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로 이루어집니다 [911호 10월 24일]

▲ 그림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1(남): 두 번째는 제 개인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공무원 생활 30년을 마치고 금년 6월에 퇴직을 했습니다. 근데 제 공직 생활을 반조해 볼 때 모두 은혜 속에서 살았음을 감사하게 느낌과 동시에 좀더 부드럽게 할 수는 없었나 하는 반성도 해 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은혜에 보답도 좀 하고 세금 문제, 어려운 문제를 주인공한테 믿고 놓아서 해결해 보려고 사무실을 열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욕심을 낸 것은 아닌지 또한 부처님과 스님 가르침에 누가 되지는 않는지요. 물론 누가 된다는 생각도 놓아 가고는 있습니다마는 이에 가르침 바랍니다.

큰스님: 물론 사람이 생명의 근본이 있으면 마음을 낼 수 있고 마음을 내면 몸이 움죽거려야 정상적인 사람이죠. 마음을 내지 못하면 목석이고 또는 몸을 움죽거리지 못하면 불구인이고 또는 육신이 보이지 않으면 무효고, 이렇게 되니까 그 모두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까 분수 얘기 했듯이 내려가면 올라가고 올라가면 내려가고 이렇게 하는 게 아주 정상입니다. 아래로 들 때는 저녁에 잠을 자는 것이고 위로 올라올 때는 낮에 일을 하는 것이고 그렇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게 낮과 밤이 없으면 못 살듯이 그렇게 작용을 하는 것이 그대로 법입니다. 그대로 법이에요.

그런데 그대로 법을 이끌어 나가는 데는 마음의 채찍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전부, 잘되고 못되고 잘하는 거고 잘못하는 거고 이건 나쁜 일이고 좋은 일이고를 전부 잘들 아십니다. 잘들 아니까 그거를 잘 다스려서 ‘이게 나쁘게 되는데 이렇게 잘 돌아가게끔, 맑은 물이 나와서 먹게끔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하고 거기 놨을 때에 비로소 우리가 움죽거리면서 채찍질해 가면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 이겁니다.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질문자1(남):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2(남): 전 대전에서 올라온 신도입니다. 저번에 집에서 화단을 전지하다 보니까 잡초가 무성해진 것을 보고 죄다 뽑아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불현듯 ‘화초나 잡초가 다 같은 불성인데 어느 것은 기르고 어느 것은 뽑아 죽이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라면 분명히 둘이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꽃은 가꾸고 잡초는 뽑아 버려야 하는지요? 가르침을 바라겠습니다.
 

큰스님: 그거는 여러분이 모르셔서 그렇지 기르는 것도 없고 뽑아 버린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얘기했죠. 차를 타고 내렸을 뿐이지, 예를 들어서 얘기하자면 타는 거는 화초를 기르는 것이요 내리는 것은 잡초를 뽑아 버린 게 됩니다. 내리는 것도 법 타는 것도 법이듯이 기르는 것도 법 뽑아 버리는 것도 법입니다. 그런데 그 뽑아 버린 것이 그냥 뽑아 버려지는 게 아니라 다시 차를 올라타듯이 다시 꽃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무심으로 그냥 그 잡초를 뽑아 버렸을 땐 벌써 내 마음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거기에 하나가 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꽃으로 화해서 그 잡초는 다시금 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모든 물이 수증기나 빗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서 잡초든지 꽃이든지 나무든지 다 먹여 살리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순간 보일 때 잡초지 또 한 번 돌아서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또 나올 때는 꽃으로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잡초도 잡초대로 그냥 있지 않고, 우리 인간도 인간대로 그냥 있지 않고, 모습도 모습대로 그냥 있지 않고 모두가 화해서 변경이 되고 또 한 찰나 돌아가면서 바꿔지고, 이렇게 세상 만물이 다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낮이 있고 밤이 있듯이, 안 보였다가 다시 돌아올 때, 예를 들어서 용광로에다가 모든 거를 집어넣어서 다시 생산이 돼서 나오면 그거 가지고서 또 생산처에 나와서 또 다른 걸로 변경이 돼서 다 나가고 또 그것이 헐어지면 용광로로 또 들어가서 다시 생산이 됨으로써 다른 물건으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거와 똑같습니다. 그거는 잡초를 뽑아 버린 게 아닙니다.
질문자2(남): 감사합니다.

질문자3(여): 스님, 저는 너무 감사해서 이 자리에 다시 용기를 내서 왔습니다. 언젠가 스님이 법문하시면서 이 한마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집에 부지깽이 하나라도 늘지 않았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 한마디를 가지고 정말 그동안 열심히 했었는데, 이번 토요일이면 새 집에 이사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부산지원 가까이에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얻었습니다. 또 민기도 참 힘들었는데 며칠 전부터 너무너무 스님을 보고 싶어하기에 오늘 이사할 건데 다음 주에 이사하려고 마음먹고 오늘 왔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큰스님: 잘했어! 사실입니다. 이 공부 하시면서 부지깽이 하나라도 늘어 가면 늘어 갔지 줄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정말 믿지 않고 배척하고 돌아서는 사람 아닌 다음에야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진실하게 얘기해 드릴 것은, 시주를 할 것도 없는데 ‘내가 이렇게 생기면 해야지.’ 하고 마음먹지 마십시오. 생기면 생기는 대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시주를 한다고 생각을 해 놓지 마세요. 또 어떤 때는 쓸 데도 많은데 돈이 생겼다고 뭉텅 이렇게 해 놨다가 급하다고 그거를 되집어서 쓰지 마시구요, 네? 되집어서, 되나누어서, 떼어서 쓰고 다시 해 놓는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아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외려 그렇게 되면 그 물건은 가져오고 물건값을 줬다가 물건값을 떼어서 내가 뺏는 거나 똑같으니까 부작용이 납니다. 그러니까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이렇게 내가 모든 경험에서 여러분에게 이끌어 드리는 말입니다.

질문자4(여): 대구에서 온 신도입니다. 저는 대구에서 영업용 택시를 몰고 있는 여기사입니다. 근데 10년을 넘게 일을 했지마는 이런 체험은 못해 봤어요. 시외 장거리를 가다 보면 속도를 많이 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구미를 갔다 왔는데 그날따라 차에서 탁 내리니까 하루살이와 날파리, 모기 같은 게 너무 많이 달라붙었어요. 근데 차 앞에 가니까 비린내가 갑자기 그렇게 났어요.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만큼 심하게 나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뭔가? 여직껏은 그렇게 많이 달라붙어 죽어도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며칠 있다가 구미 장거리를 가게 됐습니다. 톨게이트에서 표를 끊는 순간 ‘주인공!’ 하는 생각이 갑자기 나면서 ‘주인공한테 모든 걸 맡겨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주인공, 너만이 해결할 수 있잖아! 죽게 하는 것도 살게 하는 것도….’ 그러고 맡기고 갔는데 구미에 도착했을 때는 하루살이 한 마리가 붙어 있어요. 그래 그날 내려올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속도를 100㎞를 넘게 냈는데도 나방이 한 마리도 붙어 있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또 얼마 있다가 장거리를 가게 돼서 아무 생각 없이 표를 끊고는 그냥 고속도로에 올렸는데 구미에 도착하니까 너무 많이 붙어 있는 거예요. 막 비린내가 나고 너무 구역질이 나고 못 견디겠더라고요.

관했을 때는 되는데 관하지 않았을 때는 안되고, 마음을 냈을 때는 되는데 맘 내지 않았을 때는 안되더라고요. 여러 번을 그런 식으로 테스트를 해 봤습니다. 그다음에 또 갈 기회가 있어서 또 그런 식으로 마음을 내고, 주인공 자리에 모든 걸 맡기고 갔는데 단 한두 마리 정도 붙어 있지 더 이상 붙어 있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신기하고 또 감사했고요.

근데 왜 마음을 냈을 때는 안 죽고 안 냈을 때는 죽는가 하는 그 의문이 아직도 안 풀려요, 스님. 그러고서 얼마 전에 또 시골길을 갔는데, 시골길은 원래 하루살이 모기가 너무 많거든요. 그런데도 그날은 막 달라붙는 순간 주인공 자리에다 탁 맡겼습니다. 맡겼더니 오다가도 전부 다 차 옆으로 피해 가더라고요. 그래 천평 와서 내려서 보니까 몇 마리 안 죽었더라고요. 그렇게 관했을 때는, 마음을 딱 주인공 자리에 맡겼을 때는 안 죽었는데 맡기지 않았을 때는 왜 죽는 겁니까?

우리가 그대로 법을 이끌어나가는 데는 마음의 채찍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전부 잘하는 거고 못하는 거고,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이고를 너무 잘들 아십니다.
그러니까 그거를 잘 다스려서‘이게 나쁘게 되는데 잘 돌아가게끔,
맑은 물이 나와서 먹게끔 하는 건 너밖에 없다.’ 하고
거기 놨을 때 비로소 우리가 움죽거리면서 채찍질해가면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큰스님: 이게 말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마음을 내면 그쪽에서도 전깃줄이 오듯이 이렇게 와서 하나가 됩니다. 하나가 돼요. 그 마음이 통해서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그냥 하나로 불이 들어오듯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한 찰나에 그 하루살이나 나방은 다시 화해서 다시금 재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묘법인지 모릅니다.

질문자4(여): 예. 정말 감사했습니다.
큰스님: 그래서, 우리 마음공부 하는 분들이 잘 들으세요. 정신계 과거 부(父)와 현실 자(子)가, 생각을 안 했다 하면 부로 하나가 돼 버리고 생각을 냈다 하면 자로 하나가 돼요. 그래서 자로 하나가 되니까, 움죽거리니까 법이 되고 법신이 되고요. 또 그냥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주인공에다 맡기면 그냥 부로 하나가 돼 버려요.

즉 말하자면 당신과 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고, 한 부부가 있어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말을 할 때 “당신, 이런이런 일을 하는데 나 좀 도와줘!” 이런다면 바로 부부의 마음이 하나가 돼 버리죠. 하나가 돼서 남편의 마음과 그냥 같이 해 주는 거지요. 그러면 하나가 되는 거예요. 부인과 남편이 둘이 아니에요. 하나가 돼서 마음으로 모든 일들을 적합하게 해 나가죠. 그런데 또 남편한테 얘길 하면서 “이걸 하는데 당신도 좀 도와줘.” 하면 그냥 남편이 부인으로 하나가 돼 버려요. 부인에게 한마음이 돼 버려요. 그래 가지고 그 모든 일들이 적합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둘이 돼서 되는 게 아니구요, 모든 게 하나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또 하나로 돌아가고요. 그러니 그것이 부와 자가 상봉해야, 우리가 ‘견성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 그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둘로 보니까 아니 되죠. 때에 따라서 이거를 할 때도 하나가 돼서 하고 저거를 할 때도 하나가 돼서 하고, 꽃을 볼 때는 꽃하고 나하고 하나가 되고, 이렇게 그냥 하나하나 찰나찰나 바뀌면서 돌아가면서 나투는 거죠. 그래 고런 조끄마한 체험이 바로 이 세상만사를 다 체험하게 할 수 있는 겁니다. 바로 그 줄을 잡고 나가는 게 ‘아, 이런 거로구나!’ 하고 잡고 나가는 게 바로 부처님이 가르치신 반야줄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자성줄.

질문자4(여): 감사합니다. 그리고 스님, 한 가지 더 감사한 인사를 드립니다. 제 딸이 7월에 턱 수술을 했었어요. 병원에 입원시키는 순간 모든 걸 주인공 자리에 맡기고 들어갔습니다. 수술실에 넣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었고 저의 딸한테도 그런 식으로 얘기했었어요. “주인공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들어가라. 큰스님께 항상 네 마음의 전화를 해라.” 그러고 수술실에 들여보냈죠. 그런데 두 시간 반 걸린다고 한 수술이 무려 다섯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턱 뼈를 깎아 내고 이러는데, 수술실에서 열두 팀이 나왔는데 마취가 깰 때에 전부 너무너무 고통스러워하고 떨고 그래요. 그러나 저의 딸은 병실에 와서도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아프지도 않고 그래서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큰스님, 이 공부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자5(남): 큰스님, 감사합니다. 저는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저의 형수가 심부전증으로 벌써 1년이 넘게 고생을 하고 있는데 제가 아무리 마음으로 형수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애를 써도 그렇게 낫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스님 말씀대로 제 주인공한테 계속 부탁을 했는데 결국 주인공이 인도한 대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스님, 좋은 가르침 주십시오.

큰스님: 주인공한테 나를 낫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불을 켜려면 전깃줄과 전깃줄을 갖다가 그냥 들이대서 매라 이거죠. 그래야 불이 들어오지 ‘이 줄을 붙게 해서 그저 병이 낫게 해 달라.’ 이런다면 벌써 둘이 되잖아요.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붙일 수 있어.’ 하는 거죠. 그리고 본인한테 그게 필요합니다. 어떠한 문제든 간에 본인한테 관법을 가르쳐서 모든 거를 거기다가 맡겨 놓고 ‘너만이 이것을 싹 낫게 할 수 있다.’ 하고 관하라고 그러세요.
질문자5(남): 고맙습니다.

질문자6(남): 저는 법형제회 심의회 회원입니다. 큰스님께서 매번 저희들을 위하여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또 자상하게 법을 일러 주시니 그 은혜야말로 하늘과 같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큰스님을 영원한 스승으로 마음 깊이 모시고 따르고자 합니다. 그런데 옛날 어느 조사께서는 “부처가 이 자리에 있다면 감히 죽여서 개나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살불살조(殺佛殺祖)의 공안(公案)이 되었습니다만, 부처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은데 감히 스승을 죽이겠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싶습니다. 스승을 받들어 모시면서 가르침을 배우는 도리는 어떠해야 하는지 지도 말씀을 청합니다.

큰스님: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죠. 하하하…. 부처를 말하듯이 아까도 부부 얘기를 했습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팔만대장경을 집어삼키지 않는다면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과 둘이 아니다 하는 뜻은, 부처님의 마음을 집어삼킨다면 어디 제 마음과 둘이겠습니까. 그것이 선의 도리에서는 부처님도 집어삼키고 일체를 집어삼키는 데 있는 겁니다, 모습을 집어삼키는 게 아니라. 그래도 이해가 안 가십니까? 아내가 남편한테 마음을 줬는데 남편이 그냥 아내 마음을 집어삼켰어요. 집어삼키고선 일을 해요. 또 그 아내가 남편한테 말을 해 가지곤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다 그냥 삼켜 버렸어요. 삼키고는 일을 해요. 그럴 때에 찰나찰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죠.

그러니까 과거 부, 자기 정신계의 자기와 현실계의 자기가, 내가 아까 얘기했죠? 생각을 안 할 때는 부로 하나가 되고, 즉 정신계의 부가 되고, 내가 생각을 하고 일을 하려고 했을 때는 부가 자로 마음이 하나가 돼서 그대로 법신이라고요. 그러니까 일체를, 거지든 부처님이든 일체 만물만생을 다 둘 아니게 집어삼켜라 이런 뜻이죠.

질문자6(남): 예. 말씀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러니 먹어도 먹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먹누?

질문자7(남): 큰스님을 오늘 이렇게 만나 뵙고 좋은 말씀을 들으니 제가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또 이 법회에 참석해 주신 여러 신도들께 제가 불심을 갖게 된 동기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양산에 있는 절에 몸을 담고 있는 신도입니다. 근데 오늘 사실상 제가 여기 나온 것은, 저의 부친이 지금 암으로 3년을 고생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부친을 간호하던 모친도 또 지금 몸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큰스님을 뵈오면 좋은 설법과 영험이 있다 해서 욕심상 나왔습니다.

그렇지마는 제가 불심을 갖게 된 동기는, 군대에 있을 때 장기 복무 하다 보니까 양산에 각종 예비군 및 방위병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사고가 많이 나고 하는 일들이 잘 안됐는데, 어느 날 책을 정리하는 도중에 79년도에 발행된 『불교성전』이란 책을 발견했습니다. 참 낡았었지요. 거기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서 탄생을 하셨고 하는 것을 쭉 읽게 됐습니다. 읽고서 하나하나 가슴이 메이지 않는 데가 없어서,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해 봤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절도 어떻게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가서 “몇 번 합니까?” 하고 물어보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제는 부처님 앞에 가도 어떻게 하는지 좀 압니다. 양산에 포교당이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사월 초하루, 그다음 관음재일, 지장재일, 그다음에 칠월 칠석, 그다음에 칠월 백중, 이렇게 가 봤습니다.
불교에 인연이 된 동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제가 보다시피 몸이 뚱뚱합니다. 술도 좋아했고 모든 것을 다 좋아했습니다. 사나이가 하는 거라면 다 했습니다. 장사도 많이 해 봤습니다. 그래도 되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다 통풍이 왔습니다. 어떤 절에 갔을 때, 거기에 계신 스님께서 침을 놓으시는데 30일간을, 하루 맞을 때 한 백 몇 대를 맞았습니다. 그렇게 맞아서 통풍은 거의 잡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불심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왜 불심을 바로 가지게 됐느냐 하는 것은 오늘 큰스님께서 이야기해 주신 한마음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저희들이 항상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 경을 읽거나 예불을 모시거나 스님이 가르치시는 여러 가지를 하거나 그런 모든 게 다 불정심이 있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부친께서도 진통이 온다 하면 항상 어깨를 주물러 주면서 진언을 외웁니다. 진언을 외우면서 하니까 내 이 손이 가면 통증이 온다든가 하던 것이 사라지고 그냥 스르르 주무시고 이렇게 하더라 이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뭐냐. 낫게 해 달라, 낫게 해 달라 하고 부처님 전에 불공을 드리는 것보다도 우리가 불정심을 가지고 내가 찾는다는 그 뜻을, 신도 분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강조하고 싶습니다. 바라지 말고 항상 남한테 베풀면서, 베푸는 대가를 내가 받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불심을 가지고 항상 같이 해 나간다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또 내가 잘못하겠다 싶을 때는 바로 어떠한 부처님께서 나투셔서 내 친구나 다른 어떠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잘못을 막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을 행한다 할 때는 또 막아 주고 있더라 이겁니다. 이것이 바로 불정심이요, 바로 불심을 진정하게 믿는 것이고, 또한 큰스님의 말씀과 같은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지 않겠나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오늘의 법회에서 진짜 좋은 말씀 듣고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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