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경남 ㅎ사찰의 누각 앞에 설치했던 계단의 부적절한 장식성. 지금은 단아한 모습으로 개선되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신분이나 계급, 가문의 촌수 또는 연령에 따라 위와 아래가 엄격히 구분되었고, 그것을 통해서 조화로운 질서를 구현하였다. 이러한 계층적 질서의 구현은 사회적인 현상뿐만이 아니라 건축공간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사찰에서 주불전의 공간규모를 다른 건물에 비해서 크게 한다든지, 주불전을 가장 높은 곳 혹은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짓는다든지, 주불전의 장식성을 다른 불전과 차별화한다든지 하는 것이 바로 사찰에서 계층적 질서를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최근에 들어 사찰에서 이러한 계층적 질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건물을 앉히거나, 부불전이나 부속건물을 주불전보다 크게 짓거나, 지나치게 화려하게 장식하여 지금까지 우리 사찰에서 지켜온 계층적 질서가 교란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사찰에서 중요하지 않은 건물은 없겠지만, 그 건물에 어떤 불보살을 모시는지, 그 건물에 어떠한 기능을 부여하는지에 따라 그 건물의 중요성이 달라지는 것이 우리나라 사찰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조영법식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결과이다.

사찰마다 많은 신도들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되면서 전과는 다른 건물들을 새로 짓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특히 건축공법과 기술이 발전되고, 재료가 달라지면서 건물의 규모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장식효과도 이전과는 달리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오랫동안 익숙하게 여겨왔던 공간의 질서가 무너지고, 경관적 정체성이 훼손되는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건물의 규모나 양식뿐만 아니라 건물에 부속된 계단과 같이 작은 요소마저도 장식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생뚱맞은 경관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주불전이 아닌 건물에 설치한 계단의 난간을 용으로 만들기도 하고, 법수에 지나치게 강조된 법륜을 두기도 하여 그 건물의 성격을 오해하게 만든다.

한국의 사찰에는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온 경관적 정체성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것이 바로 계층적 질서를 존중하는 디자인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인데, 만약 이러한 질서자체가 훼손되고 오염된다면 우리 사찰에서 더 이상 한국성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외국의 사찰들을 보면, 그 사찰의 경관적 정체성이 유지되어야 함을 기본적인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사찰의 경우에도 진정성의 유지를 위해서 한국사찰이 오랫동안 지켜온 계층적 질서가 존중되는 불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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