성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불교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코살라국의 상황과 불법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가전연으로서는 아직 미망 속에 있는 고국의 백성들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가전연은 고국으로 돌아간다.
부처님의 열반을 기다렸던 것인지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 가전연이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는 부처님이 열반에 든 이후로 가늠된다. 결국 아반티 국왕은 부처님을 친견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인도 전역을 걸으며 전법을 펼쳤던 부처님이었지만 아반티 땅엔 인연이 없었다. 짐작컨대 가전연은 안타까웠을 것이다. 고국 아반티에 부처님의 발자국이 없다는 것이.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가전연의 발걸음은 남다르고, 가슴 속에 품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간절한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전연은 고향으로 향했다.

국왕의 귀의
고국으로 돌아온 가전연의 입지는 고국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쉽지 않았다. 더구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돌아온 가전연으로서는 고국 땅을 밟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던 일이었다. 가전연은 국왕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 당시 아반티국의 왕은 빳쪼따였다. 가전연은 국왕에게 필요한 법을 골라 설한다.
“백성들에게 악행을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남에게 악행을 하게 한 사람은 그 과보를 받습니다. 모든 중생은 자기가 지은 업에 얽매여 있습니다. 남의 말에 의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남의 말에 의해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전연은 왕에게 악행과 그 과보를 먼저 설했다. 스스로 저지르는 악행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도록 교사하거나 방조하는 것 또한 크나큰 악업이 된다는 것을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이 되거나 성자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로 인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언행을 살필 것을 설하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밝게 깨닫는 이는 더 이상 죽이고 빼앗는 싸움에 연루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설사 재물을 잃더라도 홀로 살 수 있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많은 재물을 가졌어도 참되게 살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대비시켜 무상함을 깨우치고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그리고 지혜로운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했다. “대왕이여, 장님이 보듯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듯이 들으며, 이미 알고 있어도 벙어리처럼 침묵할 수 있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약자처럼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거짓 없는 선행을 쌓게 되고 그 복을 잃지 않고 간직하게 됩니다.” 가전연의 설법은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일국의 국왕이라면 현상을 신중하고 냉철하게 볼 뿐만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고통소리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국민의 소리를 신중하게 들을 뿐 아니라 들리지 않는 고통의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권력을 행사할 때는 국민의 입장으로 가장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설했다. “폭군이 나타나면 국민은 전쟁이나 폭력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어리석은 지도자가 나타나면 백성은 빈곤과 불안함에서 허덕여야 하며, 자애롭고 지혜로운 국왕이 쌓는 복덕이 바로 국민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가전연의 고국에서의 첫 전법은 ‘국왕의 교화’였다. 가전연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된 국왕은 설법에 감동한다. 그리고 국왕이 가전연에게 귀의하겠다고 하자 가전연은 “국왕이시여, 제가 아니라 부처님께 귀의하십시오.”라고 말한다. 가전연 존자가 고국으로 돌아온 시기는 이미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난 뒤였던 시기다. 이 시기는 부처님의 열반으로 인해 법이 산실되고, 계율이 무너지고, 교권이 불안해지는 등 교단의 흔들림이 있던 시기였다. 그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빌어 자신의 무리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국왕의 귀의처가 부처님임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가전연의 모습은 십대제자로서의 본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반티 국왕은 비록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으나 가전연을 통해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

쉼 없는 전법
가전연은 고국에서 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서 논리 정연한 설법으로 전법을 펼쳤다. 다른 십대제자와 마찬가지로 가전연 역시 포교에 대한 원력은 당연했다. 그는 모든 이가 꺼리던 마두라국까지 불법을 전한다. 가전연이 마두라국 군다 숲에 있었다. 마두라의 국왕 아반티뿟다는 아반티국 빳쪼따왕의 외손자였다. 아반티뿟다는 가전연 존자가 군다 숲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익히 가전연의 명성을 알고 있었던 국왕은 곧바로 그를 찾아간다. 잡아함경(548. 마투라경)에서 전한다. “가전연 존자여, 바라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라문들만이 최상의 계급이다. 다른 계급은 저열하다. 바라문들만이 밝고 다른 계급은 어둡다. 바라문들만이 청정하고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바라문들만이 범천의 아들들이고 적출들이다.〈후략〉’ 이에 대해 가전연 존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두라 국왕의 이 물음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으로, 부처님의 출현으로 인해 기존의 가치관들이 ‘증명’을 받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도대체 불법은 무엇이고 그 법이 그토록 훌륭하다면 지금까지 따랐던 바라문의 가치관과 가르침들은 도대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는 것이다. 바라문 나라의 국왕으로서는 가장 절실한 물음이엇던 것이다. “국왕이여, 그것은 모두 업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왕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가전연이 설했다. “이제 국왕께 내가 묻겠습니다. 국왕은 바라문 출신의 왕입니다. 당신은 당신 나라의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왕의 힘으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그런 당신의 다스림을 따릅니다. 그럼 바라문이 아닌 다른 계급의 사람이 만약 왕이 되어 왕의 힘으로 백성을 다스린다면 그 역시 백성들은 그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국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백성에게 왕의 힘이란 어느 계급의 사람이건 다 똑 같은 것입니다. 바라문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왕이기 때문에, 그 왕이 가진 ‘힘’ 때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라문이 도둑질을 한다면 왕은 그에게 벌을 줄 것이며, 바라문이라도 그는 ‘도둑’이라 불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구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문이 제일이고 청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모두 업에 의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인도를 지배했던 사성(四姓)계급, 카스트제도의 뿌리를 흔드는 질문이고 대답이었던 것으로, 역시 가전연의 논리체계와 탁월한 설법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다.

상수 없는 교단의 빈곳 채워
부처님의 법을 듣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대중들은 그 때마다 “가전연 존자에게 물어봅시다.”고 했다. 그 때마다 가전연은 부처님께서 약설한 법을 다시 설해주었고, 부처님으로부터 논의제일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이름이 가장 낯선 인물이 아마도 가전연 존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경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법화경 수기품에서 부처님은 가전연 존자에게 수기를 내린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알리니 가전연 비구는 8천만 억 부처님들을 공경, 공양하며 찬양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여래께서 열반에 드실 때, 한 분 한 분을 위해 높이가 천 요자나에 주위가 50요자나나 되는 금, 은, 유리, 수정, 빨간 진주, 마노, 호박의 칠보로 된 탑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 탑을 꽃, 훈향, 향수, 화만, 도향, 분향, 옷, 우산, 깃발로 공양할 것이다. 그는 인간으로 윤회하는 마지막 몸으로, 이 세상에서 ‘염부나제금광(閻浮那提金光)’이라는 이름의 존경 받는 여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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