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알면 그대로 그 하나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913호 11월 7일]

▲ 그림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이 마음 하나가 벌레라고 합시다. 그 마음 하나의 벌레가 악이라 하면 악의 씨가 수천수만 마리가 나올 수 있고 선의 씨다 하면 선의 씨대로 수천수만 마리가 나올 수가 있으니 이걸 어떻게 감당을 할까요? 그러니까 약도 고정됨이 없고 병도 고정됨이 없다 이 소립니다. 아무리 연구해서 이것이 이 병의 약이라고 내놓아도 얼마 안 가면 그거는 벌써 무효가 됩니다. 또 거기에 맞게 달리 연구를 해야 되고 또 다른 병 증세는 연방 나오고, 그러니 약을 자꾸 달리 연구를 해야 하는데 병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를 연구할 때 열 가지가 나오니까요. 이게 보이지 않는 데의 무서운 이치라고 볼 때 이 도리를 모른다면 우리는 내 몸을 건강하게 끌고 다닐 수도 없거니와 내 가정을 내 사회를 내 국가를 세계를 우주를, 이 모든 거를 우리가 극난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말들이 다 필요 없다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마는 일단 들어 놓으면 때에 따라서 급하면 생각납니다, 급하면. 평상시에는 생각이 안 났다가 자기한테 급한 일이 닥쳐오면 ‘아이구!’ 하고 그때 그 생각이 납니다. ‘아이구, 내가 이렇게 해 봐야지.’ 하고요. 그러니까 들어 두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또 내가 여기에서 가르치는 거는, 안되고 되는 것을 어떻게 놓느냐 하는 겁니다. 자기 카세트에서 나오는 거 자기 카세트에다 되놔라. 안되는 거는 ‘아, 나를 성숙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나를 다지기 위한 과정이다. 이건 고가 아니다. 나한테 부딪쳐 오는 이것이 나를 성숙하게 하고 물리를 터지게 해서 지혜를 얻게 해 주는 과정이다.’ 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감사할 거고, 또 ‘거기서 일체 만법을 다 해 나가니 감사하고, 또 잘됐으니 감사하고 이러니까 모든 게 다 감사해.’ 그렇게 그 감사함을 알고 가는 겁니다. 또 그렇게 감사하더라도 이 내 마음 깊은 속에 감사함을 놓고, 바로 맡겨 놓고 사신다면 나가서 일을 해도 편안하고 또 집에 들어와도 편안하고 따뜻하고 또 화목하고 조화를 이루게 되니까 뭐든지 좋죠. 몸 건강하니 좋고 내 마음 편안하니 남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고, 내 마음이 편안하니까 말도 편안하게 나오고 또 말이 편안하게 나가니까 화목을 도모하고, 이러니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이 절간 살림이나 바깥의 살림이나 살림이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마는 우리 스님네들은 결코 절을 운영하고 살림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들어온 게 아닙니다.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바로 원심력을 얻어서 그 원의 항아리를 굴리고, 여러분의 살림살이와 자기 살림살이가 둘이 아니게끔 보고 둘이 아니게 나투고, 둘이 아니게 나투는 까닭에 둘이 아니게 모든 일을 해 나가고, 죽은 세상 산 세상을 같이 껴잡고 나갈 수 있는 여건을 가지면서 여러분도 이렇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한테 한 가지 묻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손은 이 ‘공’ 안에 꽉 찼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관세음보살의 진짜 손입니까? 또 여기 눈들이 참 많습니다, 눈! 여기 여러분의 눈만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백 명이 있다면 백 명의 눈이 또 있는데 그 백 명의 눈이 수천수만 가지의 눈으로 되어 있으니 눈이 그렇게 많다면 어떤 것이 진짜 눈일까요? 또 다른 걸 얘기해 볼까요? 지금 저, (화분을 가리키시며) 이파리가 많습니다. 이게 소나무 이파리라면 어떤 것이 진짜 이파리겠습니까? 내가 여직껏 말씀드린 거를 잘 생각해 보시면 여기에도 그 의미가 나옵니다. 바로 우리는 뿌리와 이파리와 가지를 다 보고 있습니다. 근데 이 이파리들은 말입니다, 자기 뿌리를 못 보거든요, 흙에 가려서. 인간이 무명에 가려서 자기의 참자기를, 자기 뿌리를 못 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잘 음미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공동묘지에 가 보십시오. 남녀노소를 막론해 놓고 모든 물질은 없어져 버렸죠. 사대(四大)로 태어났다가 사대로 흩어지고 말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남았을까요? 보니까 전부 늙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애나 어른이나. 애가 죽었으니까 천도를 안 해도 된다고 그러는데…, 천도를 하라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천도라는 거는 내 밥 먹을 때도 천도가 되니까요. 이 도리를 알면 뭐 떠 놓고 할 것도 없어요, 사실은. 그런데 모두 모르니까 그래요. 그래서 애가 죽었거나 한다면 애라고 업신여기죠. 그런데 그 애는 먼저 늙었기 때문에 애가 됐다는 걸 아셔야죠.

그래서 우리가 대의적으로 본다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여자가 남자로 될 수도 있고 남자가 여자로 될 수도 있고 짐승이 사람으로 될 수도 있고 사람이 짐승으로 될 수도 있으니, 또 어른이 애가 되고 애가 어른이 될 수 있으니 어떤 거를 세워서 어른이라고 하며 어떤 거를 세워서 애라고 할 수 있으랴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 몸이라는 집이, 물질이 다 없어졌다면 그대로 물이자 흙이고 흙이자 바람이고 바람이자 바로 불입니다. 그렇다면 다 늙었죠. 백(白)이에요. 흙이에요. 그냥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갔을 뿐이에요. 그런데 뭐가 남았느냐구요? 우리 지금 마음을 내놓으시라면 내놓으실 수 없겠죠? 그 내놓을 수 없는 바로 그것이 뿌리죠. 우리 마음, 내놓을 수 없는 거, 볼 수 없는 거….

그런데 여러분은 꿈에, 꿈이자 생시고 생시이자 꿈인데, 자기 몸을 뉘어 놓고 나가서 온통 다니다가 오거든요. 지금도 여기 앉으셔서 그렇게 하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집에 지금 뭐를 내려놓지 않고 왔거나 올려놓지 않고 왔거나 뭐 세워 놓지 않고 왔거나, 하여튼 뭐 급한 일을 안 해 놓고 왔다면 집 생각을 하실 겁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벌써 집에 가고 있는 겁니다. 가고 오고 온통 야단난 거죠, 마음이 말입니다. 체가 없으니까 마음만 갔다가 왔다가 그러다가 보니까 체 있는 놈을 붙들어다가 그거를 치우게 하거든요. 내가 걱정을 하면 자연적으로 벌써 딴 식구가 와서 그걸 해 놔요. 그러니 그 몸이 내 몸이고 내 마음이 그 마음이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에요. 이렇게 에너지가 그냥 자가발전소에서 가설이 된 데로 전력이 다 나가서, 여러분이 가정마다 회사마다 모두가 용도대로 다 쓰는 그 전력과 같다 이거예요, 우리 마음이. 그렇게 광대무변한 겁니다. 여러분도 광력이나 전력이나 자력을 충만하게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 도리를 배우셔서 가정에 이익 되고 공덕이 되고 복덕이 되고, 여러분의 우환과 가환을 다 자기 스스로 없애고 화목을 도모하면서 정답게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하십시오. 죽 한 그릇을 놓고 숟가락을 셋이든 넷이든 같이 꽂아 놓고 먹어도 그렇게 즐겁고 좋을 수가 없는 그러한 넓은 마음으로, 이 손을 쫙 벌리면 우주가 다 담겨 올 수 있는 그런 심력(心力)을 가지고 보람 있게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질문하실 분은 없을까요? 없다면요, 우스운 얘기 한마디 하죠. 지난번에 앵커리지에 갔거든요. 거기를 들러서 산호세로 해서 샌프란시스코에 왔습니다.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은 거 같아서 우스운 얘기 하나 하는 겁니다. 거기서 세미나를 한다니까 미국 사람들이 달려들었죠. 한국 사람보다도 미국 사람이 더 살밭이 들어섰는데, 타의에서 구하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자의에서 구하는 것을 배우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닥터 웨버라고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다리는 기-다란 사람이 배우려고 왔는데, 30분 동안 아침에 좌선을 하라고 하니까 날더러 “그대로, 그대로 참선이라면서 어째서 이렇게 30분 동안 앉아 있어야 되느냐?” 이렇게 질문을 해요. 그래서 “이것 보시오. 그대로 참선이라 그랬으면 마음먹고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다 참선이지. 또, 좀 틈을 내서 앉았다면 이게 참선이다 저게 참선이다 분별하지 말고 참선을 하랬지 누가 그게 아니라고 그랬느냐.” 그랬습니다.

여러분도 여기서 때에 따라 좌선을 할 때 틈을 내서 앉았으면 명상도 되고 참선도 되고 좌선도 되고 그런 거죠. 그것이 마음을 좀 쉬어 볼 수도 있고 관(觀)해 볼 수도 있는 계기가 되는 거 아닙니까? 부지런히 일할 때는 일하는 것도 참선이고요. 그래서 이 우주 진리가 돌아가는데, 끊임없이 그렇게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나 좌선한다. 하루 24시간 중 8시간을 좌선을 한다.’ 하더라도, 만약에 고런 생각을 하고 좌선을 했다면 그건 좌선이 아닙니다. 그냥 좌선일 뿐이지 참선이 될 수가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왜 참선이 될 수 없느냐? 내가 앉는다고 생각하고 앉고 선다고 생각하고 서니까, 그 나머지는 다 끊어지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앉으나 서나 누우나 모든 게 참선이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좀 관하면서 앉아 있는 시간을 두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런 시간도 없다면 그걸 어떻게 정립을 하고 그것을 어떻게 관하고 어떻게 그 만 가지의 맛을 알겠습니까? 내 자가발전소가 만 가지 생산을 해낼 수 있는 바로 그 생산처니까, 내가 바로 그 맛을 안다면 그 생산처에서는 만 가지의 맛을 낼 수 있고 바로 만 가지 생산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 가지의 생산을 해서 남에게 만 가지로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런 심력과 원심력을 통달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되겠죠.

엊그저께도 보니까 기독교 믿는 사람들이 불교 믿는 사람을 전부 마구니로 돌리는데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불교를 믿는 사람이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든 어떠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든, 각자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고 행하기에 달려 있는 겁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남을 아프게만 하고 전달을 해도 못쓰게만 전달을 하고, 하나하나 해 나가는 게 나쁘게만 해 나간다면 어떤 종교를 믿든지 그게 마구니죠. 사람이 마구니짓을 안 하는데 어찌 마구니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마구니짓을 한다면 마구니가 있을 거고 사람이 마구니짓을 안 한다면 마구니가 없겠죠. 우리가 전부, 여러분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는 한생각에 부처가 될 수 있는가 하면 한생각에 중생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상구보리(上求菩提)’ 하면 ‘하화중생(下化衆生)’이 거기 따라붙고 또 ‘하화중생’ 하면 ‘상구보리’가 따라붙고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만약에 다 부처라면 여러분 속에는 다 중생들이 있는 거죠. 이 몸 자체로 인해서 다 중생들이 아닙니까? 여러분 속에는 다 중생들이 들어 있단 말입니다, 거죽은 부처라고 보더라도.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에 의해서 중생들이 다 한마음을 깨치게 되면 이 중생들의 마음이 한마음으로 다 깨쳐져서 인간으로 환토를 할 텐데요. 아니, 짐승들이라면 인간으로 환토를 하고 사람이라면 부처로 환토를 한다 이겁니다. 진화된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 도리를 하나하나 검토해 가면서, 들었던 거 다시 듣고 다시 듣고 해서 실천을 하는 데 의의가 있는 거지 말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책도 반드시 백지가 있기 때문에 글씨를 쓴 것이고 글씨를 썼기 때문에 그 글자를 보는 겁니다. 만약에 백지가 아니었더라면 글씨는 쓰지도 못하고 그 글자도 보지 못할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삼위일체로 돌아가는데 어떤 것이 진짜입니까? 백지가 진짜입니까, 글이 진짜입니까, 글을 보는 게 진짜입니까? 어떤 거 하나 빼 버릴 게 없는 것이니, 바로 한데 합쳐서 부처라고 했고 그게 길이라고 했고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예전처럼 그렇게 기복으로만 야단법석할 게 아니라, 하나를 알면 그 하나를 그대로 실천해 나가면서 자기가 지켜보고 익히면서 체험하고, 체험하면서 자기는 자기를 다지고 다지며 자꾸 걸어 나가야 하는 거죠. 놓고 놓고 걷고, 놓고 걷고…. 우리 살아나가는 게 바로 카세트와 같습니다. 거기다가 노래를 넣었다가 또 다른 노래를 넣으면 앞서 것은 없어지면서 채워지고, 또 넣으면 채워지면서 없어지고 채워지면 없어지고,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진리요 지금 살림살이입니다. 그러니 거기 무슨 업보가 붙어 있겠습니까, 채워지면 없어지고 없어지면 채워지는데. 그러니 업보가 있다고 집착을 하거나 이런다면 그게 정말 업보가 되는 겁니다. 또 인과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인과가 되는 것이고, 전자의 조상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잘못되는 겁니다.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줄 아십니까? 마음 하나가 말입니다.

언젠가 한번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님, 제가 꼭 개를 잡아서 약으로 써야 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했습니다. 딴 약은 먹기 싫고 개를 폭 삶아서 먹으면 자기 병이 낫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스님으로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옳을까요? 어떻게 말을 했겠습니까? 잡아먹지 못하게 했을까요, 잡아먹게 했을까요?

대중 가운데서: 잡아먹게 했을 겁니다.
큰스님: 잡아먹게 하긴요. 허허허…. 난 잡아먹게 하지는 않습니다. 또 못 잡아먹게도 안 합니다. 단 이런 게 있습니다. 만약에 소의 그 모습이, 그 살이, 그 고기가 내 고기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고 그 생명이 내 생명이라면, 그거는 먹은 것도 없고 안 먹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역력하게 먹어서 그건 약이 된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시겠죠? 만약에 고기 한 점을 놓고 말입니다, 고기 한 점을 놓고 이게 소 한 마리라고 그런다면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곧이 안 듣죠? 곧이듣겠습니까, 안 듣겠습니까?

대중 가운데서: 안 듣습니다.
큰스님: 안 듣죠? 그런데 이 몸뚱이가 큰데…, 마음이라는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지구가 몸뚱이라면 마음이, 그 지구도 탁 내놓고 지구 바깥으로 나가니까 말입니다, 지구가 콩 알갱이만도 못하게 보이는 거죠. 그런데 그 고기 한 점이 어째서 소 한 마리가 아니 된다는 얘깁니까? 마음은 체가 없다고 그랬죠? 그 마음 하나가 수십 마리의 마음이 될 수 있다고 그랬죠? 수십 마리를 낳을 수도 있어요. 쓰레기통에 따뜻한 기가 도니까 생명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걸 보시죠?

이해가 안 가시는 모양 같은데 나 말할 기운이 없어졌습니다. 허허허. 소 한 마리가 한 점도 될 수 있고 한 점이 소 한 마리가 될 수도 있어요. 이 도리를 아셔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내가 정말 인간으로서 큰소리하고 다닐 수 있는데, 또 큰소릴 해서 큰소리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큰소리를 할 사람은 큰소리를 안 해요.
그리고 자비라는 건 뭘 자비라고 하는가! 이거 들떼기로 쬐끔쬐끔 얘기하는 것 잘 들으세요. 자비라는 건 악하고 선하고, 더럽고 깨끗하고, 낮고 높고, 평전하고 평전치 않고, 가난하고 가난치 않고, 못나고 잘나고가 둘이 아니고, 남과 여, 동서남북이 둘이 아닌 까닭에 바로 자비입니다. 저 강물이 구정물이든 핏물이든 똥물이든 고름물이든 수많은 물이 다 들어와도 여여하게 그냥 받아들이면서 그냥 흐르죠? 마음은 그와 같은 겁니다. 마음 쓰기에 달렸습니다.

여기 제주도에서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마는, 의학적으로도 그렇고 사람을 수술하든 생선을 칼로 자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큰 생선을 갖다가, 펄펄 뛰는 거를 한번 칼로다가 탁 잘라 보십시오. 그 탁 자르는 순간 모든 혈맥의 피는 그 곳으로 뭉칩니다. 피만 뭉치는 게 아닙니다. 거기 피가 뭉침으로써 이 마음, 의식이라는 자체가 딱 몰리게 되는 거예요. 그럼 그걸 먹었다 하면 병나는 거예요. 언제나 탁 자른 그 자리는 제거해 버리고 다 씻어 버리고 피를 다 긁어 버리고 요렇게 해서 먹는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이 마음이라는 한 점! 한 점도 없는 게 마음인데 어찌 고기 한 점이 소 한 마리가 안 된다는 얘깁니까? 마음이라는 이 자체가 물 한 방울도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는데 어째서 소 한 마리가 안 되느냐 이겁니다, 한 점이! 그래도 한 점이나 되는데요.

또 건너뛰어서 알래스카로 가야 됩니다, 지금. 한번 웃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닥터 웨버가 그렇게 했는데, 어떻게 말을 통하게 할 수가 있어야죠. (물컵을 기울여 보이시며) 이거를 이렇게 다 따라 내고서는 또 물을 붓고 또 따라 내고 또 물을 붓고 또 따라 냈습니다. 그러니까 찬찬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며) 이렇게 끄덕끄덕하거든요. 그렇게 고개짓을 하니까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양손으로 몸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 내리시며)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호-, 호오-” 하면서 ‘아, 그렇게 비우라는 그거냐?’ 이거예요. 그렇다고 그랬죠. (고개를 끄덕이시며) “오케이, 오케이. ”그러니까 아, 좋다고 말입니다. 그날부터 좌선하러 오는 거예요. 이렇게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죠.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면 난 어떡하라고요.
그래서 외국인이 한 40명 오고, 한국 사람이 한 30, 40명쯤 돼서 한 70, 80명이 법회에 모였습니다. 근데 거기서는 사람이 그렇게 모이는 게 아주 기적이라고 합디다. 그런데 통역을 해 줄 사람이 있나요, 또?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하더라도 이 불교 용어를 모르기 때문에 통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는 대로 받아서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할 수 있나요? 나는 한국 사람만 들으라고 얘기하고 또 외국 사람한테는 또 딴 사람이 영어로 쓴 것을 읽어 주고 그랬으니까 우습죠, 그게.

그랬는데 그 소릴 듣더니 말입니다, 그 중에 한국말도 알아듣고 외국말도 할 줄 아는 중국 사람이 일어서서 대충 얘기를 몇 마디 해 줬어요. 그랬더니 너무나 좋다고 손바닥을 치면서, 내가 끝나고 나오니까요 그 사람들이 제가끔들 일어서서 뽀뽀를 하는데 글쎄, 어디다 할 것 같습니까? 하하하…. 뽀뽀를 어디다 하겠습니까? 머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뒤쪽 머리를 짚으시며) 여기다 할 수밖에 없죠? 나는 키가 자그마하죠? 그 사람들은 키가 외이대같이 크죠? 그러니 어떡합니까, 글쎄. 꼼짝없이 밑에서 뽀뽀를 당하고 말았죠, 뭐. 하하 참, 어떻게 생각을 하면 좀 기분도 나쁘겠지만 기분나쁘다고 할 것도 없죠. 그 사람네들의 마음이 너무나 강력해서 거기까지 오게 된 거니까 오히려 감사해야죠. 그렇게 그런 일 저런 일 다 봐 가면서 다니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은 그렇게 배우려고 애를 쓰고 그러는데, 우리는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처지인데도 이 도리를 배우려고 애를 쓰지 않는다면 그건 참….

부처님의 그 뜻,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죠. 책을 본다면 그 뜻을 봐야 하고 그 백지를 알아야 되는 겁니다. 백지를 알고 그 뜻을 알고 글자를 알고 그래야만이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뜻을 아는 거죠. 마음이 있다면 마음 내는 게 있고, 육신이 있다면 보고 말하고 하는 이것이 교(敎)가 아닌가요? 불교 말입니다.
오늘은 그냥 도떼기로 이렇게, 나는 무슨 계획이 없기 때문에 그런지 여러분 만나니까 쪼끔 하고 또 넘어가고, 쪼끔 하고 또 넘어가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리가 그러해요. (잔 받침을 들어 보이시며) 여기에 가설을 한다면 사방팔방으로 많이 할 수 있듯이 골목이 많아요. 마음이라는 게 체가 없으니까 어디로 갈는지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이 요렇게 생각을 했다가 저렇게 생각을 했다가 하는 것이, 이 골목으로 들어가서 기웃거리고 저 골목으로 들어가서 기웃거리고 요 골목으로 가서 기웃거리고 이런 거니까 양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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