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비구니 교육의 역사 명성 스님

“한국불교 발전 위해서 교육 필요”
운문사를 비구니 교육 도량으로
길러낸 후학들 일선서 맹활약

원을 철저히 세우면 반드시 성취
문수·관음기도, 사경, 참선 등 일과

가을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다더니, 만추의 운문사는 황홀 그 자체다. 운문사로 향하는 기나긴 차량 행렬, 불쑥 불덩이가 올라올 수도 있는데 한없이 뿌듯하기만 하다. 수많은 참배객들과 관광객들의 마음이 나와 비슷하리라는 생각 덕분.

운문사에 들면 도량이 설법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비뚤어진 데도 없고 모난 데도 없이 정갈하고 편안한 도량, 비구니스님들의 맑은 모습을 뵙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청정해지고 지난 삶을 성찰하게 된다. 명성 스님이 계셔서 더욱 푸근한 고향 같은 도량이다.

명성 스님은 전통과 현대 학문을 섭렵한 대강백으로 한국 비구니교육사의 역사요, 산증인으로 불린다. 40년 넘게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운문사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비구니 도량, 아니 세계 제일의 비구니 도량으로 일구고, 운문승가대학에서 1,700여 제자들을 길러낸 명성 스님 덕분에 오늘의 운문사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량의 나무 한 그루, 들꽃 한 송이에도 스님의 정성이 깃들어 있는 듯해 감동받는 운문사 죽림원에서 스님을 뵈었다.

세상에서 제일 큰 힘, 원력
동국대 교수 임용 제의를 뿌리치고, 1970년 운문강원 강주로 운문사에 오신 명성 스님. 학인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시던 스님은 1977년부터 1998년까지 20년 3개월 동안 운문승가대학 학장과 운문사 주지소임을 겸임하면서 정말 많은 불사를 하셨다. 스님은 10여 동에 불과한데다 말할 수 없이 쇠락했던 운문사를 40여 동의 전각이 자리한 대가람으로 환골탈태시키고, 250여 대중이 수학하는 비구니 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켰다. 

“나는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어요. 나는 눈썹 역할밖에 한 게 없어요. 다 삼직스님들, 사부대중이 한 것이고 부처님 가피로 이루어진 것이에요.”

스님을 일러 신라시대의 선화자 비구니 이후에 처음 나온, 500년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스님이라 다들 칭송하는데, 정작 당신은 그 공덕을 모두 다 사부대중에게 회향한다. 스님의 눈썹 이야기가 마치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설하셨으면서도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신 얘기와 겹쳐진다.  

“세상에 여러 가지 힘이 있지요. 그 중 세상에서 제일 큰 힘이 원력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원을 세우면 뜻하는 대로 다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운문사와 사리암의 불가사의한 건축불사, 그보다 더 찬란한 운문승가대학 교육불사와 장학불사, 8대와 9대 전국비구니회장으로 한국 비구니회 발전을 위한 샤카디타 대회 유치와 국제세미나 등 수없이 다양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었던 힘이 서원에 있다고 강조했다.

“보통사람들은 크든 작든 대부분 욕심으로 살아간다면 불보살님들은 서원으로 살아갑니다. 아미타불 48대원, 약사여래 12대원, 여래십대발원, 사홍서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요?”

그렇다. 스님은 불보살님들처럼 초발심시절부터 지금까지 60여 년을 한결 같이 서원으로 살아오셨다.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문수기도와 관음기도를 하면서 스님은 일구월심 여래십대발원문을 체득했다. 특히 과거 무량겁부터 몸과 입과 뜻으로 알게 모르게 익혀온 죄업을 멸하여 학인들 모두 장애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학인들이 서원의 힘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서원하고 또 서원하고 있다.

“원을 세우는 것이 씨앗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트듯이 원을 세우면 그대로 성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종이 있다 해도 치지 않으면 종소리가 안 나듯이, 원을 세우는 것은 종을 치는 것과 같아서 크게 종을 치면 종소리가 크게 납니다. 그와 같이 원을 철저하게 세우면 반드시 성취할 수 있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중생은 딴전을 피운다. “서원을 세운다고 해서 스님처럼 다 이루실 수는 없을 것 같다”며 특별한 비결을 자꾸 여쭈었다. 스님은 “될까 말까 의심하지 말고 철저하게 원을 세우면 반드시 성취하게 되어 있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단박 역설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뜻하는 바가 있어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님이 뜻하는 일마다 알차게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서원의 힘, 원력과 기도에 있었다. 스님의 삶 자체가 서원과 기도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 많은 불사를 원만 성취하고, 운문사의 사부대중이 각자 모양새대로 아무런 장애 없이 잘 살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처럼 되어 지이다”
“스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관음보살의 자비와 문수보살의 지혜와 보현보살의 원력을 두루 갖추셨어요. 많은 사람들이 허물을 내세워 내치라는 사람도 관세음보살님처럼 안아 주시고 믿어주시는 분이세요. 또 매사에 문수보살의 지혜를 쓰시고, 일을 추진하실 때는 열정적이고 부지런하시고,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시고, 참고 견디며 기다려주시는 인내심, 인욕행에는 따라갈 사람이 없어요.”

상좌스님의 말씀을 빌지 않더라도 스님을 뵈면 전생부터 닦아온 수행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일찍이 스님이 법기임을 간파하신 관응 큰스님의 특별한 교육을 받으신 덕분인가? 아니면 전생인연이 훈습되어서인가?

스님은 어릴 때부터 〈성현전〉을 많이 읽으면서 “성현처럼 부처님처럼 되어 지이다” 하고 서원을 세웠다. 또한 ‘관세음보살님이시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셨을까’ 하며 살아왔기에 아무리 어려운 일에 맞닥뜨려도 속상하다거나 힘들지 않았다. 남다른 체험도 전생부터 이어진 출가 인연을 예시해 주는 것은 아닐까?

“관응 스님께서 〈생명의 실상〉을 여러 번 읽으라고 하셨는데, 그 책을 읽을 때 아주 신비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어느 여름날 개울가에서 책을 읽다가 뱀이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징그럽다거나 무섭다기보다는 측은한 마음이 더 컸다. ‘축생의 몸을 해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을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신이하게도 그 자리에서 뱀이 굳어갔다. 그때 우연의 일치로 죽었는지, 뱀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기원한 공덕으로 몸을 바꾸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 그 일은 지금까지 생생하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해인사 국일암(선원)의 선행(善行) 스님을 은사로 발심 출가했다. 행자시절 공양주 소임을 살면서 치문과 초발심자경문을 뗐고, 일구월심 공부길이 열리기를 발원했다. 6·25전쟁 중이었는지라 총성과 포격소리가 산중을 흔들어대도 두렵지 않았다. 불보살님을 의지하며 공부에 장애 없기만을 서원하였다. 뜻대로 공부길이 열렸다.

스님은 당대의 대강백이셨던 관응 스님(사집), 경봉 스님(동학사, 원각경), 운허 스님(능엄경), 만우 스님, 탄허 스님, 성능 스님(선암사)을 모시고 경전공부에 매진하였다. 마침내 성능 스님 회상에서 대교를 마쳤다.

“어느 날 노장님께서 좌복을 쓰윽 밀어주시면서 전강을 받으라고 하시더군요.”
출가한 지 5년 만에 파격적으로 전강을 받은 것이다. 더군다나 비구니 스님에게 전강을 주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는데,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스님은 스물여덟의 나이에 조계사 법당에서 신도들에게 법화경을 설하였다.

그때 마침 종회를 마치시고 동산 스님, 청담 스님, 일타 스님 등 당대 최고의 어른스님들이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왔다. 명성 스님은 어른 스님들이 앉아계셔서 오히려 더 힘이 되고 든든해서 여법하게 법화경의 회통법문을 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 일, 그러한 마음가짐이 어찌 이생만의 일이겠는가? 출가도 공부도 불사도 다 다겁생의 인연의 소치일 것이다. 
 

▲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이 학인들을 가르치는 모습. 명성 스님의 운문사 승가대학은 전통강원 교육 이외에도 외국어, 원력이 담긴 인문학 등 학인들이 시대의 스승이 됐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 있다.
학인들이 모두 인천의 스승되길
“강원에서 경전을 가르치면서 내전과 외전을 다 겸해야만 한다는 생각, 이 시대사조에 부응해서 현대인들을 이해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해 주고, 한국불교의 발전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져서 동국대학교에 들어갔지요.”

선암사 강원에서 꼬박 3년간 강의를 하면서 스님은 종단 교육의 현실을 절감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청룡사 강원에서 10년간 후학을 가르치는 한편 동국대학교에서 학문연찬에 힘썼다(스님은 불교학에서도 어려운 유식학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당시 김동화 박사님이 “시골에서 하는 공부는 서울에서 낮잠 자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까지 동국대학교 강단에 남아주기를 원했는데 운문사로 내려왔다. 그리고 평생을 비구니 후학 양성에 바쳤다. 이는 스님의 남다른 원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수레의 양 바퀴처럼, 새의 양 날개처럼 비구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이 힘을 합쳐 부처님 법을 전해야 한다는 것. 일찍이 비구니 스님들을 제대로 교육시키면 한국불교 발전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때 스님을 따르던 청룡사 학인들까지 운문사로 따라내려 왔다. 스님이 운문사에서 강을 하니 전국에서 학인들이 몰려들었다. 학인들이 공부할 장소가 모자라 불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오늘의 대가람 운문사가 된 단초였다.

스님은 운문승가대학의 교과과정을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개편했다. 당신 스스로 피아노를 치면서 학인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심지어 강원에 들어오기 전 기초학문이 부족한 스님들에게는 따로 국어, 수학, 영어 등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기도 했다. 외국어 교육을 시켜 지속적인 학문 연구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인문사회과학 전공교수님들을 초빙, 특강을 통해 사회를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운문승가대학이 전인적 인격완성과 불법교화에 필요한 다양한 교과과정과 특별활동 프로그램·교육시설·도서실·시청각교육실·컴퓨터실 등 최고의 환경을 갖춘 교육전당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비구니 강원 최초로 승가대학원과 율원을 개설한 것도 다 스님의 “비구니스님들이 한국불교에 대한 책임과 지도력을 가지고 각계각층에서 불교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조력하겠다”는 원력에서 왔다.

스님은 지금도 “학인들이 장애 없이 공부해 인천의 스승이 되게 하여 지이다”라는 서원과 기도로 하루를 열고 닫는다. 스님의 간절한 서원과 기도 덕분에 운문승가대학을 나오신 스님들의 활약상이 대단하다. 운문사관학교라 칭하는 운문 출신 스님들은 활발발한 기개로 오늘날 포교현장, 선방, 강원, 대학 강단 등에서 한국불교발전의 주춧돌을 놓고 있다. 

“개개인의 몫을 원만하게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신 명성 학장스님께 늘 감사드린다”는 찬사를 드리는 운문승가대학 졸업생 스님들, 요즘과 같은 스승 부재의 시절에 스승에 대한 스님들의 고마움과 그리움이 참으로 부럽다. 

내생에도 부처님 법을 전하겠다
“예전에 김우중 씨가 쓴 책 제목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였는데, 이 나이 되고 보니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짧네요.”

세수 83세, 스님은 나이를 잊고 살았다. 1998년 뒤늦은 박사학위를 받는 날, 30년을 소급해서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스님은 늘 청년의 열정으로 사셨다. 가장 훌륭한 스승은 행동으로 보여준다고 했던가.

일상 생활 그대로가 수행이었다. 스님의 올곧은 신심, 기도와 원력으로 사는 삶, 최선을 다해 매사에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이 그대로 후학의 귀감이 됐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운문의 가풍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스님께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짧다는 말을 들으니, 하루라도 빨리 정진하라는 자비로운 경책으로 들렸다. 

“중국에 갔을 때 낙산의 부처님을 참례한 적이 있어요. 부처님 발에 몇 사람이 설 수 있을 정도로 큰 부처님이셨어요. 낙산이 매우 가파라서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었는데, 그때 미륵불을 염하면서 ‘미래세 미륵부처님의 회상에도 태어나 출가 수행해 부처님 법을 전하겠습니다’라고 원을 세웠지요.”

후학들에게 많은 부분을 위임한 스님은 요즘 새롭게 출가한 듯 새로운 마음으로 수행하고 있다. 정해진 시간에 문수기도와 관음기도, 만불 사경, 참선 수행, 독서, 포행을 하고 찾아오는 불자들에게 법문도 해 주면서 평생동안 세웠던 원을 다시 한번 다지고 있다.

▲ 2004년 6월 28일 열린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참가자들이 당시 대회장이었던 명성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운문사를 참배하고 있다.
“중생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내생에도 부처님 법을 전하겠습니다.”

하루하루 원력으로 수행으로 살아가는 명성 스님, “원은 종자와 같기 때문에 씨앗을 심으면 싹이 트는 것처럼 원을 세우면 반드시 이뤄집니다. 누구든지 원력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수행이 다른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사는 것이 수행입니다”라는 스님의 말씀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가을햇살을 받은 운문사가 빛난다. 스님이 있어 더욱 충만한 운문사다. 스님께서 선물로 주신 합장주를 돌린다. “스님, 스님처럼 진실하게 살겠습니다. 부처님 법을 전하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라는 원을 세우고 나의 신행을 다잡는다.  

법계 명성(法界 明星)스님은 … 1931년 경북 상주 출생, 1952년 해인사 국일암에서 선행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8년 선암사에서 성능 스님에게 전강을 받고, 선암사 강원 강사 3년, 서울 청룡사 강원 강사로 10여 년간 후학을 지도하였다. 1970년 운문사 승가학원 강사로 취임, 1977년부터는 운문사 주지 겸 학장으로 재임하면서 1,700여 명이 넘는 졸업생과 13명의 전강제자를 배출하는 등 비구니 교육에 헌신하였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원(3, 4, 5, 8, 9대) 역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비구니 최고 품계인 명사 법계를 품수 받았다. 전국 비구니회 회장(8, 9대)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운문승가대학원장, 운문사 회주로 운문사 죽림원에서 주석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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