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설법제일 부루나 존자 <중>설법제일이 되기까지

상수제자 사리불 몰라보고 설법해
바라문나라 코살라국에서 전법 펼쳐
바라문교 큰손 수닷타·수보리도 귀의
유마, “대중 마음 관찰 후 설법해야”

부루나의 등장과 귀의는 부처님과 교단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여러 종교가 혼재하고 있었던 당시 인도에서 새롭게 나타난 부처님의 교단이 많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십대제자의 공이 컸던 것인데, 부루나 존자 역시 큰 역할을 한다.

사리불의 감탄
“그대의 설법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으니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부루나 존자님.” 부루나의 일곱 수레 설법을 듣고 난 사리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그의 설법이 그토록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설법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부루나의 설법은 그야말로 비유의 정수였다. “어떻게 저의 이름을 아십니까?” 사리불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부루나는 놀랐다. “저는 사리불이라고 합니다. 존자의 이름과 명성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에서야 존자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사리불과 부루나는 그렇게 만났다. 밤이 깃든 숲에 마주 앉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이름을 처음 불렀다. 그리고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불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설법한 부루나는 부끄러워하며 절을 올렸다. 그 후로 부루나는 사리불을 도와 교단의 여러 일들을 보게 된다.

교단의 중심이 되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지 2, 3년 쯤 지났을 때였다. 당시 인도는 16개의 나라가 번성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코살라국 역시 큰 나라였다. 부처님의 존재를 알게 된 코살라국의 부호 수닷타는 마가다국 죽림정사에 계시는 부처님을 모셔오고 싶었다. 그래서 부처님이 머무실 정사를 짓기로 했다. 하지만 바라문이 지배하고 있던 코살라국에 부처님의 정사를 짓는 일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가다국에서는 부처님의 교단이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 코살라국에선 바라문이 절대적이었다.
“수닷타 장자님, 어찌된 일입니까? 그대는 우리 바라문교를 믿었고 공양도 올리지 않았습니까?” 코살라국의 대부호였던 수닷타는 바라문교의 ‘큰 손’이었다. 그런 사람이 다른 교단에 귀의했다는 것은 바라문 쪽에서 볼 때 큰 사건이었다. 코살라국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불교와 바라문교가 부딪히기 시작했고 대중은 혼란에 빠진다. 그 때, 부처님은 부루나와 사리불을 코살라국으로 보낸다. 부루나는 사리불과 함께 코살국에 불법을 전하기 시작한다. ‘12연기’, ‘사성제’, ‘팔정도’ 등 부처님의 정수를 듣게 된 코살라국의 대중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바라문교의 수장인 복칼라사디마저 부처님의 가르침에 무릎을 꿇게 된다. 수보리 존자를 귀의시킨 일도 이때의 일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두 가지 의혹을 품다
부루나의 설법은 부처님과의 깊은 물음과 대답에서 왔다. 어느 날, 부루나가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뢴다. “세존이시여, 만약 세간의 모든 육근, 육입, 오음, 십이처, 십팔계 등이 모두가 본래 그대로 정정한 여래장(如來藏)이라면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와 모든 현상적인 것들이 생기어서 변천을 하고 마침내 없어졌다가 다시 시작하곤 하는 것입니까? 부루나 존자는 모든 유위상은 순차적으로 변천하고 유동하면서 끝났다가 다시 시작되는데, 언제 비로소 끝나는 것이며, 이것이 무슨 도리인지를 물었다. 즉, 여래장이 청정한 것이라면 어찌하여 여러 가지 차별적인 현상이 나타나는가를 물었다.
또 하나,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본성은 서로 화합되어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히 융합되어서 항상 그대로 맑고 고요히 머문다고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흙의 성품이 허공계에 두루 충만하다면 어떻게 물의 성품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또한 물의 성품이 세계에 두루 충만하다면 불의 성품이 용납될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물과 불 두 성품이 허공에 함께 두루하면서 서로 이기고 없애고 하지 않습니까? 또한 흙의 성품은 그 근본이 탁하고 막히는 성질이 있고, 저 허공의 성품은 본래로 투명하여 통하는 성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막히고 통하는 그 두 가지 성품이 함께 법계에 두루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와 같은 도리를 모르겠습니다.” 부루나의 두 번째 물음은, 지수화풍이 서로를 허용할 수 없는 것인데 원융하다 하니 그 이치에 대해 물은 것이다. 능엄경 4권 견도분에서 전하는 이 두 물음은 부루나가 만법의 근원을 묻는 것으로 부처님으로부터 여래장 묘진여성의 실체를 이끌어 낸다.

일승(一乘)한 이치
“부루나여! 네 말대로 본래 청정한 그대로가 청정한 묘각(妙覺)이라면 청정한 그 묘각에서 어찌하여 저 산하대지가 홀연히 생기게 되었을까 하는 의혹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너는 일찍이 여래가 항상 말하기를, 깨닫는 성품인 성각(性覺)은 묘하게 밝아 묘명(妙明)하고 본래로 깨닫고 아는 본각(本覺)은 명묘(明妙)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부처님의 설법이 시작된다. 각(覺)은 원래 밝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밝음을 다시 더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보석의 밝음은 보석이 본래 가진 밝음이지 결코 보석과 밝음을 나누어 보석에 다시 밝음을 더해야 ‘밝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본각(여래장) 위에 다시 밝음(청정하다고 한 것)을 더하는(다시 말하는 것) 것은 일종의 허망함이라는 것이다. ‘여래장이 청정하다면’이라고 시작한 것부터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부루나가 잘못 인식한 ‘청정한 여래장’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아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긴 법문을 이어간다. 이 부분에서 만법의 근원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설법이 전해지게 된다. “이렇게 요란함이 상대(相待)하여 피로함이 생기고 피로함이 오래되어 사념망상을 발하고 망상의 티끌로 인하여 본래로 맑고 밝은 자성이 스스로 혼탁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티끌 같은 피로와 번뇌를 일으켰느니라. 번뇌가 일어나서는 세계가 되고 고요하게 돼서는 허공이 되었다. 그래서 허공은 한결같고(同) 세계는 각별하게 다르니라(異). 저 동이(同異)가 없는 것이 참으로 유한한 진리(유위법 有爲法)가 되느니라.” 산하대지가 생기는 것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이다. “각(覺)의 명(明)과 공(空)의 매(昧)가 상대하여 요동함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풍륜이 있어서 세계를 집지(執持)하느니라.” 이 대목에서 불교의 묘법이라고 하는 12연기 가운데 그 시원인 무명에서 행(行)이 생성되는 그 뿌리가 설해지게 된다.

사대(四大)가 원융한 이치를 밝히다
이어서 부처님이 두 번째 물음에 대해 말씀하신다. “부루나여 허공을 비유하면 허공의 본체는 어떠한 형상도 없으며, 저 모든 상이 자기의 성질은 발휘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부루나여! 저 태허공은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해를 막으면 어두우며, 바람이 불면 움직이고 비 온 뒤에 구름이 개이면 맑고, 기운이 응결되면 탁하며, 흙이 바람과 함께 쌓이면 연무를 이루고, 물이 맑으면 비친다. 참된 묘각의 밝음도 허공이 모든 상을 거절하지 않는 도리와 같다. 너는 허공의 밝음으로써 공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지수화풍의 사대 속에서 그들은 각각 공능을 나타내며, 각각 하나의 대(大)가 나타나게 됨으로써 하나가 나타나는 것이다. 지수화풍이 만약 동시에 함께 나타나게 되면 그들은 동시에 함께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함께 나타날 수 있는가? 부루나여! 마치 하나의 물속에 태양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이 함께 이 태양의 그림자를 보면서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간다면, 이 두 사람 모두 태양이 자기를 따라 오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의 태양이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간 것이다. 태양은 미리 준비된 목적지가 없으며, 하나의 실재하는 모습이 없다. 너는 마땅히 이렇게 어려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 태양은 하나인데, 어찌하여 각각의 사람을 따라가는가? 각 사람은 모두 자기를 따라오는 태양이 있으니, 이것은 태양이 하나라고 말할 수 없으며, 두 개가 나타난 것인데, 너는 어찌하여 하나가 나타났다고 말하는가? 이렇게 서로 전전하는 것이 허망한 모습이며, 조금도 근거가 없다.” 사대가 각기 법계에 두루하지만 본래 성품이 공(空)하여 서로 용납되는 것임을, 원융할 서 있음을 말씀하셨다.

설법제일도 고개 숙인 유마의 설법
비록 세속의 옷을 입었으나 사문이 지키는 청정한 계율을 똑같이 받들고, 비록 속세에 살지만 삼계에 집착하지 않고, 처자가 있으나 항상 범행을 닦으며, 권속이 있으나 늘 그것을 멀리했으며, 비록 음식을 먹지만 선열로서 그 맛을 삼고, 정법을 지켜서 모든 이들로부터 공양 받는 이가 있었다. 부처님 당시 세속에서 가장 법력이 높았던 사람으로, 흔히 출가인들에게는 부처님이 계시고 세속에는 이 사람이 있다고 했다. 유마 거사다. 설법 제일인 부루나 존자도 유마 거사에게 큰 가르침을 받는다. 부루나 존자뿐만 아니라 십대제자를 비롯해 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의 법력에 고개를 숙였다. 어느 날 부루나 존자가 숲에서 갓 출가한 비구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었다. 마침 유마 거사가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부루나 존자의 설법을 듣게 된 유마 거사는 설법이 끝나자 부루나에게 다가가 말한다. “부루나 존자여, 먼저 그대가 선정에 들어 대중의 마음을 관찰한 후에 설법해야 합니다. 더러운 음식을 보배로 된 그릇에 담아서는 안 됩니다. 비구들의 마음이 생각하는 바를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유리를 수정과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능히 중생의 근원을 알지 못하면서 소승법으로써 법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스스로 상처가 없는데 구태여 상처를 내지 마십시오. 큰 길을 가고자 한다면 작은 길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큰 바닷물을 소의 발자국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태양의 광명을 저 반딧불과 같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루나 존자여, 이들 비구는 오래 전에 대승의 마음을 내었으나 중간에 이 뜻을 잊어버린 것인데 어찌 소승법으로써 그들을 가르치십니까?” 유마 거사가 바로 삼매에 들어 비구들로 하여금 스스로 숙명을 알게 했다. 부루나는 유마 거사의 발에 머리 숙여 예배했다. 설법제일인 부루나 존자도 들어야 할 법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설법제일로 칭송된 부루나 존자의 명성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래 자란 나무였던 것이다. 많은 바람을 맞고, 많은 비를 맞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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