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갈 곳 없는 길을 가고 길엔 온통 낙엽뿐이다
스님은 갈 곳 없는 길을 가고 길엔 온통 낙엽뿐이다
  • 글ㆍ사진=박재완 기자
  • 승인 2012.11.1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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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북한산 순례길 그리고 보광사

“가을이 우리를 사랑하는 기다란 잎새 위에 / 보릿단 속 생쥐 위에도 머뭅니다 / 머리 위 마가목 잎이 노랗게 물들고 / 이슬 젖은 산딸기 잎새도 노랗습니다. / 사랑이 이울어 가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 슬픈 우리 영혼은 지금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다 / 헤어집시다. 정열의 계절이 우리를 잊기 전에 / 그대 숙인 이마에 입맞춤과 눈물을 남기며” 북한산 둘레길 2구간 ‘순례길’에 들어서면 작은 안내판에 예이츠의 시 ‘낙엽은 떨어지고’가 쓰여 있다. 그리고 길은 ‘낙엽’뿐이다. 11월 7일 그 길을 걸었다.

▲ 둘레길에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보광사는 1788년 원담 스님이 창건한 신원사가 시초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도량을 1979년 정일 스님이 중창했다. 법당 마당으로 소나무 그림자 하나가 지나간다.
북한산 둘레길 2구간 ‘순례길’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 솔밭근린공원에서 시작해서 이준 열사 묘역 입구까지 걷는 2.3km의 길로, 모두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이다. 순례길은 일제강점기에서 우리나라의 독립과 해방 후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얼이 서려 있는 공간이다. 이준 열사의 묘역과 17위의 광복군 합동 묘소가 있고, 12기의 독립유공자 묘역, 그리고 국립 4.19 민주묘지가 있다. 시작 지점인 솔밭근린공원은 덕성여자대학 길 건너에 자리한 소나무 숲 공원이다. 공원에서 둘레길 안내판과 보광사 가는 길 안내판을 따라 약 200쯤 걸으면 ‘순례길’ 간판이 나오고, 보광사 가는 길과 나누어진다. 순례길에는 보광사가 있다. 순례길 간판을 따라 길을 시작하면 보광사 가는 길과 나란히 걷게 된다. 꼬불꼬불한 길이 많아서 길이 지루하지 않고, 경사가 급한 곳은 별로 없어서 걷기 좋다.

▲ 예이츠의 시가 길목을 열어주는 순례길에는 온통 낙엽이다.
바람이 숲을 쓸고 지나간다. 바람에 꺾인 잎새들이 다시 숲에 내려와 쌓인다. 온통 낙엽이다. 잎은 거기, 바람은 거기, 숲은 거기. 천년이나 한 철이나 한 장 낙엽이기는 마찬가지. 기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간. 쌓이는 낙엽을 밟으며 길을 시작했다. 밟히는 낙엽마다 시가 적혔고, 밟힌 시들은 가슴에 와 쌓인다. 이 길을 걷지 않았다면 가을은 끝나지 않았으리. 이 낙엽을 밟지 않았다면 예이츠는 없었으리. 길의 이름은 ‘순례’다.
약 300m 쯤 걸으면 국립 4.19민주묘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나타난다. 묘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역사인가. 뜨거운 역사인가. 뜨거운 영혼들이 차가운 땅에 누워있다. ‘희생당한 290명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다고 안내판에 적고 있다. 그리고 1995년 4월 18일 ‘국립묘지’로 승격됐다고도 적고 있다.
전망대에서 약 200m 쯤 걸었을 때쯤 목탁소리와 독경소리가 들려왔다. 보광사다. 둘레길에서 바로 보광사로 들어갈 수 있다. 보광사는 1788년(정조 12)에 금강산에서 수도한 원담 스님이 창건한 신원사가 시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도량은 남은 당우 몇 채만으로 법등을 이어오다 1979년 남산당 정일 스님이 포교의 원을 세우고 주석하면서 불사를 시작했다. 1980년 보광사로 절 이름을 바꾸고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대승경전산림법회와 참선법회를 열어 부처님의 가르침과 선법을 전하고 있다. 산문을 다시 열었던 정일 스님은 2004년 열반에 들었다. “이제 갈 곳 없는 길을 가야 한다.” 제자가 물었다. “어디로 가신단 말씀입니까?” 스님이 마지막 육신의 입으로 말했다. “창문을 열고 자세히 살펴보아라.” 기자는 스님의 다비가 있던 날 스님을 처음 뵈었다. 작은 비가 왔었다. 서산 대사의 <선가귀감>을 읽고 불가에 귀의한 스님은 그 날 그렇게 비에 젖은 길을 걸어서 갈 곳 없는 길을 갔다.
법당으로 오르는 길목엔 철모르는 꽃봉오리를 물고 목련이 하나 서있고,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 백구 한 마리가 법당 앞에 앉아 있다. 도량을 안은 산기슭은 단풍이 들었다. 법당 마당으로는 소나무 그림자 하나 지나간다. 고요하다. 법당의 문소리도 없고, 길에서 들었던 목탁소리도 사라졌다. 먼 숲에서 산 새소리만 건너온다. 도량을 나와 다시 둘레길을 걷는다. 다시 ‘순례’다. 신숙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지난다. 밝혀야 할 역사인가. 숨겨야 할 역사인가. 자랑스럽게 살다간 그들의 생몰연대 속에 부끄러운 역사가 들어 있음을 아는 한 그들과 역사의 대비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길이 거의 끝나갈 때 쯤 다시 작은 안내판에 예이츠의 ‘낙엽은 떨어지고’가 쓰여 있다. “헤어집시다. 정열의 계절이 우리를 잊기 전에…” 예이츠는 헤어지자고 말했고, 스님은 갈 곳 없는 길을 간다고 했다. 예이츠는 정열의 계절이 잊기 전에 헤어졌을까. 스님은 어느 길에 있을까. 오늘 ‘순례’라는 길을 걸었다. 스님은 갈 곳 없는 길을 간다고 했었다. 길엔 온통 낙엽뿐이다.

▲ 순례길에서는 국립 4·19묘지가 한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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